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수 교수/ 합신신약신학
어린 시절에 부모님이 집을 한 채 지으셨는데 어쩐 일인지 담을 세우고도
대문을 달지 아니하셨다. 그 통에 휴일에는 말할 것도 없고 평일에도 학교에
다녀오면 거의 예외 없이 집에는 손님들이 와 있었다. 이웃사람들로부터 시작
해서 지나가던 장사꾼들까지 대문이 없으니 거칠 것이 없이 찾아들었다. 나
는 집안에 사람들이 마구 드나드는 것이 싫어서 부모님께 대문을 달자고 몇
번이나 졸라댔다. 하지만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셨던 어른
들께서는 그때마다 대문이 없으니 누구나 들어와 쉬어갈 수 있어 좋지 않으냐
고 대답하셨다. 어른들의 생각은 깨닫지 못하고 내 생각만 했던 것이다. 나
는 지금 또 다른 식으로 이런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하나님의 소원은 깨닫
지 못하고 내 소원을 관철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친다. 아니 많은 경우에 하나
님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단지 내 소원이 마치 하나님의 소원
인 것처럼
살고 있다.
하나님의 소원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는 것이
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에 관한 소원을 가지시는 까닭은 그분이 구주이시
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바로 앞 절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구주 하나님”
(딤전 2:3)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은 구주이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
을 소원하신다. 소원의 성격은 소원하는 사람의 신분에 달려있는 것 같다. 소
원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신분을 가지고 있는지 추측할 수 있고, 신분을 보
면 그 사람이 어떤 소원을 가지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어린 아이에게서
는 역시 유치한 소원이 나온다. 하지만 물질도 시간도 재능도 그리고 모든 것
을 나라를 위해 헌신적으로 바친 진정한 정치가는 나라가 안녕하고 번영하기
를 바라는 광대한 소원을 가진다. 하나님의 소원은 하나님의 신분에 적합하
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소원하신 것은 구주이시기 때문이
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신다.
구원을 받는 것과 진리를 아는 데 이르는 것은 하나님의 두 가지 소원이라기
보다는 한
가지 소원을 다르게 설명하는 동의어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 좋겠다. 다시 말하자면 구원을 받는 것은 진리를 아는 데 이르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에 관한 중요한 이해이다. 구원은 죄악으로부터 나오는 것일 뿐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자가 구원의 소극적인 의미를 가리
킨다면, 후자는 구원의 적극적인 의미를 가리킨다. 죄악의 용서도 큰 일이지
만 진리의 인식은 더욱 큰 일이다. 죄악을 용서받는 것이 사탄의 암울하고 비
참한 세계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면, 진리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광명하고 영광
스런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과 진리에 관한 하나님의 소원은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다. 이것은
이런 소원을 가지신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 알려준다. 하나님은 모
든 사람을 향하여 소원을 가지실 만큼 위대하신 분이다. 사실상 우리는 인격
과 성품의 크기에 따라서 소원을 가진다. 마음이 가정에 매여있는 사람은 가
정을 위한 소원을 가지고, 마음이 나라에 매여있는 사람은 나라를 위한 소원
을 가진다. 앞의 사람은 가정 크기의 소원에서 벗어나기 힘들고, 뒤의 사람
은
나라 크기의 소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전자는 가정 크기의 사람이고, 후
자는 나라 크기의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향하여 소원을 가지시
는 것은 모든 사람을 포괄하고도 남을 정도로 위대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
나님은 우주보다 크시고 영원보다 크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소원은 시간과 공
간과 인종이라는 모든 범위를 포괄할 정도로 큰 소원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시기를 소원하신
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의 소원에 무지한 채 우리의 소원에 집착하
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하나님께 조른다. 우리의 사소한 소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위대
한 소원을 무시하고 배격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대단한 소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