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교리, 정치, 생활의 일치가 있는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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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교리, 정치, 생활의 일치가 있는 교류

 

 

   합신과 대신 교단이 같이 주최한 도르트 총회 400주년 기념 연합 세미나가 7월 10일에 신반포중앙교회에서 열렸다. 개혁주의 신앙 일치 운동의 일환으로 열린 이 세미나는 합신과 대신의 교류추진위원회가 첫 번째로 한 교류 행사이다. 250여 명의 참석이란 많은 숫자가 말해 주듯 양 교단의 교류에 많은 관심과 지지가 있었다.

   대신은 올해 『대신개혁정론』을 창간하였다. 창간호의 첫 번째 글은 대신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크게 존경을 받았던 조석만 교수의 ‘대신교단의 역사와 정체성’이다. 조 교수는 이곳에서 “개교회의 연합체라고 하는 하나의 교단이 형성되려면 교리와 정치와 생활의 일치가 이루어져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즉 교단 형성의 3요소를 교리와 정치와 생활의 일치라고 언급한 것이다. 대신총회신학연구원의 이종전 원장도 『대신개혁정론』의 두 번째 글에서 교단 형성의 신학적 원리로 신학·정치·목회의 일치에 대하여 말한다. 이것들은 바른 신학·교회·생활을 이념으로 하는 합신과 대동소이하다.

   이런 면에서 합신과 대신이 첫 번째 교류 행사로 도르트 총회 400주년 기념 연합 세미나를 연 것은 바람직하다. 1618년 11월에 있은 도르트 총회는 유럽 각지의 개혁 교회들도 참여하여 6개월여 동안 참된 교리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논의했다. 네덜란드 교회는 신학의 일치를 통하여 국내 교회들의 분열을 막았고, 유럽 개혁 교회들은 신학의 일치를 통하여 하나가 되었다. 합신과 대신도 진정한 교류와 일치를 원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신학의 일치가 있어야 한다.

   지금 합신의 신학연구위원회는 제102회 총회의 결정에 따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 번역을 새롭게 하고 있다. 대신의 신학위원회도 2015년 가을 총회의 결정에 따라 번역을 새롭게 하고 있다. 교리의 번역은 단순히 영어와 한글을 잘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신학이 잘 갖추어졌느냐에 달려 있다. 양 교단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번역을 서로 비교하고 일치하는 작업을 한다면 바른 신학의 일치에 더욱 이를 것이고, 서로에 대한 신뢰도 크게 상승할 것이다.

   대신의 “정치”는 합신의 “바른 교회”에 대응된다. 교회 정치는 바른 교회의 필수 요인이다. 조 교수는 “장로교회는 성경교리에 의한 제도적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목사, 장로, 집사를 세우며, 당회와 노회와 총회를 구성하며, 성경교리의 원칙에 의한 예배모범에 따라 성례를 집행하며, 교회의 권징이 권징조례에 의하여 시행된다.”라고 말한다. 이런 면에서 양 교단이 더 깊은 교류를 원한다면 헌법의 정치와 예배모범과 권징조례를 서로 살피고 일치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대신의 “생활”은 합신의 “바른 생활”에 대응된다. 신학이 아무리 정교하여도, 그리고 정치와 예배모범과 권징조례가 아무리 성경적일지라도, 생활과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빛을 잃는다. 교리와 정치는 생활을 통하여 드러나고, 검증되어야 한다. 합신과 대신의 교류가 깊어져, 공동으로 각종 행사와 신문과 선교와 교육을 하게 된다면, 그에 따른 재정 지출과 집행 권력은 커지기 마련이다. 그때도 합신이 현재 갖고 있는 거룩함과 양보와 배려와 절제를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합신이 현재 이것들을 유지하는 것은 교단 전체의 권력과 재정이 크기 않은 데도 한 원인이 있다.

   합신과 대신은 절대로 사사로운 정치적 이득이나, 외형의 몸집을 키우려는 욕망으로 교류해서는 안 된다. 많은 장로교 교단들이 야망으로 연합하였다 두세 배로 분열되곤 하였다. 교리와 정치의 일치 없이 서둘러 2015년 9월에 통합한 백석과 대신(통합)은 통합 처음부터 불협화음을 내다가, 세속 법정에 의해서도 대신 총회의 통합 결의가 잘못되었다는 판결을 지난 6월 15일에 항소심에서 받았다. 대신 교단은 2015년에 이미 통합파와 수호파로 분열되었고, 통합파는 이번 판결로 백석에 잔류하는 파와 대신으로 복귀하는 파와 백석에서 나와 독자적 세력을 구성하는 파로 분열되었다.

   대신과 합신은 서두르지 않고, 교리와 정치와 생활의 일치를 위해 한 걸음씩 교류해야 한다. 이럴 때 서로의 장점을 배우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게 된다. 교류를 통해 서로가 성장하는 것이다. 어떤 정치적, 물리적 욕심이 있는 교류는 그것을 상대방에게 들키거나 그것을 채울 수 없는 환경이 되면 급격히 교류의 동력은 약화되고, 서로를 불신하며 상처만 남긴 채 헤어지게 된다.

   교류를 중단해도 아무 부작용이 없고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교리와 정치의 일치를 위해 양 교단은 먼저 노력해야 한다. 이런 일치의 과정 속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여감에 따라 교단 신문과 선교와 교직자수련회와 신학교의 교류 등으로 점차 폭을 넓혀야 한다. 형제의 연합하여 동거함이 좋다는 낭만적 생각으로 교류와 물리적 연합의 폭을 먼저 넓히면 부정적 현상이 크게 발생했을 때 되돌리기가 힘들다. 교리의 일치 없는 교류는 야합에 지나지 않고 분열로 이어짐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