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윤리적 타락의 시대의 교회의 사명
<이은상 목사_동락교회>
윤리적 타락의 시대에도 언제나 우선으로 생명나무인 말씀을 심어야한다.
미투, 위드유, next who? 미투 운동은 유력한 대통령후보자까지 쓰러뜨리는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마치 봄의 들불이 마른 숲을 태워 버리듯 왜곡된 남성들의 성욕이 우글거리는 정글 숲, 권력의 가시나무 숲을 태워 버리고 있다. 어쩌면 미투의 들불은 하루 22km의 속도로 북상한다는 봄꽃의 개화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전국을 강타하고 있다.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그렇다. 위력. 지위의 힘으로 여성을 멸시하고 공격하고 성적노리개로 삼아 온 자들의 오랜 위선과 폭력이 이번 기회에 확 무너졌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교회는 미투 운동과 같은 윤리.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성경적 렌즈로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득의 법칙’이라고 있다. 설교학에서도 사용하는 원리인데. 상대방이 어떻게 설득 당하는가? (1) Ethos : 화자의 윤리적 요소. 성품이나 인격에 신뢰가 갈 때. (2) Pathos : 화자의 감정적 요소로 상호간의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때. (3) Logos : 지적, 논리적 요소로써 타당성을 제시할 때. 요약하자면 설교자의 인격, 감성, 그리고 지성(말씀)이 설득의 중요요소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요소 중 설득효과에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나는 과연 어떤 경우에 설교자에게 설득 당하는가? (1) 설교자의 성품 (2) 설교자의 열정과 패기 (3) 설교자의 지성.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중치를 순서대로 6:3:1로 주장한다.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가 한국교회 성도를 대상으로 임상실험 한 것 같다. 아니면 그가 미투 운동을 예언했을까? 지금 윤리적 타락의 시대에 많은 교회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6:3:1의 설득의 법칙을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과연 옳을까? 하지만 성경적 설교방법은 항상 로고스를 우선한다. 왜냐하면 거룩은 캠페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말씀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캠페인은 인간의 죄를 들추어낼 수는 있어도 깊이 자리 잡은 죄의 뿌리를 거둬낼 수는 없다. 캠페인은 변죽만 울릴 공산이 크다. 피었다 지는 꽃과 같이 유행으로 그칠 확률이 크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관절과 골수를 쪼개 숨은 죄의 뿌리를 파해 버린다. 그러므로 윤리적 타락의 시대라 할지라도 교회는 로고스를 우선에 두라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6:3:1의 원리를 가장 잘 이용하는 곳이 바로 광고회사의 마케팅이다. 문제는 교회도 이런 마케팅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속지 말아야 한다. 후회 없는 구매를 하려면 상품의 내용과 질을 잘 헤아려 보아야 하듯이 교회는 최상의 말씀을 준비하고 질 높은 설교를 해야 한다. 설교자의 잘 생긴 얼굴, 감성의 목소리, 떵떵거리는 확신. 그러나 죄를 대항할 수 있는 힘은 설교의 내용, 즉 말씀에서 나온다. 불끈 주먹을 쥐고, 큰소리를 친다고 죄가 쉽게 물러가지 않는다. 죄를 들추어내고 비방한다고 쉽게 도망갈 죄가 아니다. 양심을 잃은 범죄자는 폭로와 고발을 적반하장으로 오해와 비난의 덤터기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윤리적 타락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윤리 운동을 넘어 말씀 운동으로 가야 한다. 죄인을 향한 교회의 목표는 후회가 아니라 변화이다. 사람의 변화는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욕정은 폭로보다 자백으로 물리침이 좋다고 본다. 미투, 미투, 미투… 폭로가 이어지고 있다. 그것보다는 ‘아이마이미(I, My, Me)’가 더 좋지 않을까? 아이 – 나는 죄인입니다. 마이 – 나의 전적인 잘못입니다. 미 – 나를 용서해주십시오. 피해자인 여성들이 방송에서 미투를 외치는 것보다 가해자인 남자들이 침상에서 아이 마이 미를 부르짖도록 해야 한다. 죄인을 법 앞에 세우는 것도 마땅하지만 자기 스스로 법 앞에 서게 할 때 진정한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여론 앞에서만 떠는 범죄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 앞에 떠는 죄인이 되게 해야 한다. 지금 이 시대는 말씀운동을 펼치는 교회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윤리 선생이 되려하지 말고 복음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
미투를 외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아이 마이 미를 외치는 것은 용기가 아닌 은혜의 힘으로 할 수 있다. 그 은혜의 물줄기는 말씀의 저수지에서 성령을 통하여 흘러나온다. 엉클어진 성의 정글 숲이 건강한 에덴의 숲으로 회복되길 기대해 보자. 반드시 남과 여, 반듯하게 일부일처로만 기뻐하고 감사하며 부끄러움이 없는 맑은 숲을 만들어 보자. 윤리적 타락의 시대에도 교회는 언제나 우선으로 생명나무인 말씀을 심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