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 강>
구약성경과 기독교적 사회정의
< 현창학 교수, 합신, 구약학 >
성경적 사회정의의 첫 번째 차원은 불의가 제거된 사회를 의미한다
성경적 사회정의의 두 번째 차원은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현창학 교수 (합신, 구약학)
구약에는 “의”로 번역되는 ‘체뎈’(צדק)이 (명사, 동사 다 포함하여) 523회, “공의”로 번역되는 ‘미쉬파트’(םשפט)가 422회 나온다. 하나님의 성품과 활동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단어들인데 두 단어는 함께 쓰여 하나님의 의 또는 정의라는 뜻이 된다. 물과 공기가 소중하지만 너무 흔해서 고마움을 못 느끼듯이 이 단어들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들인데도 너무 흔하게 나오는 관계로 오히려 적절한 주목을 받지 못한 채 등한시되어 왔다. 이 단어들의 빈도가 말하는 것처럼 구약 전체는 “바른” 세상, “바른” 나라를 구현하고자 하는 꿈으로 가득하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이 땅에서 “의”가 실현되는 나라를 만들기를 원하시고, 그로 인해 “산 위의 동네”로서 주변과 주변 국가에 본이 되며 복을 끼치는 샘이 될 것을 소원하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도 기본적인 초점이야 두 말 할 나위 없이 개인 영혼의 구원과 성장에 맞춰져야 하지만, 거기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응당 ‘바른 사회’ 그리고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 대해 책임질 줄 아는 세상’을 실현하는 데까지 관심의 폭이 넓혀져야 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의”의 실천이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복음의 본질에 속한 내용이다. 아모스나 미가 등이 말하는 ‘선민의 창조적 책임’이 그것이고, 월터스토프가 표현한 “세계 형성적 기독교”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개혁신학의 특징을 일컬어 “공적 신학”(public theology)이라 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개인적인”(personal) 것이기는 하지만 “사적인”(private) 영역에 갇히거나 거기에 머무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공적인”(public) 책임을 져야 되고 또한 질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자신이 사는 지역 사회로부터 시작하여, 국가, 지구촌에 이르기까지 사회적인 책임을, 그리고 지구의 미래와 환경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인 책임을 지는 것을 말한다.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라든지 그리스도인의 문화소명(cultural mandate)이라는 말이 모두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나나 내 가족의 안위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가치와 정신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개혁신앙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존재 방식을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규정하셨기 때문에 삶의 태도(modus vivendi)로서 사회적 책임은 우리에게 불가피한 것이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어떻게 하면 복을 받을까 어떻게 하면 화를 피할까 하는 토속신앙적 관심에만 머물러선 안 되겠고, 하나님의 관심에 우리 관심을 조율하여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는 바른 세상을 건설할까 하는 데에 의미와 지향이 맞춰져야 한다.
공간이 충분하지 않으니 성경 본문은 아모스 한 경우만 예를 드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겠다. 아모스 1-2장을 보면 먼저 이방의 잔학상(atrocity)을 말하고 그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신 다음에 결국 유다와 이스라엘에게까지 심판을 선포하시는 내용이 나온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잘못이 무엇이었기에 그들도 동일한 심판의 대상이 되는가. 다메섹이나 가사, 두로 등과 같이 잔혹하게 사람을 죽이거나 마을을 통째로 노예로 잡아 팔아넘기거나 반인륜적인 극악 범죄를 저지르거나 한 엄청난 것이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무시했을 뿐이다.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뿐이었다. 우상숭배를 했고, 사회의 약자를 억압하고 억울하게 하여 ‘사회정의’를 실현하지 못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산 위의 동네”가 되어 주변국의 본이 되지 못한 게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이다.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하여 율법이 가르치는 삶을 살았다면 그것이 주위에 ‘문화적 능력’으로 작용하여 인접한 주변 세상이 그렇게 포악하고 비인간화한 세상이 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 중요한 이유이다.
아모스서는 그리스도인의 작은 순종이 세상의 부패와 불행과 비극과 슬픔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이요 엄청난 잠재력임을 엄중하고 또 엄중하게 교훈하고 있다. 의를 행하는 “한 사람”만 있어도 도시는 용서받을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말씀 또한 얼마나 의미심장한가(5:1).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극히 보잘것없는 필부필부일 뿐이며, 우리가 드리는 기도 역시 지극히 사소하고 하잘것없는 일상의 문제들을 아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연약한 개인은 역사와 하나님 나라에 아무 보탬도 될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성경은 기도하는 백성이 꾸는 꿈과 지향하는 가치가 세상을 뒤집어 놓을 수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준다. 비록 삶의 무게에 눌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곤비한 삶이 매일 이어지는 가운데 있다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복의 근원”이며 역사 변혁의 중심에 선 존재라는 사실을 한시도 망각해선 안 된다. 오히려 곤경에 처해 있고 연약하기에 우리는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자격자들이다. 힘겨운 시간에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고(commit) 말씀에 순종할(obey)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미래를 여는 길이며, 그러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선지자들의 설교 주제의 거의 정확히 반은 사회정의이다. 물론 나머지 반은 우상숭배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갖는 종교적 충성심만큼이나 우리의 더불어 사는 사람들을 향한 태도에 관심을 가지신다. 구약을 공부하노라면 하나님이 가지시는 이 관심의 중요성으로부터 도저히 마음을 뗄 수가 없다. 우리가 구현해야 할 ‘사회정의’를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눠 생각하자. 하나는 말 그대로 불의가 제거된 사회라는 의미이다. 정직과 성실이 기본 가치가 되도록 ‘사회정신’을 세우는 일을 말한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권력과 재화의 노예가 되어 바로 앞의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 불의한 일을 거듭 자행하면서 세상 전체를 불행하게 만들어 가는 몰락의 폭주기관차와 같은 것이 선지자들이 경험한 인간의 역사라는 악몽이었다. 우리 역사도 다를 바 없다. 우리 사회의 부패의 민낯을 극장식으로 학습시켜준 빼어난 학교 기능을 한 이번 사태를 지나오면서 한꺼번에 다 고칠 수야 있겠는가, 부디 문화가 되어버린 정경유착 하나만이라도 끊어낼 수 있으면 더 이상은 바랄 것도 없다는 간곡한 심정이다.
정직, 성실, 청렴이란 소프트파워 없이 선진국이 도대체 꿈이라도 가능한 것이겠는가. 건국은 되었지만 정신적 ‘설계’는 한 번도 된 적이 없는 나라, 항상 재화와 경제에만 열심을 냈지 사회의 ‘정신’을 세우는 일에는 한 번도 제대로 힘을 써 본 적이 없는 나라, “의”의 가치를 세우는 기회는 과연 언제 포착될 수 있을까. 바로 사는 데에 하나님의 복이 있다는 고통스러울 만큼 단순한 이 사실 하나를 신봉하고 거짓과 불의를 우리 문화에서 최대한 몰아내는 것이 사회정의이다.
‘사회정의’의 두 번째 차원은 더불어 사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구약의 정의(‘미쉬파트’)는 단순히 “옳음”만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즉 동정심(compassion)의 다른 표현이다. 니버(R. Niebuhr)가 구약의 정의(justice)를 “가난한(약한) 자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편의(偏倚)(a bias in favor of the poor)”라고 정의한 것은 유명하다.
구약에서 정의는 그저 공평한 것을 의미한 관념이 아니었고, 언제나 약한 자, 고아, 과부를 향한 자비를 의미했다. 우리에게 있어 사회정의가 제대로 자리를 잡으려면 약한 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훈련하는 것이 먼저요 기본이다. 복음은 하나님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신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다(출 34:6 등). 하나님의 이 사랑, 이 인격을 모르면 구원은 반밖에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인색하고 나밖에 모르고 살아온 우리에게 우리 주위의 약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잘 계발되게 하는 것이 사회정의의 출발이다. 또한 이 사랑은 지구촌 끝까지 나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사회정의란 그동안 보수교회에게는 여러 이유로 불편한 말이었다. 그러나 어느 진영이 먼저 이 주제를 점거했든지 이에 대해 손 놓고 있는 일은 ‘전체성경’(tota Scriptura)을 고백하는 개혁교회의 자존심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사회의 ‘정신’을 설계하는 것은 미래를 위한 가장 시급한 선택이다. 바르게 사는 길에 하나님의 복이 있다. “의”의 세상은 단순한 이념적 이상이 아니다. 사회의 운명과 우리 자녀들의 미래를 결정짓는 절체절명의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