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규칼럼> 삼위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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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생각들

김영규 목사_뉴욕학술원, 남포교회 협동목사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가 존재하니 내가 존재
하는 여호와로 소개하라고 하셨을 때, 그 표현을 꼭 설명이나 술어가 필요
로 하지 않은 ‘스스로 있는 자’로서 헬라의 고전적인 개념인 실체의 개념
으로 곧바로 해석할 이유는 없다. 그 개념으로 최소한 성격만을 이해해야 한
다. 

설명조차 불필요한 
‘하나님’

하나님도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 역사하거나 운동하는 존재로서 밖에서 안
을 볼 수 없는 닫혀진 존재나 혹은 자신 안에 모든 것을 보실 수 있으나 그 
자체를 볼 수 없는 존재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물리학적 의미에서 절대 무에 가까운 절대 빈공간 자체가 모든 운동과 에너
지의 발원지로 이해되거나 우주 안에 인간을 독특한 자리를 주고자 하는 인
간론적 우주론과 대조되는 최근의 우주론으로서 빅뱅을 다시 시작하는 반복
회기 우주론처럼 우주 자체에 자아성을 주어 인
간의 자아성이 거기로부터 나
오는 개념처럼 이해할 수 없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런 이해들을 벗어나고
자 교회 안에 소개된 하나님에 대한 독특한 지식임을 기억해야 한다. 
어거스틴에 와서 삼위일체 교리가 그 완성을 보았을 때 그가 공헌한 내용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성경의 주석으로 이전까지의 신적 개념들 수정
하는 내용들이 있다는 점에 있다. 역시 뉴턴이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전에 
1277년이래 후기 중세 안에서 근대 물리학적 개념들이 완성된 것도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벗어나 어거스틴의 성경적 사고로 돌아가는데서 발생
하였던 점과 맥을 같이한다. 
루터 역시 처음부터 아리스토텔레스 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중세신학을 
비판하였을 때 그 비판적 시각의 중심 내용이 그의 『노예의지론』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만이 필연적으로 존재하고 다른 모든 것들
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다면 존재할 수 없다는 말에 있다. 
하나님의 행위는 그가 원하신다면 필연적이지만, 일 자체는 필연적이지 않다
고 함으로 중세에 있어서 모든 것들이 결과의 필연성으로 일어나고 결과로
서 일어나는 것
의 필연성으로 일어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영향을 받은 신
학 사상을 포기하게 했다. 즉 하나님의 의지를 하나님의 한 실체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이해하였던 반면 하나님의 의논이나 작정 및 예
정은 그 하나님의 자유의지아래 역사로서 이해하는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강조한 자유의지란 용어는 인간에게 사용될 수 없고 오
직 하나님에게만 사용될 수 있으며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해도 그 원 
자유의지의 극히 조그만 불꽃(modiculam scintillullam vix)에 불과하다고 
이해하였다. 그렇게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본체, 즉 하나님의 속성들과 
세 위격의 하나님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해서 소개한 것이 작정이나 예정
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 루터의 공헌이 있다. 
그와 같은 배경에서 소개된 작정이나 예정은 당연히 운명과 아주 거리가 멀
다. 그런 의논이나 작정 및 그것의 집행의 역사 없이도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충분하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인간의 공로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와 적용도 하나님의 역사로서 족하였던 것이다. 
오직 성자의 영원한 발생과 성령
의 영원한 발출에 대해서만 겨우 본성의 필
연성이란 개념이 사용될 수 있는 여지가 있을 뿐, 하나님의 모든 역사들은 
하나님의 자유성에 그 근원을 삼는다. 따라서 그 작정이나 예정이란 개념도 
하나님의 본체나 속성들과 구별된 하나님의 의지의 자유성에 대한 강조로부
터 나온 개념이다. 
이런 순수한 루터를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좋아하였다. 예정론에 관한 1580년
대의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그런 순수한 루터로부터 타락한 루터주의와 싸
울 때도 개혁주의자들은 『노예의지론』의 루터를 내세웠던 것은 의미가 있
다. 이미 지혜를 예정의 기초라고 한다든지 지혜가 예정하였다는 표현을 부
정하여 종교개혁자 쯔빙글리는 하나님의 속성들과 의지의 사역(voluntatis 
opus)으로서의 선택과 예정을 완전히 구별하였다. 
동시에 선악을 전혀 고려함이 없는 자유로운 예정론에 관한 쯔빙글리의 사상
과 신구약 실체의 통일성에 대한 입장을 계승하는 의미에서 칼빈은 1539년 
기독교 강요에서 그런 루터의 순수한 복음의 핵심을 구원론을 논한 이후 부
록(appendix)으로 다루었다. 여기에서 칼빈은 신구약 통일성과 그 신구약 통
일성을 이해하는 
가장 원리적 복음 내용으로서 하나님의 자유성이 강조된 예
정론을 첨가하였다. 마침내 순수한 루터의 가장 핵심적인 공헌들이 칼빈에 
의해서 자신의 말로 표현되기에 이르렀다. 
칼빈의 독특한 공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격들 사이에 공유할 수 없는 
고유성에 대한 강조와 동시에 하나님의 속성들 사이를 나눌 수 없다는 사실
을 강조한 점,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계신 그대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
다는 의미에서 헬라의 존재론적인 사고와 성경 증거 사이에 거리를 둔 점에 
있다(출애굽기 3장 14절에 대한 칼빈주석을 보라). 

인간의 사상 초월하신 
‘하나님’

따라서 정통적인 삼위일체론을 존재론적 삼위일체라고 표현하는 것은 교회 
교리에 대해서 잘못 해석한 것이다. 그런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에 중세 시대
에 이미 정죄된 이단사상인 경륜적 삼위일체론을 결합하는 것은 더구나 위험
한 생각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