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라이어막허(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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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원 교수의 현대신학해설>

슐라이어막허(3)

슐라이어막허는 정통 신학을 도그마틱한 ‘위로부터의 신학’이
라 혹평하고 계몽주의적 자연신학을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라 폄론
하면서 절대의존의 감정(Gef hl)을 핵심으로 하는 자신의 신학을 하
나님과 인간을 잇는 진정한 신학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신학
체계에는 우리가 믿는 계시관이 들어 갈 자리가 없음을 우리는 쉽
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신적 계시란 어떤 개념이나 문장으로 주어
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모든 개념을 초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와 동일시하는 것은 일종의
권위주의적 발상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계시는 객관적으로 주
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를 위해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계시
는 어떤 외부적인 것이 아니며 또한 우리가 내적으로 받아지지 않
는 것은 결코 나에게 계시가 될 수 없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
경을 어떤 객관적이고 외부적인 계시로 볼 수 없다는 것이
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는 성경을 한 종교(기독교)의 감정을
말로 표현한 것으로 본는 것이다. (이 말은 성경에는 오류가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경험 혹은 감정이지 문자
로 기록된 성경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이 내적, 주관적
감정의 표현이라는 차원에서 슐라이어막허는 성경을 기독교 경전으
로 본다. 심지어 성경에서 나오지 않는 교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전통 고백서를 중요하게 받아들이
기도 한다. (사실 이렇게 고백서에 권위를 두는 것은 성경을 단지
인간의 고백서 정도로 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가 의미하
는 진정한 계시란 자율적으로 해석되는 종교적 ‘감정'(Gef hl)이라는
것이다. 단지 성경이나 고백서는 그 감정을 해석하는데 사용되는 상
징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의 절대 의존적 감정의
차원에 두는 것은 사실은 ‘아래로부터의 신학’에 불과한 것이다. 슐
라이어막허 자신이 비판한 자연주의 신학과 그의 신학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왜냐면 그가 말하는 감정이란 
영원한 것 혹은 절대적
인 것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이
어디서 오느냐는 것이다. 결국 자신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유한하
고 일시적인 것이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간이
직접적으로 의식한다고 그는 주장하지만, 인간이 그 어떠한 것을 의
식한다 해도 그것이 유한 것이 절대적인 것에 그리고 일시적인 것
이 영원한 것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
한 의식은 결국 자신의 자율적 판단내지는 순간적인 신념일 뿐이다.
결국 그가 말하는 감정은 일종의 인간에게서 나오는 추론(postulate)
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면 슐라이어막허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보았는가?
그는 현대 신학의 아버지답게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적 의미와 신앙
적 의미로 나누어 본다. 먼저 역사적 예수는 남 다른 종교적 ‘감
정'(Gef hl)을 가졌었다고 한다. 또한 비록 십자가상의 죽음, 부활,
승천, 재림은 성경의 교리에 중요하기는 해도 그리스도의 인격을 아
는데는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그런 것을 알지 못해도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구속이란 
그러한 역사적, 외형적 사건을 통
하여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고 주장한다. 반면 그리스도는 단지 모
델일뿐 아니라 사람이 필수적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모
습의 원형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안에 내재한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인간과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그리스도는 죄가 없다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는데는 (감정에서는) 실질적으로 죄가 없는 것과 같
다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적 결론으로 그리스도가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종교적 감정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죄
가 없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말하기를 “구속자는 인간 본성
이라는 정체 때문에 모든 인간들과 같으나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
님-의식’의 일정한 힘 때문에 모든 인간들과 구분된다. 그것은 그
안에 계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존재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전형
적인 현대신학자들의 기독관이다)
이러한 슐라이어막허의 신학의 두가지 큰 문제점을 지적한다
면 지난 호에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타나는 감정(Gef hl)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범신론적 개념인 것이
다. 힌두교나 불교에서 추구하는 신비적 체험 개념이 슐라이어막허
의 감정 개념에도 발견된다는 것이다. 신 혹은 하나님이란 인간이
체험하는 실재 (reality)와 같은 것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그의 강한 주관주의이다. 어떤 객관적, 역사적 사건은 자신
에게 체험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구원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나오는 것이 된다. 자
신과 관계되지 않으면 하나님도 구원도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슐라이어막허를 비롯해서 많은 현대 신학자들은 이러한 자율성 때
문에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적 사건들을 발생되지 않은 것으로 말
하지 않고 단지 우리의 신앙에 불필요한 것 혹은 관계없는 것이라
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자신과 관계되어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칸트의 현상적/본체적 세계의 이원론에 기인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본체적 세계는 우리가 알 수도 없는 것이지만 우리에게 관계되
는 한도에서 의미를 부여 하는 것이다. 이렇듯이 슐라이어막허의 신
학은 그 자신이 기존 
정통 신학을 믿지 못함을 인해 감정(Gef hl)과
같은 여러 허구적 개념들을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은 ‘위’와 ‘아래’를 연결하기는커녕 아래에서 인간
자율성을 중심으로 빙빙도는 소용돌이에 불과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