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쳐다보는 진돗개
< 정요석 목사 · 세움교회 >
“신학이 지시하는 곳을 바라볼 때 하나님 은혜도 알게 돼”
나는 37살에 혼인을 했다. 요사이 늦은 미혼자들을 독거노인이라고 한단다. 그 독거노인과 같이 사는 부모님은 무뚝뚝한 아들 앞에서 별 재미를 못 느끼셨다. 집안이 참 적막했었다.
그런 우리 집에 누군가 준 진돗개 강아지 한 마리는 집안 분위기를 크게 바꾸었다. 마치 손자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개로 인하여 웃음이 나오고, 대화거리도 생겼다.
진돗개는 참 영리하였다. 똥오줌도 빨리 가렸고, 쥐들이 다니는 길목도 알아채 기다리고 있다가 묵직한 앞발로 KO 펀치도 날릴 줄 알았다.
그런 어느 날 나는 혼자서 집의 소파에 편하게 앉아 동물의 세계를 보고 있었다. 사자가 초식동물을 사냥하는 장면이었다. 흥미 있게 보다가 문득 개나 고양이는 호랑이나 사자 같은 맹수를 보면 오줌을 싸고 꼬리를 내린다는 말이 생각이 났다.
확인하고 싶은 생각에 나는 진돗개에게 사자를 보라고 텔레비전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런데 진돗개는 놀랍게도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가리키는 내 손을 쳐다보았다. 나는 무척이나 놀랐다. 몇 번을 텔레비전을 보라고 손으로 가리켰는데도 계속해서 내 손을 쳐다볼 뿐이었다.
나는 그래도 사자에 대한 진돗개의 반응을 보고 싶어 서둘러 일어나 텔레비전으로 가서 화면의 사자를 손으로 탁탁 치며 사자를 보라고 소리 질렀다. 그러자 글쎄, 진돗개는 잠시 텔레비전 화면을 보더니 바로 눈을 돌려 다른 곳을 쳐다볼 뿐이었다.
나는 그 때 인식에 관하여 큰 깨달음을 얻었고, 비로소 조직신학 서론을 신학교에서 왜 배우는지 그리고 내적인식능력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는 것과 텔레비전을 공감하며 볼 수 있다는 것이 사람에게만 허락된 놀라운 인식 능력이라는 것을 감사와 기쁨으로 안 것이다.
나는 늦게 결혼했지만 독거노인으로 있던 시절이 하도 외로워 강한 의지로 2년 간격으로 아이들을 다섯 두었다. 그 아이들 모두 천재나 수재와는 거리가 먼 아이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 내가 손으로 어디를 가리키면 그 방향을 보고, 텔레비전은 자꾸 보려고 해서 말려야 할 정도이다. 물론 이 아이들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방향성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엄마를 찾으며 우는 6개월 즈음에는 엄마가 저기 있다고 손으로 가리키면 그들도 손을 쳐다볼 뿐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나면 특별히 가르치지도 않고 훈련을 시키지 않아도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손이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본다.
아이들을 다섯 키우며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더 잘 기다리게 된다. 아이들의 느림, 고집, 미련, 성질부림이 그들의 악한 의도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아직 때가 되지 않아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한계인 경우들이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크게 잔소리하지 않아도, 혼내지 않아도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여러일들을 잘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첫째와 둘째는 동생들에 비하여 억울하게 아빠와 엄마로부터 혼난 경우들이 많을 것이다. 지혜로운 부모란 혼내야 될 상황인지, 기다려야 하는 상황인지를 잘 안다는 것인 듯 하다.
이제 내년 초면 교회를 개척한지 만 13년이 된다. 목회를 할수록 깨닫고 배우는 것은 기다림이다. 방향성이 없는 어떤 성도에게 내가 아무리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라고 다그쳐도 그는 손을 볼 뿐이다.
말씀과 성례는 분명 은혜의 수단이지만 이것들은 교회를 통한 객관적인 통로이지, 우리에게 일상을 통한 역경과 성취와 좌절과 누군가로부터 받은 격려와 때로 겪는 배신과 모함의 경험이 없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목을 꼿꼿이 세울 뿐이고, 보고자 하는 것들만을 보고자 할 뿐이고, 그 말씀과 성례에서도 큰 은혜를 못받을 것이다. 우리는 뼛속 깊이 고집과 미련과 혈기와 자기 중심으로 차 있지 않는가?
오늘도 나는 설교를 준비한다. 갈수록 힘든 것이 설교이다. 13년째 같은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더욱 힘들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13년 동안에 나로 더 많은 좌절과 회한과 성취와 격려를 맛보게 하시어 나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보게 하시고, 그 만큼 성경을 또 더 보게 하신다.
나의 설교를 듣는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그들을 인생 지팡이와 채찍으로 기르시어 별 볼일 없는 나의 설교에서도 기필코 은혜를 받고야 말겠다는 자세를 갖게 하신다. 그 자세가 반복되는 나의 설교에서도 은혜를 찾아내고야 만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기다리신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위하여 자꾸 기도하려고 하는데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 그 간구의 기다림을 인하여 나는 겸손으로 설교를 준비하게 되고, 성도들은 감사함으로 설교를 듣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