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뱅의 기독교강요 – 그 보편함과 특별함에 대해
리종연 목사·진명교회
“하나님과의 돈독한 사귐이 글 가운데 녹아져 있어”
사람들은 기독교강요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말한다. 괴이한 일은 신학자 같
은 부류들이 독무대처럼 깔뱅에 대해 말하면서 강요를 거들먹거린다. 어떤이
는 무슨 큰 오류나 결함이라도 찾은 양 떠벌이기도 한다.
기독교강요에 대한 평가 난무해
깔뱅의 다른 글들을 원전으로 읽어보았는가? 나아가 교회개혁 당시 여러 부
류 사람의 글들을 얼마나 많이 정확하게 읽어 제대로 깨달아 정리하고 있
나? 묻고 싶다.
어떤이는 지금의 상황을 앞세우면서 경거망동하게 코흘리게 앞에서 깔뱅의
해석을 깔아뭉개기도 한다. 불경건한 자들 앞에서 말이다. 옛 교회에서 말씀
을 다룬 선진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오늘날 교회를 올바로 섬기기 어렵다.
신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어떤 글보다 기독교강요에서 오해하는 경우
가 많다. 깔뱅보다 똑똑한 사람이 너무
도 많다.
바르게 접근하는 자세 가져야
강요의 성격과 틀거리를 로마 카톨릭의 토미즘을 흉내낸 것이라고 코웃음치
는 이도 있고, 네오 플라토니즘에 엮어서 고소하는 자들도 많다. 그런가 하
면 이른바 사도신경의 확대 정도로 지나치기도 한다. 초판과 마지막 판을 버
무려서 제 생각으로 덧칠하기도 한다.
우리가 적어도 성경에서 교회가 영적으로 어떠했는지를 궤뚫어야만 강요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개인의 경건 정도는 마땅하고, 시대의 역사적 사명
을 어떻게 구현했는지 교회의 처음부터 과정, 과정에 대해 한눈으로 통찰해
야만 한다.
게다가 한낱 개교회주의라는 이교주의 심보가 아니라 세상 가운데서 어떤지
를 통체로 놓고 헤아려야만 제대로 보인다. 좁은 소견으로 조잡 떨어야, 몰
상식 가운데 잘난 체 해봐야, 제 위치나 교회의 위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읽으나마나 이다.
자신의 역사적 위치에서 통찰해야
짜임새를 보면, 하나님에서 차름하여 그분의 나라에 관한 글로 마친다. 하나
님의 자기 계시를 사람에게 교회에게 어떻게 드러내시는지를 간단하게, 핵심
을 놓치지 않고, 냉철하면서도 불타오
르게 일관한 내용을 그린다. 이 안에
교회와 세상을 놓고 성도들을 중심으로 어떻게 섭리와 경륜을 펼치시는지 당
시의 한계 가운데 피땀을 짜내는 갓댐이다.
지난날 교회에게 주신 보편한 도리를 섭렵하면서, 당시를 주름잡으면서, 앞
날의 교회를 위한 징검다리를 성실하게 제시한다. 그 흔한 교리체계를 앵무
새처럼 엮어나가지도 않으면서, 제 상황과 위치에 기울어지지 않으면서, 특
별하게 거룩한 도리를 그려나간다. 적어도 열 차례 넘게 통독을 하지 않는다
면 감히 무어라고 강요를 말할 자격이 없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지 않
고는 올바로 받지 못한다! 여러 주제들을 살펴보아도 글로 표현하는 한계
가운데서 얼마나 겸손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서술하는지 같은 때 살면서 옆에
서 그를 지켜보는 듯하게 풀어나간다. 네 권의 어디를 펴본다 해도 유기적
인 체계라는 것을 단박에 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한살매를 성경주석과
성경선포를 병행하면서, 원수들과 쟁투의 연속 가운데 강요를 다듬고 다듬었
다는 사실이다!
강요는 진리를 위한 투쟁의 산물
오늘날 삯꾼들이 널려있는 때, 학문수준과 인격수준에 구멍뚫린
가짜들이 즐
비한 때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놀라운 길잡이인지 모른다! 이른바 성령론에
넣고 생각할 만한 주제를 보아도 바른 개혁신앙이란 성령님의 사역을 어떻
게 힘입어야 하는지 참된 자유 가운데 거룩한 거을 너무도 뚜렷하게 가르친
다. 보편함과 특별함을 한 손에 잡고 시대의 사선을 넘어서 승리한 고백을
그린다.
강요의 첫째 책만 보아도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뜸으로 내세우면서 성경을
방편 삼으며 그 계시 내용은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이라고 멋지게 선언한다.
두째 책에서는 계시가 담는 뜻도 그러하지만 사람에게 나타내서 하나님을 증
거하시기에 사람의 주제파악을 위해 거덜내면서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이미
제시한 삼위일체를 전제로 그리스도의 신분과 중보직을 통해 그 실현을 가르
친다. 여기에서도 성경을 어떻게 다루는지 주목해야 한다.
세째 책에서는 성령님의 사역과 선한 일의 영원하신 뜻을 밝힌다. 이른바 틀
에 박힌 성화론이 아니다. 여기서도 은혜의 방도로서 성경의 쓰임새를 다룬
다. 십자가의 도리를 드러낸 것을 깨달아야 한다.
네째 책에서는 교회와 신국을 다룬다. 여기서 가르치는 교회의 본질
과 표지
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기독교의 보편함과 특별함 망라해
하나님을 알도록, 하나님 되심을 계심과 하심으로 알리시되, 하나님이며 사
람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인 작정의 실현으로써 교회의 완성을 내다
보면서 땅 위에서 신국의 백성인 성도들로 하여금 어떻게 드러내시는지 정리
한 글이다.
자신을 도무지 나타내지 않고 성경에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려고 얼
마나 전력하는지 모른다! 이 사실을 교회와 그 지체를 쓰셔서 땅에서 어떻
게 드러내시는지 생생한 실제로써 알려준다.
어떤 곳에서는 옛날과 그 당시 일들을 보기로 내세움으로 얼마나 살아있는
글인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인문사회의 여러 글들을 직접 간접으로 제시한
다. 하나님의 영광과 오직 성경, 그리스도와 교회의 유일성, 나아가 오직 성
령으로 거룩한 달음질인 시민권과 십자가를 도처에서 달군다. 신국의 도래
를 바라며…
신국 백성의 도리 정확하게 보여줘
예사로 현대 교의신학 체계를 앞세워 어느 부분을 도마에 올리기도 한다. 과
연 그럴 정도일까? 논리로 보아도 그렇고 성경에 비추어도 이렇게
균형있게
올곧게 적은 글이 얼마나 있는가? 지난날과 당대, 앞날을 내다보면서 교회
를 놓고 그 실제와 궁극의 영광을 이렇게 시원하게 풀어낸 글을 또 누가 썼
는가?
글 쓰는 목적과 방식, 마음이 글 가운데 그대로 녹아있다. 하나님에서 하나
님과 사귐을 이렇게도 통렬하고 예리하게, 헛점을 보이지 않고 철두철미 기
록한 글을 또 누가 적었는가? 깔뱅의 다른 여러 글들에서 거듭 확인해 보
자.
성경에서 비롯하여 삼위일체와 교회와 세상 가운데 신국을 질서있고 뜨겁게
그려나간다. 여기서 예정 가운데 부름받은 하나님 백성의 상태와 자세를 역
설한다. 성경이 무엇인지, 신앙고백이 무엇인지 밝힌다.
역사상 헛점 없이 기록된 강요(綱要)
기독교강요 네 권을 훑어보았다. 깔뱅의 숨결을 느끼는가? 그와 가까이 사귐
을 아는가? 어제의 교회와 내일의 교회 가운데 있는 교회로서 강요를 성령님
이 어떻게 쓰시는지 확신하는가? 강요를 올바로 받는다면 하나님은 읽는이에
게 무엇을 바라실까? 저마다 깊이 생각해야만 한다.
그저 신학작품의 하나로서 본다던가, 체면치레로 여기려고 들춘다던가, 시대
의 보편한 역사적 사명
을 잊고서 본다던가, 단지 지식욕으로 채우려 본다면
질못된 다가섬이다. 보편하면서도 특별한 성격을 전제하고 다가서야 한다.
지극히 적은 사람이 강요를 올바로 읽는다.
온전히 겸허하고 겸손하게 다가서야
신관에서 사관에 이르기까지 우리 자신은 어떤지 이 책으로 떠보자! 한 글짜
라도 가볍게 보지 말고 그가 얼마나 애통하는지 얼마나 사모하는지, 얼마나
열심있는지, 하나님을 따른 걱정에 사무치면서 읽자! 고린도후서에서 바울
의 고백과 시편에서 다윗의 고백과 같은 자리에서 확인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