예수를 바라보자(“Seeing Jesus”)  Peter Barnes/이대우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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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바라보자(“Seeing Jesus”) 

Peter Barnes/이대우 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을 반대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바로 전 주에, 헬라인 몇이 유월절 예배에 참
석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왔던 기록이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하나인 필립을 만나서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라고 간청했다(요 12:20-
21).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이 이들 헬라인들을 만나 보시겠다는 답변은 하
시지 않고, 자신의 죽음과 또 생명을 보전하기 위하여 죽으셔야 된다는 설명
을 하셨다(요 12:24). 오늘날 이와 같은 헬라인들의 요청이 늘어나고 있으
며, 또 이러한 요청들은 무의미한 것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
는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라는 질문에 대한 주님께서 주신 답변을 전적
으로 외면하고 있다. 심지어 영적으로 개혁의 전통을 물려받은 교회들도 그리
스도를 묘사한 그림을 받아들이는 관습이 널리 퍼지고 있다. 그리스도를 묘사
한 
영화가 나왔고, 그리스도의 초상화가 나왔고, 책마다 그리스도의 그림을 
그리는 등,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그림들이 범람하고 있다. 

1. 문제점이 무엇인가? 
이러한 상황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하여 제일 먼저, 그리스도의 그림을 반대
해야 할 기본적인 문제점을 결정지어야 한다. 예수님의 그림에 대한 문제가 
성경에 나타나는 질문 중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는 것들 중
의 하나인가? 말하자면 우리 신앙생활에 예수님의 그림이 어느 정도 필요하
고, 또 도움이 되는가 하는 질문을 해 보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사
진을 사용하는 것이 어떠한 편리를 위한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성경 원리에 
위반됨으로 제외되어야 한다는 입장에 당면하게 되었는가? 사실 이상과 같은 
질문과 논의에 대하여 가장 타당하고 명료한 진리를 성경은 우리에게 제시하
고 있다. 우리가 이것을 십계명중에서 알 수 있으며,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
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
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
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
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4-6; 신 5:8-10참조) 
성경 여러 곳에는 거짓 신들의 우상뿐 아니라, 진실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
하여 형상을 만들지 말도록 단호한 명령을 내리셨다(레 26:1, 시 115:1-8, 
사 2:8, 40:18-20, 41:21-24, 46:5-7, 호 13:2, 암 5:26-27, 행 17: 24-25, 
29, 롬 1:22-25, 요일 5:21 참조). 선지자들의 이스라엘을 향한 가장 엄중한 
비난이, 그들이 나무를 잘라 일부를 음식을 만들거나 데우기 위하여 불을 피
우는데 쓰면서, 동시에 그 나무의 다른 부분은 신의 모양을 조각하여 섬기는 
일이었다(사 44:9-20). 
이러한 형상들이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다른 물체에다 동여매야 하며, 
그 형상들은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또 움직이지도 못한다. 그리고 그 
형상들은 또한 어떤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을 행할 수도 없다(렘 10:1-5). 이
와 반면에 진실하신 하나님을 어떤 눈에 보이는 모양으로 나타낼 수가 없
다. 
하나님은 영이시며(요 4:24), 또한 보이지 않으시는 분(딤전 1:17)이시기 때
문에 그 하나님을 물질적인 상태로 표시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이것
이 바로 모세가 이스라엘에 대해 경고한 이유이며, 신명기 4장 15-18절에 모
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호와께서 호렙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
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
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
상이라든지, 땅 위에 있는 아무 짐승의 형상이라든지, 하늘에 나는 아무 새
의 형상이라든지, 땅 위에 기는 아무 곤충의 형상이라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아무 어족의 형상이라든지 만들까 하노라.”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고 논리적으로 말한다면, 위의 구절에서 아버
지의 형상도 만들지 말고, 아들의 형상도 만들지 말고 또한 성령에 대한 형상
도 만들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십계명의 제 2 계명을 대수롭
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성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그리며, 또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n그들이 성자이신 예수님의 사진을 인정하는 것은, 그가 인신(人身)이 되시어 
세상에 오셨고, 인간으로서 우리를 대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주장
에 대하여는 나중에 다시 논의하기로 한다. 이러한 생각이 잘못 인도된 것이 
아니며, 예수님의 사진이나 그림에 대한 문제점이 절대적으로 없다고 믿는 자
들은 이것을 진지하게 믿고 있다. 그리고 또한 복음전도에 열성을 가지고, 좋
은 영화를 만들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만들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동료인 그리스도인들의 영화를 비평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는 성경말
씀에 입각해서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2. 왜 그리스도의 그림이나 사진을 가질 수 없는가? 
1) 그리스도를 그린 모든 그림은 부정확하며, 작자의 상상을 그린 것뿐이다. 
성경말씀의 한가지 특별한 특징은, 신약과 구약을 막론하고 그리스도의 본질
을 표명하지만(요 5:39), 그리스도의 육체의 모양은 설명하지는 않는다. 성경
에 단 두 구절이 그리스도의 육체적 모양에 대하여 약간 설명한다. 첫 번째 
구절은 장차 오실 (주님의 초림) 예수님에 대한 이사야 53장 2절의 예언이

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
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
도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으로 태어나신 그리스도의 
육체적 모양이 지극히 장엄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미약한 것을 상상하게 된
다. 
두 번째 예수님에 대한 설명을 요한복음 8장 56절-57절에서 읽을 수 있다. 이
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대화하신 내용에서 나타난다. 우리 주님께서 유
대인들에게 선언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하셨고, 57절에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
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라고 대답하였다. 누가복음 
3장 23절 기록에 의하면, 이때 그리스도의 나이가 30세를 좀 넘은 것으로 짐
작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
(마 8:20)을 생각하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기 위하여 애쓰셨기 때문
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나이를 50정도로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된다
(막 3:2
0-21, 6:31-34). 
여하튼 간에 위에서 말한 두 가지 경우가 있지마는, 그리스도의 육체의 모양
을 설명한다고 말하기에는 미약하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감동시켜 
주님의 육체적 모양을 설명하는 기사를 쓰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
로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
다”(요 20:29)라고 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사도 베드로도, 일세기 신자들이 
보지 못한 그리스도를 믿었음을 기록하였다(벧전 1:8). 그러고 이러한 관점
은 아직도 존재한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셨지만, 그가 어떤 모양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
다. 성령께서도 그리스도께서 키가 작은 지, 큰 지, 또 살이 쪘는지, 말랐는
지, 파란 눈을 가졌는지 혹은 갈색의 눈을 가졌는지, 검정 머리를 가졌는지 
또는 연한 색의 머리를 가졌는지 알 수 없다.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데 있어 
이상에 관한 예수님의 모양이 관계되지 않으며,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구원
에 이르는데 있어 필요한 지혜를 얻는 것과도 전혀 상관이 없다. 
숱하게 많은 예수님의 사진을 한 곳에 전시한다면 어떤 것이 바르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
고 그 모든 그림은 예수님을 나타내는데 부정확하다. 유명한 화
가, 엘 그레고(El Greco)가 그린 그림 중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
람들을 쫓아내시는 광경의 그림은, 어떻게 생각하면 주님의 사역을 현명하게 
묘사한 것 같고, 예수님의 복음의 목적과 능력을 잘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사진이 어느 정도 믿을 만 한가? 어느 정도 사실인가를 알 수 있
는 방법은 없다. 현대에 와서도 어떤 사람의 품성을 그림으로 묘사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 
최근에 와서 캐서린 린스크우그(Kathryn Lindskoog)의 ‘그늘진 
땅'(Shadowlands)이라는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불평을 하였으며, 그 불평인
즉 씨 에스 루이스(C. S. Lewis)를 부드럽고, 파란 눈을 가진, 모호한 신앙
을 소유한 할아버지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 영화에서 조이 데
이비드맨(Joy Davidman)은 뛰어나게 아름답고, 말할 나위 없이 밝은 민감성
을 가지고 있다는 표현을 또한 불평한 것이다. 이 영화가 시 에스 루이스가 
죽은 후 겨우 23년째인 1986년에 미국 텔레비전에 상영된 것이다. 하물며 그
리스도를 묘사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고,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고 한다. 또 그들은 말하
기를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림이 정확하고 부정확한 것에 관계없이 그릴 수
도 있다’라고 한다. 그렇지만 어떤 가정주부가 남편이 여행 중이어서 없는 동
안에 집에서 어떤 딴 남자의 사진을 걸어 놓고 이 것이 내 남편이라고 계속하
여 바라보고, 또 말하기를 ‘내 남편의 사진은 아니지만 이 사진을 바라봄으로
써 내 남편을 생각한다’라고 한다면, 사실상 그녀가 남편을 생각하는 것인
가? 
대 교황 그레고리(Gregory: 540-604AD)와 다마스쿠스 존(John of Damascus: 
675-749 AD)은 두 사람이 다 예수님의 사진에 대하여 긍정적이다. 그는 말하
기를 ‘책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글을 가르치며, 그림은 글이 아니다. 그
림은 눈에게 말하며, 말은 귀에게 말한다. 이러한 것이 연결되어 우리에게 이
해를 가지고 온다.’ 이와 같은 비슷한 이유를 가지고 예수님의 초상화나 영화
를 옹호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질문해야 할 문제는, 이러한 사실이 아닌 것
을 보고 무엇인가를 믿게 하는 것이 진리를 위하여 봉사하는 것인가? 

2) 그리스도의 초상화는 모두가 부정확할 뿐 아니라, 그 초상들은 참 그리스
도를 가르치는데 오류의 근원이 된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초상을 그린다는 것은, 그 초상화를 그리는 작가의 상상
을 그린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아돌프 본하낵(Adolf VonHarnack)이 그
리스도의 생애에서 초자연적인 기록을 빼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유주의
(自由主義)적 신교사상(新敎思想)이 생겼고, 심지어 카톨릭교회의 조지 티이
렐(George Tyrrell)은 본하낵을 비평하여 말하기를, ‘본하낵이 보는 그리스도
는 마치 19세기 카톨릭 교회사의 암흑시대를 더듬는 것 같이, 깊은 샘물의 밑
바닥을 들어다보는 자유주의 신교사상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티이렐도 같
은 종류의 오류를 범했다. 
진리를 그림으로 묘사하려고 할 때 위험이 따르는 것이 사실이며, 그 진리를 
그림으로 묘사하는 것을 회피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리스도를 그린 모든 그림
은 화가 자신의 상상과, 화가 자신의 문화 배경이 반영되는 경향이 있다. 그
렇기 때문에 우리는 비잔틴(Byzantine)의 그리스도, 앵글로색슨의 그리스도, 
아프리카인의 그리스도, 히피족의 그리스도 
등 한없이 많은 종류가 있다. 그
러나 그 중에 어느 한 그림도 진실한 그리스도를 나타내지는 못한다. 홀맨 헌
트(Holman Hunt)의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도 예외가 될 수 없
는 작품이다. 

3) 그리스도의 사진은 그리스도를 욕되게 한다.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표시해야 하는 정당한 이유가 있는가?’하는 질문에 우
리는 답변해야 하는 입장에 도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진은 그리스도를 욕
되게 한다. 우리는 둘째 계명을 다시 생각해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 
형상을 우리가 만들지만, 그 형상을 섬기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우리
의 신앙심을 돕게 한다’거나, ‘이해력을 준다’거나, ‘예배 시에 쓰는 것이 아
니고 가르치는데 쓴다’고 할지는 몰라도 십계명의 제 2 계명은 형상을 만들
어 거기에 경배하지 말도록 명하신 것 뿐 아니라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셨
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진실하게 나타내는데 있어 어떤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지 말도록 절대적으로 명령하신 이유는, 그 형상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경우도 
동일하다. 예술가들이 그리스도를 묘사
하는데 있어 그의 신성을 묘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인간성을 나타내기
를 힘쓴다. 그들은 결국 천국을 묘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 자신의 그림
을 지상에다 한정할 수밖에 없다. 다메섹 노상에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리스도의 고귀한 영광 때문에 장님이 된 것이나, 고귀한 영광 때
문에 사도 요한이 엎드러져 죽은 것 같이 된 사실은(행9:3-9, 계 1:17) 그들
의 생각에서 제쳐놓아야 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성품을 인간의 형태로 극한하여 묘사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
리스도의 성품을 이해하는데 있어, 그의 두 가지 성품을 나누어 생각하는 것
을 허용하시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신 기간에도 그는 
하나님 자신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우리의 구주가 되신 것이다. 그리스
도를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내는 사람들은 토마스 와손(Thomas Wasson)이 말
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절반을 그려 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
를 인간으로만 우리가 안다면, 그 놀라운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의 중심을 알
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