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주장에 도취된 자들의 과오
최종규 목사 /대구 경성교회]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
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2:5).
종교 개혁자 칼빈은 자기가 개혁자 되기까지에 있어서, 고집이라는 것 때
문에 얼마나 어려웠던지를 고백한다. “… 이것이 너무나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처음에는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완
강하게 또 열정적으로 이에 항거했습니다. 사람이란 자기가 지금까지 해
오던 일을 고집하려는 버릇이 자연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진솔하게 기록
하고 있다. 모든 성도가 교회나 공회 앞에 개인적인 경험이나 자칭 명철한
이성적 판단의 아집 때문에 교회 발전의 저해의 원인이 되지는 않는지 참
으로 주의하고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에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
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
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
하며”(딛1:7). 또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잠14:16)라는 말씀처럼 지나친 인간의 고집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스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결국 하나
님의 심판대 앞에 고집도 아집도 다 내려놓고 무릎을 꿇고 회개해야 되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하고 큰 패배를 맛본 것도, 체면과 고집에 기인
되었음을 역사를 통해 우리는 알고 있다. 그 해 겨울이 ‘예년보다 몹시
추우리라’는 전문가들의 충고를 나폴레옹은 사전에 들었던 것이다. 철새
가 다른 때보다 빨리 날아갔고, 여러 가지의 경험과 과학적인 예를 들어,
전문가들은 러시아 원정을 연기할 것을 나폴레옹에게 충심으로 충고하였으
나 나폴레옹은 웃어 넘기고 말았으며, 심지어는 “힘없는 인간의 충고가
나에게 무슨 필요가 있는 것인가? 나는 한다면 할 수 있다”고 하는 엉뚱
한 교만과 고집을 내세워, 결국은 수많은 인명을 얼음 속에 쓰러지게 만들
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불행의 역사는 과거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오
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도 팽배
해 있으니 참으로 가슴이 조이고, 불행한 일
이 아닐 수 없다.
오늘도 나폴레옹의 고집과 같은 국가 공무원들의 횡포는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국록을 먹고 자칭 백성들의 공복이라는 자들이 ‘어떻게 하면 백성
의 어려운 현장의 문제를 도와줄까?’라는 의식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요즈음 ‘전국 의료 대란’에서도 한눈에 볼 수 있다. 의사들의 불
만을 공무원의 시각에서 대응하는 것 그 자체가 문제이다. 처음부터 진솔
하게 그들의 입장을 말할 때에 진지하게 들었다면 오늘의 대란은 없었을
것이다. 전국 의과대학 교수들이 사직을 하는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현장
임을 명철하게 판단해야 한다. 또한 의사들 역시 다 잘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의사의 기본 정신은 희생을 대전제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국가가 얼마나 당신들을 어렵게 하고 약사들이 얼마나 당신들을 악용할지
라도 십자가를 지는 큰 이해와 수용이 앞선 의사라야지 적어도 고귀한 인
간의 육체라도 치료할 자격자라고 생각한다.
지금이야말로 서로 쓸데없는 고집을 버려야 할 때다. 한 일화를 적어보면,
그 누구에게도 양보를 모르는 매우 고
집쟁이 부자(父子)가 살고 있었다. 어
느 날 고집쟁이 아버지가 저녁 식사에 손님을 초대하고 아들에게 고기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아들은 고기를 사 가지고 돌아오다가 외길인
마을 입구에서 한 사람과 마주친다. 두 사람은 서로 길을 양보해 주지 않
고, 팽팽히 맞서서 온갖 시늉을 다하면서 서로가 먼저 가야한다고 주장한
다.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밖으로 나갔던 아버지가 이 광경을 보고 아들에
게 말했다. “너는 어서 이 고기를 가지고 집으로 가서 구워라. 이 놈은 내
가 맡을 테니까” 하면서 대신 길을 가로막고 섰다고 한다.
노자의 말에도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몸이 유연하지만 죽으면 뻣뻣하게
굳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 세상 만물이나 초목들도 생명이 있는 동안에
는 유연하지만 죽으면 말라서 딱딱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유연성
없이 딱딱한 것은 죽은 것이고 유연한 것은 살아 있는 것이다. 군대 또한
마찬가지다. 강하기만 해서는 전쟁에 이길 수 없다. 나무도 딱딱하면 잘려
서 재목이 디어 버린다. 한참 자라는 아이들을 보라. 세차게 잡으면 터질
것만 같고 뼈가 없는 것처럼 유약하지만 웬만큼 높
은 데서 떨어져도 아주
큰 상처가 생기지 않는 것은 유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의 생활
에서 유연성이란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생활 주변에 이런 실례들은 얼마
든지 있다. 자동차 엔진 오일의 역할은 참으로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고급
승용차일지라도 차량에 적합한 오일량을 항상 유지하는 것은 필수요건이
다. 만약 오일이 부족한 상태에서 차를 계속 운행한다면 머지 않는 날에
엔진이 힘이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엔진의 조속한 마모를 초래하기 때문
이다. 오일의 역할이 대소롭게 보이지만 이때에 오일의 유연성은 엔진의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강한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니라 유연
성이 강자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다투거나 분쟁하는 곳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갔다가 개인적 판단
으로 해결하려고 하다보면 전혀 생각지 못하는 어려움에 빠지는 경우가 없
지 않다. 그것은 앞에 두 부자의 비유처럼, 두 고집이 시소를 타고 있는데
또 하나의 고집이 교묘하게 가로막고 서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의 일상생
활 중에 이러한 경우가 다반사다. 그런데 왜 인생들은 잘 한다고 하면서
이처럼 기형적인 결과를 초래할까?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자신의 고정관념
에 객관성을 상실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상대를 수용하거나 이해하는 데
아주 인색한 빈틈없는 자신의 주장이 수많은 심령들을 울렸고, 울리고, 죄
없는 자들을 죄수로 만들고, 자신을 영웅시하며 우월감에 빠진 정신 이상
자(?)들이 우리 사회에 교회(노회, 총회)나 기업체나 국가기관 도처에 앞장
서서 활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누가복음에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
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
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눅16:8)는 말씀처럼 세속의 주인이 불의한 청지
기의 용의주도한 처세술에 칭찬한 것을 보면 이것이 세상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사회, 발전된 문화배경 뒤에는 직업의 귀천에 관계없이
개개인의 소질과 인격과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인정하며그들을 앞장세울
때, 이들은 목숨을 걸고 희생을 각오하며 온 정성을 다 기우려 문화와 문
명의 발전에 기여한 것을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
양육강식의
생존경쟁 그 자체만을 할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정하며 피차의
장점을 잘 살려 상호 보완적인 대안이 속히 뿌리를 내려 튼튼한 사회의 기
조가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