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혜의 뜨락 >
고난이라는 이름의 터널
< 이영숙 사모, 지구촌교회 >
어두운 터널인 고난을 통과하면 밝은 희망을 만나게 하시는 주님
그해(1986년) 우리 부부의 마음은 온통 설렘과 희망으로 가득했었다. 남편의 꿈이었던 캐나다 유학을 떠나기로 계획하고 준비 중이었기 때문이다. 당시로서는 어려운 과정을 거쳐 캐나다 유학의 길이 열린 것이다. 더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누구보다도 컸기에 과감하게 모험을 한 것이다.
우리는 어린 딸과 생후 9개월 된 아들로 인해 쉽게 같이 떠날 수가 없어서 남편이 먼저 가서 준비한 후에 내가 뒤따라가기로 했다. 전세금을 유학비용으로 마련해 놓고, 나와 아이들은 충남에 있는 시댁에서 지내기로 했다. 우리가 쓰던 모든 짐은 시골집의 창고에 들여놓고, 아궁이에 장작불을 때는 시골 생활이 시작 되었다. 왠지 모를 막연함과 미래에 대한 불투명함으로 마음에는 보이지 않는 불안감도 약간 있었다.
김포공항까지 배웅해 주러 나오신 고 장경재 목사님과 많은 교우들이 공부 잘하고 꼭 돌아오라는 격려와 축복을 받으며 남편은 떠났다. 그 시절만 해도 공항에는 많은 사람들이 배웅해 주던 시절이었다. 남편이 출국한 후 잘 지내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 하면서, 나는 나대로 캐나다 비자를 얻기 위해 인터뷰 준비를 했다. 교통이 불편한 시댁에서 어린 아들을 업고 서울의 캐나다 영사관을 출입하느라 종종 걸음을 해야만 했지만 희망이 있기에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까다롭게 질문하는 면접을 통과하고 비자를 받은 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했다.
부푼 마음으로 출국을 기다리던 어느 날 남편에게서 연락이 왔다. 생활비를 절약 하려고 책 배달을 하다가 군대에서 다친 허리를 또 다쳤다는 것이다. 의료보험도 없고 하루 병원비만 백 달러가 넘는 그 곳 병원에 계속 다니기 부담이 되어서 일단 귀국한다는 것이다. 의지가 강한 남편은 한국에서 치료를 받고 다시 출국 하겠다는 말도 덧붙였지만 무너지는 절망감으로 내 마음은 아득해 졌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출국할 날만 기다리는 나에게 날아든 소식은 부풀었든 내 마음을 서늘하게 했다.
유학을 갔다가 그냥 돌아오면 주위에서 사람들이 뭐라고들 할까. 사람이 다친 것이 무슨 큰 죄도 아니련만 부끄러운 마음이 살짝 들었다. 아픈 남편 생각보다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어떻게 볼 것인가부터 걱정이 되었다. 공항에 나와서 환송해 주었던 교우들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유학을 마치지 못하고 잠시 돌아온다는 남편을 부끄러워하는 내 자신이 정말로 부끄러운 존재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주님! 공부하고 학위를 받고 귀국하면 주님께도 영광이고 저희도 기쁠 텐데 이렇게 돌아와야 하나요?’ 하며 섭섭함이 들었다. ‘그래, 내가 모르는 주님의 뜻이 있겠지.’ 나는 애써 담담해지려고 마음먹었다.
공항에서 만난 남편은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순간, 나는 눈이 흐려지고 여린 내 마음은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나를 보고 애써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지만 씁쓸함이 묻어나는 모습에 마음이 저려왔다. 옆에는 건장한 남자(사실은 공항의 환자 도우미)가 여행 가방을 밀고 나오고 있었다. 남들에게는 어떻게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참으로 우울하고 슬픈 재회였다.
당하고 있는 처지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따뜻하게 맞아 주는 분은 부모님이기에 우리의 세간살이가 있는 시댁으로 갔다. 뜨거운 온돌방에 허리를 찜질하고 쉬면서 남편은 점차 회복이 되어갔다. 아마도 어린 두 남매의 재롱이 큰 약이 되어 회복을 빠르게 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남매에게 ‘아버지’의 얼굴과 존재를 확실하게 인식시킬 가장 중요한 때를 놓치지 않고 같이 살 수 있게 되었던 것도 잘된 일이었다. 한 달도 안 되었지만 딸은 어느새 사투리 말을 해서 우리 부부에게 웃음을 주었다. 그러나 남편은 아버님께 걱정을 끼쳐드리는 현실에 마음이 무거우면서도, 건강이 회복되면 다시 캐나다로 떠날 생각이었기에 희망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때에 마침 섬겼던 교회 담임목사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유학은 다음에 가고 교회 사역을 하라는 것이다. 교회의 긴박한 필요에 따른 강력한 부름에 갈등하는 남편에게 나는 단호히 말했다. 사역했던 교회에 가지 않겠다고. 갈 거면 당신 혼자 가라고. 난 부끄러워 얼굴 내밀지 못하겠다고. 공부 잘하고 돌아오라는 교우들 앞에 실패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너무 싫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마음이 힘들고 복잡했던 그런 시간들이었다.
결국 화성교회로 돌아갔고 교우들의 안타까운 위로와 혀를 차는 모습에 고마움과 함께 부끄러움으로 숨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하면 미숙아처럼 여리기만 했던 나를 하나님은 낮추시어 겸손케 하시고 오직 그분만이 생의 주권자이심을 터득시키시고 믿음을 영글게 했던 아름다운 성숙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은 지금 주님의 뜻을 따라 최선을 다해 사역을 하고 있다. 하지만 12년 전 또 한 번의 큰 수술로 육신의 고난이 끝나지 않았지만 힘든 중에도 맡겨주신 사역을 기쁨으로 감당하고 있다. 전적인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만약 다치지 않고 그곳에서 학업을 계속 했다면 그곳에서 목회했을까, 아니면 한국에 돌아 왔을까. 가끔씩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다. 오직 주님만이 아시리라…
그러나 군대에서 다친 허리와 목 수술로 인해 지금까지 통증이라는 고난과 친구하며 살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내 마음에도 처연한 아픔이 있다. 씩씩하고 건강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본인만이 느끼는 고통과 통증으로 늘 한계 인생을 살아가며 안으로 힘들어하는 모습, 고난과 고통을 끌어안고 내색하지 않으면서 하루하루를 힘차게 이겨내는 모습. 하지만 나는 안다. 활동의 제약에서 오는 내면의 고뇌를.
또 하루가 시작된다. 오늘을 열어 주신 신실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우리에게 크고 작은 고난의 터널이 있었기에 조금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과 아픔을 통해서 때로는 절망과 좌절을 느끼지만, 그 자리에서 희망의 꿈을 꾸고, 희망의 싹을 찾아내어, 다른 누군가에게 희망을 선물 할 수 있다면 고난이 주는 유익이라 생각해 본다. 어느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고난이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면 주님의 선하심을 믿고 어두운 터널인 고난을 통과하면, 아름답고 밝은 내일의 희망을 만나게 하실 주님을 찬양한다. 고난을 동굴이 아니라 터널로 허락하신 주님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