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석의 북카페| 다시 쉐퍼를 읽을 때다

0
7

다시 쉐퍼를 읽을 때다

[콜린 듀리에즈|프랜시스 쉐퍼|복있는사람|2009년]

< 조주석 목사, 합신출판부 실장>

“사람에 대한 인격적 배려와 사랑의 필요성 일깨워”

쉐퍼가 다시 대화를 청했던 서신에 칼 바르트는 무척 불쾌한 감정을 드러낸
다. “당신이 내 평생의 과업을 ‘통째로’ 반박해도 좋습니다……당신이 미
국, 네덜란드, 핀란드 그리고 어느 곳에서든 당신의 ‘형사’ 업무를 계속하
고 나를 가장 위험한 이단으로 비난해도 좋습니다. (중략) 나로서는, 형사
의 조사관의 속성을 가진 사람 또는 이교도를 개종시키려는 선교사의 자세
로 나에게 와서 말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마디
로 거절합니다.”

쉐퍼의 대화 제의를 거절한 바르트

이 시절 쉐퍼는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전하고 수호하는 열정적 투사였다. 이
러한 그의 눈에는 바르트의 기독교적 진술이 분
명코 정통 기독교의 것이 아
니었다. 19세 후반부터 몰아닥친 위협적인 자유주의 신학에 나름대로 대항
한 바르트였을지라도 쉐퍼는 그를 곱게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쉐퍼는 바르트의 편지를 받고서 자신의 투사적 태도에 영적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신앙생활 속에 바른 교리에 대
한 열정은 있으나 그 열정 속에 사람에 대한 인격적 배려나 사랑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 40(1951년)이었다. 
기독교의 충만한 모습은 진리와 사랑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
리인 동시에 사랑이시다. 그분의 형상인 인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와 사
랑을 드러내야 한다. 쉐퍼는 이 영적 실재가 자신에게 충만히 없다는 사실
을 상당한 시간에 걸쳐 성찰하고 자신의 결핍을 공개적으로 시인한다. 또한 
순수한 교리에 몰두하는 많은 신자들에게서 그런 충만함이 드러나지 않음도 
간파한다. 이런 삶의 배경을 안고 나온 책이 바로 <진정한 영성>(1971년)이
다. 이를 계기로 그는 일방적인 진리 투사에서 벗어나 진리와 사랑을 함께 
드러내는 복음전도자로 전환했고 향후 라브리 사역도 그런 방향으로 전개된
다.

내가 책으로는 <이성으로부터의 도피>를 통해 쉐퍼를 처음 대했고 그때는 30
대 중반으로 80년대였다. 이 무렵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의식 있는 젊은이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지적 호기심
뿐 아니라 기독교 세계관에 따른 문화 변혁을 꿈꾸며 기독교 세계관 서적들
을 탐독했다. 쉐퍼와 카이퍼의 책들이 그런 꿈을 꾸게 했다. 이로 인해 한
국 기독교 안에 새로운 흐름이 하나 더 보태진 건 사실이나 문화와 사회를 
변혁하겠다던 큰 꿈이 뚜렷한 현실로 드러난 건 아니다. 도리어 지금은 기독
교 세계관 운동이 이전만큼 우리 젊은이들에게 흡인력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
다.
여기서 왜 그랬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그것은 우리와 쉐퍼 사이에 삶
의 처지가 서로 달랐던 게 큰 이유가 아닐까. 그곳은 근대문명이 활짝 만개
했던 문화권이었고 우리는 이제 막 근대문명권으로 접어들던 시기였다. 그곳
은 기독교 신앙이 역사와 문화 속에 깊숙이 뿌리 내려진 곳이었으나 우리는 
아직 기독교 역사가 채 1세기도 못된 곳이었다. 그곳은 계몽주의 시대 이후
로 끊임없이 그들의 문화 속에서 하나님을 몰아내
고 이성을 최종의 권위로 
내세우고자 했던 반면에 우리는 그와 전혀 상관없는 이방나라였다. 따라서 
쉐퍼의 외침이 우리에게는 아직 절실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삶의 양상이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경제적으로는 빈부
의 격차가 점점 심해지고 있고, 지성적으로는 대학 교육과 서구의 수많은 서
적들의 출판을 통해 합리주의와 자연주의와 상대주의가 널리 확산된 상태
다. 문화적으로는 반기독교적 성향을 띤 창작 활동들과 대중문화가 점점 늘
어나는 추세요 전통문화를 복원하려는 바람도 거세지고 있다. 종교적으로는 
불교와 천주교와 개신교와 원불교 등 여러 종교가 각축을 벌이면서도 겉으로
는 관용과 평화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은 지난 서양의 기독교
가 걸어왔던 삶의 처지를 더 닮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이제 쉐퍼를 다
시 읽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원주의 시대에 걸맞는 의식 필요해

이참에 나는 그의 전집을 구입했다. 80년대에는 그 진정한 가치도 다 모른 
채 그의 책 몇 권을 읽은 것으로 끝냈을 뿐이다. 50대 끝자락에 들어선 아버
지로서 영적 혼란기에 접어든 나의 
두 아들에게 말해줄 나의 기독교 신앙을 
쉐퍼를 통해 다시 정리해 볼 요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