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소진화小進化’라는 용어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 이한길, 덕일교회 청년부 >
시작하는 말
학교에서 진화론과 유신적 진화론, 그리고 요즘 유행하는 지적설계논쟁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비록 그 강의들은 선택과목이었지만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고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 맞는다면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다. 무신론자들이 기독교인들을 향해 비판하는 비판은 기독교인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이론적으로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론을 뛰어 넘어서 진화론을 사실로 여긴다. 하지만 진화론자들 또한 진화가 있다는 것을 전제를 한 후에, 그 믿음을 기반으로 해서 이론을 펼쳐나간다는 사실이다. 이점에서 진화론 역시 신앙이며 종교라 할 수 있다. 바빙크(Herman Bavink)가 주장한 것을 예로 들어보고자 한다.
바빙크가 그의 시대 때 지적했던 문제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온다. “첫째, ‘한 혈통에서 내려온다는 생명의 기원에 대한 이론’을 이해하기 어렵다. 둘째, 다윈주의는 그 유기체의 이상 발전단계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변한다는 형태는 발견되지 않았다. 중간 단계의 형태가 한 번도 발견되지 않는다. 셋째, 사람의 기원은 풀리지 않는 문제이다. 넷째, 다윈주의는 정신적인 면과 영적인 면에 있어서 인간성에 대해 설명을 내놓지 못한다.” 이제 이 문제는 지구의 고고학이라 여겨지는 지질학이 진화를 뒷받침해줄 만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지로 넘어간다.
“지질학의 단층은 항상 특정 순서로 발생하는데 화석들이 낮은 지층에서 발견되면 하등 생물로 간주하는 견해가 대세다. 하지만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긴 시간이 필요한 지질학은 고생물학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고생물학 전체가 진화 학설을 뒷받침하는데 이용된다. 하등형태가 고등형태로 진화된다는 것은 전제되는데, 이 전제를 기반으로 해서 단층의 쌓이는 순서와 기간이 결정된다. 이 단층의 순서가 진화 이론의 증거로 사용된다. 이 논리는 순환논리로 아무 것도 입증하지 못한다”(Bavinck, R.D., Concise Reformed Doctrine, ‘진화론’ 부분에서 발췌).
바빙크가 지적한 것처럼 증거가 없는 이론을 사실로 가정하고 밀어 부치는 행위는 큰 믿음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소진화’라는 용어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주장 역시 이러한 믿음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쉽지 않을 것이다. 즉 송인규 교수님이 2010년 10월 31일 남포교회에서 강의한 “그리스도인은 진화/진화론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의 강의안이 바로 그 진원의 발상지이다.
이 강의안은 학문적인 갈증을 해소할 만한 강의 자료들로 주의를 끈다. 또한 진화론의 여러 관점들과 창조론의 여러 관점들을 비교 분석하는 다양한 내용들도 돋보인다. 그런데 이 강의안에 대한 송 교수님의 의도와 사상에 대해 위험성의 여지가 엿보인다는 점이다. 이 논제와 관련된 ‘강의안’과 기독교개혁신보에 실린 송 교수님의 글을 중심으로 우리가 취할 바른 자세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문제의 제기
송인규 교수님의 “그리스도인은 진화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라는 강의 제목은 그리스도인들이 진화론을 대할 때 취해야 하는 태도에 대한 것이다. 이 강의안에서 송 교수님은 먼저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한 이론들과 관점 및 그것에 대한 반박과 문제점들을 나열해 두었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마지막 부분 ‘V. 그리스도인이 나가야 할 길’의 내용이다. 분명 이 앞에서는 여러 가지 관점들을 소개하는 자료들로 가득 차 있다. 그 자료들 속에는 진화론과 창조론도 있지만, 두 가지를 절충하려는 이론들도 담겨 있다.
그 상황에서 송 교수님은 “기독교 내에 다양한 입장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가운데 각자가 자기의 소신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은 마치 자신의 소신이 창조론과 일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여러 이론들 중 하나를 취할 수 있다는 의미처럼 들린다.
이러한 의도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하다. “내 자신의 결정이 영원불변의 진리보다 우선한다. 진리는 나에게 선택받지 못하면 진리가 아니다”와 같은 태도는 마치 칸트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칸트는 도덕론에 대해 아주 훌륭한 이론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덕의 법칙이 어디서 오는지, 양심의 근원이 어디인지’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 바로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않는 이신론자이기 때문이다(헤르만 바빙크, 원광연 역, 개혁교의학개요, p. 221이하).
나아가 송 교수님은 “자기 견해를 형성하도록 힘써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기독교 내에서도 창조론에 대한 내용이 다르니 스스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자기 분야의 학문을 닦고 섭렵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이 사안에 대해서 균형 잡힌 시각을 형성해야 한다”라고 강조하며 강의를 마친다. 이는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균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소진화를 의미하는 것인가? 유신진화론을 의미하는 것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혼란스럽다.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사실 송 교수님이 한 말은 어떻게 보면 부분적으로는 옳은 말이다. 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을 따르고 있는 합동신학대학원의 한 교수로서 진화론이 어떻게 잘못되었고, ‘진화’라는 용어를 왜 사용해서는 안 되는가를 설명해도 모자라는 판에 오히려 단서를 달면서까지 ‘소진화’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문이 발생한다.
2. ‘소진화’라는 용어 사용의 문제점
송 교수님의 강의안을 보면 ‘소진화’와 ‘대진화’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소진화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제시하는 근거도 자세하게 정리해두었다. 대략 정리하자면 생물의 종(種)내에서 발생하는 발전이나 변화를 ‘소진화’라고 하는데 ‘진화론이 소진화의 범위까지만 머문다면 그리스도인도 인정해도 된다’며 개혁신보의 기고에서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소진화는 보통 종의 분화 과정에 수반되는 작은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로 종 내부 혹은 집단 내부의 유전적 변이와 연관이 된다. 이 변화들은 지질학적 연대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짧은 기간에 걸쳐 발생하기 때문에 변화에 대한 사실적 주장과 이를 위한 검증이나 증명이 가능하다. 이에 대해서는 창조론자들까지도 기꺼이 인정하는 바이다. 따라서 생물학적 진화론이 만일 소진화의 범위에 머무르기만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진화론에 대해서 하등의 반론을 제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기독교개혁신보 제589호, ‘개혁 신학은 유신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는가?’).
다시 강의안으로 되돌아가 본다면 글 앞부분에서 여러 가지 관점, 즉 소진화에 대한 내용과 유신론적 진화론을 포함한 내용들을 나열한 뒤 ‘각자의 소신’과 ‘균형 잡힌 시각’을 갖자고 한다. 그 후 개혁신보에서는 단서를 달고 ‘소진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자신의 의도를 밝히고 있다. 이것은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유신 진화론의 입장처럼 보일 수 있다는 점이다.
강의안에서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 단어라 해서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과 함께 “삼위일체 또한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라는 내용도 담고 있다. 나아가 시편 104편 등 성경을 인용하면서 그 구절들이 생명의 생육과 발전과 관계되는 것으로 이것을 ‘소진화’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강의 제목만 보고 그 나열된 관점들과 예들을 본다면 당연히 비교하는 차원에서 나열된 내용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 내용들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면 “소진화라는 단어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송 교수님의 논리는 절대로 성립될 수 없다. 만약 송 교수님의 주장이 과학자들의 논거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면 과연 그가 ‘소진화’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발언을 아예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서를 달고는 있지만 ‘소진화’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송 교수님의 강의는 그 강의를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없어도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소진화’라는 단어도 사용할 수 있다”는 사고 방식을 받아들이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가?
한국 사람들이 김치를 많이 먹어서 한국 음식에 적응되고, 야구선수나 탁구선수들의 팔이 길어지는 것은 환경에 적응하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인데 왜 그것을 굳이 진화라고 하는 학술적 개념의 차원에서 설명을 해야 하는가? 진화라는 단어 속에 하나님의 섭리는 어디 있는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찬양하는 시편 104편을 ‘소진화’의 용어로 둔갑시켜서 증거로 제시하는 자들은 얼마나 사악한가? 창조와 진화를 타협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면 무엇인가?
게다가 강의 내용 중에는 “학문 속의 진리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진리가 아닌 것은 아니다”는 내용도 있어 ‘소진화’라는 용어를 받아 들여야 한다는 자신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카이사가 루비콘 강을 건넜고, 지구는 항상 공전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사실이다. 하지만 이 사실들이 성경에 나오지 않고 우리의 구원과 상관없다면, 이 사실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가 갖고 있는 가치와 동등선상에 둘 수 있을까?
3. 창조론과 다른 의미의 ‘소진화’라는 용어
‘소진화’라는 단어가 단지 ‘발전’을 나타내므로 이 단어를 사용해도 과연 정당한 것인가? 이 질문에 또 다른 질문으로 대답을 하고 싶다. 왜 더 좋은 단어를 두고 굳이 ‘소진화’라는 단어를 고집하고 있는 의도가 무엇인가? 단지 우리보다 세상적으로 더 똑똑한 것처럼 보이는 과학자들이 그 단어를 사용하기에, 무언가 그들과 타협해보려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무식하고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한다는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서인가?
여기서 칼빈이 단어의 타당성을 시험하고 채택할 때의 원칙을 따르고 싶다. 기독교 강요 제1권 16장에서 칼빈은 ‘섭리’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 섭리 교리는 창조와 밀접한 연관이 있고, 알면 알수록 정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칼빈은 특히 제16장 8절에서 섭리 교리와 스토아 철학의 운명론과 전혀 다른 점을 설명하고 있다. 칼빈은 바실리우스(Basil)가 언급한 ‘운명’이나 ‘우연’이란 이교도들이 사용하는 용어로 경건한 사람들이 마음에 그 뜻을 새겨서는 안 된다는 말을 인용한다. 그리고 운명(fortuna)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진술도 인용하고 있다.
‘운명’이라는 단어가 어떤 여신(女神) 따위를 생각하고 그런 단어를 쓴 것이 아니고 만약 하나님의 섭리를 담고 있다면 거리낌 없이 사용할 수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흔히 ‘운명’이라고 말하면 어떤 은밀한 질서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것이며, 또한 우리가 ‘우연히 일어났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 이유나 원인이 비밀에 싸여 있다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라고 해야 옳은 일에 대해서 ‘이것은 운명이다’라고 이야기하는 매우 악한 관습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한다(기독교강요 상, 원광연 역, p. 251).
‘운명’이라는 단어도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섭리가 역사한 결과물들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닌가? 분명 똑같은 결과를 가리키지만 부르는 이름값이 다를 뿐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운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악하다고 이야기한다. 왜 그런가? 그 단어의 정신에는 본질상 하나님의 섭리를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운명’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으며 하나님이 아닌 이름 모를 무엇인가에게 영광을 돌린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운명이라는 단어 대신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소진화’라는 용어가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물들과 과정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듯 가리킬 수는 있다. 하지만 발전과 생육을 이행하는 주체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autonomy)으로 보는 진화의 근본 사상은 아무리 ‘소진화’가 하나님의 창조물의 결과를 간접적으로 가리킨다고 해도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마치 운명이 이름 모를 무엇인가에게 공을 돌리듯, 진화의 본질상 그 공로를 눈먼 시계공에게 돌리기 때문이다.
이름이나 명칭은 그 물체의 정체성을 담고 있다. ‘진화’라는 그 두 개의 철자 속에는 ‘적자생존’ 또는 ‘생존경쟁’ 등 옛 수세기 동안 이교도들이 사용했었고 심지어 히틀러의 사상에 기초가 되었던 개념들이 배어 있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결코 일치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지 않는 단어들이 우리의 입에서 고백되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성경에는 분명히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지만 우리가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진화라는 단어도 그와 같이 사용될 수 있다”는 주장은 타당할까?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그들의 논리에 이용될 수 있을까?
여기서 또 칼빈의 가르침을 인용하고자 한다. ‘삼위일체가 성경에 나오지는 않지만 개념이 있으므로 기독교적 단어이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나 개념은 분명 다른 성경에 나오는 단어들과 마찰을 일으키거나 충돌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소진화’라는 용어는 ‘창조론’과는 명백히 그 개념이 일치하지 않는다.
4. 성경 기사에 대한 우리의 자세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욤’(하루)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바빙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의 저서 “Our Reasonable Faith”에서 바빙크는 창조 때 첫 3일과 후의 3일의 기간이 달랐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바빙크의 생각을 들여다보면 그의 주장이 분명 일리가 있어 보일 수 있다.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 “밤이 되어 낮이 된다”는 말이 지구가 자전해서 만드는 24시간의 그 시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넷째 날에 해와 달이 창조되어 낮과 밤을 주관하게 했다는 것은(창 1:14) 지구의 자전을 의미하는 것이고, 분명 사계절이 있도록 하는 것은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태양이 없었으므로 처음 창조의 3일이 그 후의 3일과 다르다는 것이다. 지구의 낮과 밤이 되는 시간이 분명 넷째 날과 다르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하지만 화란의 그 유명한 바빙크가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해서 그의 주장을 옹호할 수 없다. 아무리 저명하고 똑똑한 석학이라도 그의 발언이 성경과 신조에 일치해야만 비로소 신빙성이 있다.
캐나다 개혁교회 신학교의 학장 밴담(Van Dam) 교수 은퇴식에서 피셔(James Visscher) 박사가 ‘바빙크의 창조론’에 대해서 강의한 바 있다. 그 강의에서 피셔는 분명 ‘창조 기사는 문자 그대로(literal)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라는 단어를 말 그대로 하루라 해석하지 않고 또 다르게 해석한다면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의 설득력이 사라지게 된다.
피셔는 “한 신학자가 학문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그 신학자가 연구하는 방면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강의 마지막에 던진다. 바빙크의 단점은 바로 무언가를 평가할 때 잣대의 기준점을 과학에 우선을 두고 성경 말씀에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만약 그때의 하루가 지금의 하루와 다르다고 가정해보자.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실 때 정작 6일이 아닌 몇 천년, 혹은 몇 억년의 시간을 할애하셨으면서 진작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는 ‘하루’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다시 말해 “왜 굳이 거짓말을 하셔야 하는 정당한 이유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분명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를 끝내고 7일째 안식하셨다는 내용의 창조 기사를 다시 인용하고 있다는 점을 볼 때, 분명 이것은 실질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창세기 2장에는 동산에서 발원하고 있는 4개의 강줄기가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실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사실임을 밝히고 있다.
실제로 창세기의 기사는 기록된 그대로이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셨고 제 7일에 쉬셨다. 세상을 창조하고 유지하시는 하나님께 수십억 년의 진화의 과정을 거칠 만큼 능치 못할 일이 있으시겠는가. 기간을 가지고 장난치려고 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럼 성경 전체를 뜯어 고쳐야 하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진화론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마땅한가? 우리는 기독교내에서 창조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외에 ‘소진화’ 혹은 ‘유신 진화론’을 비롯해 ‘진화’라는 그 용어 자체를 옹호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는 말
개인적으로는 송인규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책을 섭렵하고 공부를 하고 싶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우리의 죄 된 본성 때문에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불완전하고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섭렵해서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라는 말이 절대 아니다.
분명 우리는 책을 읽을 때 객관적으로 읽어야 한다. 책을 읽을 때 객관적으로 그 내용을 섭렵한 뒤, 주관적인 비평이 더해져야 한다고 배웠다. 분명 객관적으로 과학 서적을 읽고 주관적인 우리의 생각으로 다가서는데, 그 전에 더 중요한 문제는 그 주관적인 관점이 과연 타락한 인간의 본질과 죄로부터 치우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진화론을 “객관적으로” 다가선 뒤에 우리가 스스로 주관적으로 그것에 지배되지 않고 비평할 수 있을까?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유신적 진화론의 주장에 설득당한 수많은 기독교인들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학부 시절에 법을 공부하면서 개인적으로 유익이 되었던 것은 법철학을 공부할 수 있었던 점이다. 그 중에서 정의론에 대해 배웠는데, 그 과목에서 우리의 판단과 견해가 종교나 도덕적인 사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의견이 있었다. ‘학문과 신앙 사이에서 학문을 할 때 신앙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고, 신앙의 영역은 학문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주장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메킨타이어(Alasdair McIntyre)는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언급에서, 우리의 생각이나 자아가 예전의 역사나 문화와 무관할 수 없음을 주장한다. 세상의 철학자조차도 우리의 자아가 역사 심지어 문화와 떼어서 볼 수 없다고 하는데, 우리 삶 속에서 알게 모르게 항상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 종교는 어떠한가? 우리는 삶을 살면서 종교의 영역으로부터 분리하여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
위트(John Witte Jr.)는 “Reformation of Rights”에서 종교개혁 시대 이후 인간의 자유와 권리의 사상 중심에는 항상 칼빈주의와 종교개혁의 사상이 절대적이라고 말한다. 칼빈 또한 그의 기독교 강요 제1권 앞부분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 말 할 때, 모든 사람들이 마음속에 하나님의 알만한 것이 있어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 또한 절대적으로 종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삶에서 우리는 신앙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문이 “신앙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라는 위험한 발상보다 사실 “어떻게 옳은 신앙에 맞추어 학문을 할 것인가?”가 더 올바른 질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유인원과 전혀 다른 오직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처음 사람인 아담을 직접 만드셨으며, 수억년이 아닌 문자적으로의 창조를 믿는다. 그리고 아담의 타락과 죄로 인한 죽음을 성경대로 믿는다. 이 때문에 구세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역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믿는다.
소진화가 되었든 대진화가 되었든 진화론은 기독교 신앙과 공존할 수가 없다. 따라서 진화론 이해와 관련해 “스스로의 견해를 형성”하고 “균형을 이루는 것”을 강조하는 송 교수님의 주장은 기독교 신앙과 공존할 수 없으며 심지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용납될 수 없다고 본다. “균형을 이룬다”라고 하면 신앙과 과학 중 어느 것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의문이 들기 마련이다.
믿음의 선배들이 남긴 기독교 서적, 특히 개혁교회 안에서의 서적들을 읽고 제대로 된 신앙체계가 확립된 사람이라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결코 ‘소진화’라는 용어를 용납할 자리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조그마한 가능성조차도 열어두지 않을 것이다.
조그만 과학적 일치가 마치 성경의 계시와 같은 진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면 심히 곤란하다고 본다. 소진화를 인정하게 된다면 마치 반 펠라기우스주의와 같이 세상학문이나 인간적인 과학과 타협하게 되며 결국에는 스스로의 모순에 빠지고 파멸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