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논단| 장애인 인식 개선과 비전있는 교회의 방향_ 서천석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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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논단

장애인 인식 개선과 비전있는 교회의 방향

< 서천석 전도사_열린비전교회>

 

장애인을 배려한 좋은 법제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의 인식 개선이다

하나님은 장애인 비장애인 차별 없이 각 사람에게 주신 달란트와 그 능력으로 평가하신다

장애 부분만 관심을 갖고 비장애인과 같이 장애를 극복하여 자립하게 돕는 것이 최우선이다

  우리의 속담이나 구전 문화를 보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에 대한 체질화된 인격과 능력의 편견이 그 호칭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현대 사회에서는 장애인의 유형을 크게 둘로 나누어 정신 장애와 신체 장애로 나누고 그 세부적인 장애는 장애가 있는 부분만 짚어서 발달 장애, 자폐 장애 등으로 구분하고 신체 장애에 있어서도 청각, 시각, 지체, 척추 손상(휠체어 장애 혹은 하반신 마비라고 일반적으로 부름)장애 등으로 표현하는데 우리의 문화에 있어서도 이 유형과 세분화된 호칭에는 다를 바 없다. 즉, 안 좋은 표현들로서 정신 장애는 ‘등신’이라 부르고 그 안에는 ‘바보, 천치, 멍텅구리, 미치광이’ 등으로, 신체장애는 ‘병신’이라고 말하는 바, 세부적으로는 ‘벙어리, 장님, 곰배팔이, 절뚝발이, 앉은뱅이’ 등으로 호칭함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현대 사회와 장애인에 대한 우리 문화의 큰 차이를 찾아볼 수 있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 장애인의 인식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장애가 있는 그 부분만 짚어서 호칭하고 그 부분의 재활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면 우리의 경우는 ‘등신’이나 ‘병신’을 어느 부위에 장애가 있든지 간에 무조건 비인격적인 취급은 물론 그 사람 전체를 무능으로 인정하여 본인 또는 가족에게 쓸모없는 창피한 존재로 취급해 왔다. 속담을 예로 든다면 ‘병신 달밤에 체조한다’라든가 ‘병신 육갑한다’ 또는 ‘장님 남의 다리 긁는다’ 등등 얼마든지 그 예는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1950년 6.25 전쟁 이후 장애인 호칭 변화에 급박한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즉, 6.25 전쟁 당시 나라를 지키려다 순국한 분들도 많이 계시지만 신체의 각 분야에 장애를 갖게 된 군경들도 많았다. 이들을 향하여 과거의 우리의 습관대로 아무렇게나 병신 취급은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확실하게 정리된 인격적인 장애인에 대한 호칭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지칭할 때 대충 ‘몸이 불편하신 분’ 혹은 그 부위에 따라서 ‘다리가 불편하신 분’ 또는 ‘어디가 불구가 되신 분’ 등등으로 나름대로 존경의 표현을 애매하게 구사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1982년 ‘UN이 정한 세계 장애인의 해’를 맞이하면서 우리나라에 서구화된 장애인 호칭이 여러 차례 수정 과정을 거쳐 오늘날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용어의 변화를 일으킨 서구 문화의 영향을 받아 1981년 6월 우리나라에도 장애인 복지법이 제정되었고, 1990년 1월 장애인 고용법, 2007년 4월 장애인 차별 금지법, 2016년 6월 장애인 인식 개선 교육법 등이 법제화되고 우리 사회는 급물살을 타며 각 분야에 장애인복지시설이 설립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용어의 변화나 장애인을 배려한 좋은 법제도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의 인식 개선이 쉽게 바뀌지 않은 점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인권 존중은 사회적으로 차별이 없는 분위기는 형성되어 있지만 그래도 어느 구석에는 장애인 시설이 들어온다던지 법적으로 제정된 장애인 채용에 있어서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모습을 볼 수 있다. 1982년 실시된 대학 입시 학력고사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 당시 대학 입시 요강에 장애인은 입시응시 원서조차 거부되어 시각 장애 학생들의 대입이 곤경에 처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이전에 대학을 졸업한 시각 장애인들이 모임인 ‘한국맹인학사회’가 있었는데 회장인 양정신 목사가 어려운 과정을 거쳐 당시 민관식 문교부 장관에게 호소한 바 양목사가 민장관이 다음 해부터 응시생에게 점자 시험지를 배부하고 묵자(보는 글씨)와의 속도를 감안하여 시험시간도 1.5배로 늘려 주겠다는 친필 답서를 받게 되었다. 그 와중에 신학 대학에서 조차도 시각 장애인 응시생을 받지 않아 맹학교 고교 출신 전맹 여성 한 명은 미국으로 가서 보스턴대학 음대에서 박사 코스까지 이수하고 한국에 와서 세종문화회관에서 피아노 독주회를 한 진풍경도 벌어진 바 있다.

  또 한 가지 예를 든다면 교육계에서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통합 교육을 시도하고 있는 바, 문이 열려진 학교에서는 특수 학급을 만들어 장애인을 받는 통합 교육을 실천하는 사례도 많이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평등하게 한다면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단지 그 장애가 있는 부분을 어떻게 도와줌으로써 장애 부분을 극복하고 비장애인과 함께 불편 없이 살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최초에 인간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을 때 죄 값으로 인간은 호흡이 다할 때까지 땀 흘려 일하고 먹고 살도록 명령하셨다. 여기엔 남녀노소나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별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내 모습 이대로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 인간의 가치와 능력 평가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인간의 평가 기준은 일정한 수치에 의해서 일률적으로 빈부, 상하, 강약 등 높낮이가 판가름 되지만 하나님의 평가 기준은 각 사람에게 주신 달란트나 능력을 퍼센트로 평가하심을 알 수 있다.

  간단한 예로 마태복음 25장에 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두 달란트 받은 자가 각각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의 이익을 남겨 바쳤을 때에 받은 상급은 두 사람 모두 차별이 없이 똑같았다.

  또 하나, 막12장, 눅20장의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부자와 과부가 헌금함에 헌금한 것을 보고 부자는 많은 돈을 헌금했고 가난한 과부는 비교도 안 되는 두 렙돈 밖에 헌금을 안 했지만 누가 헌금을 더 많이 했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과부의 엽전 두 렙돈이 더 많다고 대답하셨다. 그 이유는 부자는 많은 돈 중에서 일 부분을 헌금했고 과부는 갖고 있는 두 렙돈 전액을 바쳤으므로 퍼센트로 볼 때 과부는 100%를 헌금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100%를 많게 평가하신 것이다.

  필자가 1980년대에 어느 미국 교육학 박사의 강의에서 들었는데 현대 미국 교육의 뿌리가 마태복음 25장 달란트 비유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학생들을 일률적인 기준에서 평가하여 우열을 가리던 것을 각자가 갖고 있는 능력에서 몇 퍼센트를 발휘하느냐에 따라서 그들을 평가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목발을 한 지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100미터 달리기를 했을 때 지체 장애인은 사력을 다하여 달렸는데도 10분이 걸렸고, 비장애인은 1분에 달릴 수 있는 데도 천천히 뛰어 2분이 걸렸다면 과거의 평가로는 2분에 달린 사람이 당연히 1등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1분 안에 달릴 수도 있었는데 2분을 허비했기 때문에 50점 밖에 인정받을 수 없고, 10분에 최선을 다하여 달린 지체 장애인은 100점의 평가를 받아야 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학교생활이나 사회생활 모든 분야에 걸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는 개념을 초월해서 모든 사람은 자기가 갖고 있는 능력의 발휘 여부에 따라서 평가를 받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정한 평가 기준일 것이다.

  따라서 장애인의 인식 개선은 다시 강조하지만 장애인을 위한 법 제도에 앞서 비장애인들의 인식 개선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2016년 6월, 장애인 인식 개선 교육 의무화가 발표되었지만 장애인을 고용하는 기업의 의식이 바뀌지 않음으로 모처럼 취업을 했던 장애인이 얼마 못 버티고 이직하는 경우가 속속 드러나 금년 5월 29일, 장애인 인식 개선 교육을 실시하라는 의무 조항이 또 생겼다. 잠깐 과거를 돌이켜보면 건축법도 장애인을 위하여 출입구에 계단을 없앤다던지 승강기에 층수를 말로 해 준다던지 장애인을 동반했을 경우 교통비 등등 사회 전반에 걸쳐 많은 배려와 인식 변화의 목소리가 점점 넓혀져 가고 있으나 가장 아쉽게 생각되는 것은 교회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는 만인이 모여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이다. 그 만인 가운데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유·무식, 장애와 비장애, 병약자, 과부와 고아 등 누구나 가서 하나님께 경배하며 기도와 찬송을 하며 말씀으로 변화를 받은 성도들이 어두운 세상에 나가서 빛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어두움에 빛이 비치면 흑암에 가려졌던 모습과 상황이 다 드러나 보일 것이다. 사도바울도 빌4:12절 이하에 보면 성도들은 각 분야에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수준에서 행함의 믿음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도 눅10:27에 보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서 나의 이웃은 나와 똑같은 수준과 환경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즉, 가난한 자, 병든 자, 노인, 어린이 등등 수없이 다양한 계층을 어떻게 나를 그들에게 대입시킬 수가 있을까? 우리 속담에 ‘과부가 과부 사정을 안다’는 말이 있다. 즉, 자기가 직접 체험하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라는 뜻일 것이다. 한국 교회를 한번 살펴보기로 한다.

  교회 안에 영유아부, 유치부, 초중고등부, 청년부, 또는 남녀 전도회 등등 연령층에 따라 각 부서가 있는 만인의 집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나라에 여성들만이 모이는 여성교회나 노약자만 모이는 노인교회나 어린이만 모이는 어린이교회가 독립하여 따로 창립되었거나 기존의 교회에서 분리 개척된 교회를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유독 장애인은 하나님의 집 교회에서 분리되어 시각 장애인(약칭 ‘맹인’이라고 함)교회, 청각 장애인 교회, 지적 장애인 교회까지 설립 되고 있다. 또 다른 교회를 예로 들면 맹학교 근처에 있는 교회에 맹학생들이 주일날 교회를 가면 비장애 학생들과 분리시켜 따로 예배를 드리는 곳도 보았다. 맹학생들은 비장애인 학생이나 똑같이 학교에서 국정 교과서로 공부하고 있는데 단지 교과서가 점자일 뿐 수업을 받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는데도 교회에서 이것조차 이해를 못하고 분반 예배를 드리는 실정에서 어떻게 사회 각 분야에서 장애인을 고용할 생각조차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집에 모여든 빛의 사람들이라면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130여 년이 지났고 수많은 기독교인이 각계에 퍼져 있을 뿐 아니라 해외선교까지 나가는 이 시점에 사회에 앞장서서 기독교인으로서 본보기가 되어 밝은 미래를 먼저 제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만들어진 법과 제도를 따라가기에도 미흡한 점이 있다고 본다. 교회가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 하나만 붙잡고 실천을 한다 해도 사회보다 훨씬 앞서 교회에서 장애인 복지, 일자리 창출, 건물 건축에 이르기까지 이 사회의 장애인 문제는 벌써 해결이 되었을 것이다.

  예를 하나만 더 들어 본다. 1991년 4월 20일,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의 날이 제정되었다. 각 교회에서는 장애인의 날(혹은 장애인 주일) 어떤 메시지가 나오는지 궁금하다. 국가적인 행사를 보면 매년 실시되는 장애인의 날에 주로 장애인 표창이나 선물을 주거나 아니면 체육 대회, 예술 대회 등등이 펼쳐진다. 대체로 살펴본 교회의 장애인 주일은 영상으로 성공한 장애인이나 장애인을 도와준 분의 업적을 예배 중에 보여 주기도 하고 장애인이 만든 물건을 그 주일에 팔아 주기도 한다. 아니면 그 교회 소속에 장애인들에게 선물을 주거나 아니면 장애인 교회를 후원하는 일도 있는 것 같다.

  앞서 언급했듯이 교회는 만인이 모이는 하나님의 집이므로 그 성도 가운데는 각계각층 각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일군들도 많이 있기 때문에 장애인의 날 하루만이라도 자기 교회에 출석하는 장애인의 장애 체험을 한다든가 장애인이 없다면 노인성질환으로 팔, 허리, 무릎 등등을 앓고 있는 분들의 상태를 체험하는 행사를 한다면 상상밖의 사회적인 복지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본다.

  시각 장애자를 하나 예로 들겠다. 전 교인의 반수가 눈가리개를 하고 나머지 반은 안내자가 되어 준다고 하자. 시각 장애 체험을 하는 분은 우선 예배 시간에 찬송 부르기도 어렵고, 앉고 서는 문제도 긴장이 되고 건물의 벽 모서리가 모두 직각으로 돼 있어 살짝 부딪혀도 상처가 나고 식사할 때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던 그릇들의 어떤 점이 불편한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모든 점을 감안할 때 교회 안에서 장애인 체험 훈련을 해 본다면 굳이 재차 금년 5월 29일부터 실시하라는 장애인 인식 개선 교육이 교회 앞에서는 무색할 것이다. 그 교회의 선배인 하나님의 일꾼들이 장애인의 취약점을 이미 다 체험하고 알기 때문에 고용 창출에도 문제가 안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장애인은 불쌍한 존재도 아니고 구제의 대상도 아니며 단지 장애가 있는 그 부분만 관심을 갖고 비장애인과 같이 장애를 극복하여 자립할 수 있도록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여러 측면에 기자재 생산이나 인적 훈련을 통하여 도와주는 것이 최우선일 것이다.

  반면 장애인 자신이나 가족도 장애에 대한 열등감을 갖거나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언제 어디서 누구 앞에서나 자기 장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이 자존감이 있는 인격적인 모습일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모든 교회는 모든 사람과 사회의 분위기를 아울러 먼저 내다보며 먼저 자기 앞의 상대의 상황을 스스로 체험해 보는 경험을 갖는다면 사회를 뒤따라가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 주기보다 사회를 지름길로 인도해 주는 촉진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서천석 전도사는 숙명여대를 졸업하고, 시각장애인으로서 장애인들을 위한 특별한 사랑과 사명으로 사역하고 있다. –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