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신년기획 / 최근 세계 신학의 동향과 한국적 현황 <6>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해를 맞아 본보는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교수들을 통해 최근의 세계 신학의 동향을 알아보고 한국 신학계의 대응과 현황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 <편집자 주>
세계 신약학의 동향과 우리의 나아갈 길
< 김추성 교수, 합신 신약학 >
‘양식비평’은 복음서를 난도질하였으며 ‘편집비평학’은 성경 기자들을 한낱 편집자로 전락시켰다.
오늘날 신약 학자들이 경계해야 할 것은 신약의 탈신학화와 탈교리화 현상이다.
신약학은 최근에 이르러 여러 신학 분과 중에서도 가장 각광받는 분야 중의 하나로 사랑을 받아왔다. 특히, 신약 성경 외의 다양한 문헌에 대한 활발한 연구와 더불어 학계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분과 중의 하나이다. 제한된 지면에 다양한 흐름들을 모두 담을 수는 없으나 주요한 흐름들을 약술해보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1947년 베두인에 의해서 발견된 사해사본은 신약학계 전반에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쿰란 동굴들이 지속적으로 발굴되었으며 쿰란 문서들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특히, 사해사본(DSS)은 구약 사본연구에 있어서 획기적인 공헌을 하였다. 신약학자들은 사해사본과 신약의 관계에 대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토론하여 왔다. 사해사본의 발굴로 인하여 요한복음의 유대적 배경이 헬라적 배경보다 중시되기 시작했다는 매우 긍정적인 공헌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중간기 유대문헌의 중요성이 이전보다 훨씬 중요하게 인정되고 있다. 신약학계에서도 중간기 유대 문헌을 생략하고는 토론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종교 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 진영에서는 정경에 대한 강조(Sola Scriptura)로 인해 구약 외경이나 위경에 대하여 거부감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신학적 입장과 관계없이 이러한 문헌들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다소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비평학자들은 이러한 유대문헌들을 신약의 역사적 배경을 위해서 단순하게 활용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이것들을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최근의 바울 신학의 새 관점 운동을 주도하는 E.P. Sanders는 중간기 유대문헌의 토대 위에서 바울이 당대의 유대주의를 오해하였다고 성급하게 결론 내렸다. 물론, 그의 유대문헌 연구 결과가 공정하며 편벽됨 없는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여하간, 호불호를 떠나서 신약학계에서 유대문헌 연구는 이전보다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
요한계시록 연구도 이미 괄목할만할 정도로 발전했으며 이를 위해 묵시문헌에 대한 연구도 많은 진척을 보고 있다. 요한계시록과 묵시문헌의 관계에 대하여는 여전히 이견이 존재하고 있으나 전반적으로 긴밀한 관계가 인정되고 있다.
신약의 구약 사용은 신약학계에서 가장 주목 받는 분야 중의 하나이다. 이 분야는 신약 연구를 더 풍성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여전히 열어두고 있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신학적 전제들이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다. 신약과 구약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연속성인가 혹은 불연속성인가? 신약 기자들이 구약을 인용하는 것은 어떠한 정당성(Rationale)을 가지는가? 신약 기자들은 구약의 원래 컨텍스트에 얼마나 충실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여전히 많은 난제들을 가지고 있다. 신약 기자들이 구약을 인용할 때 단순히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적 인용을 하고 있으며 신약 기자들이 깊은 신학적 이해를 가지고 있음이 인정되고 있다.
현대 신약학계에서 성경관은 끊임없이 도전 받고 있다. 계몽주의 이래 비평학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며 나름대로 계속 수많은 학설들을 발전시켜 왔다. 이들에게는 성경의 권위가 무너진 지 이미 오래이다. 복음서 연구에서 역사적 예수 연구는 막다른 골목에 봉착했다. 라이마루스(Reimarus) 이래 시작된 역사적 예수 탐구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상이 신앙으로 채색된 예수상이라고 거부하며 복음서의 예수상은 실재 역사에 존재했던 예수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최근에 역사적 예수 연구 중 가장 과격한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운동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음서를 신뢰할 수 없는 책이라고 주장하며 복음서 중 믿을 수 있는 것은 기적이나 초자연적 기사들을 모두 제외한 16-17%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양식비평은 복음서를 난도질하였으며 편집비평학은 성경 기자들을 한낱 편집자로 전락시켰다. 복음서의 자료에 대한 가설들은 점점 더 발전하여 가설이 정설같이 간주되고 결국 가설에 가설을 더하는 현상들이 발생하고 있다.
예를 들면, Q 가설은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정교해지고 발전해가고 있다. 실로 Q 가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얼마나 논리 정연하게 발전시키고 있는지 놀라울 정도이다. 아직 Q에 대한 사본이 하나도 발굴되지 않았는데, Q 가설은 어느덧 학계에서 정설같이 여겨지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사실상 신약의 사본은 5000 개가 넘는 데 성경보다 Q 가설에 매진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학자들이 가설을 자꾸 반복하다 보면 마치 이것이 진리인 것 같이 간주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신약 연구의 과학성을 질문할 때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비과학성이 과학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비평이론들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 양식비평, 문학비평, 편집비평 등 이들은 예수님보다 공동체 연구에 더 집중하고 있으며 일치점보다 차이점을 더 극대화하고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의 방법론은 불신앙에 기초하고 있다. 이들은 새로운 방법론을 유행 같이 좇고 발명하고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과는 참으로 거리가 멀다.
페미니스트(Feminist) 운동을 지지하는 학자들 중에는 성경을 재편집해서 다시 기록해야 된다는 과격한 주장을 서슴지 않는다. 성경은 가부장적 제도 하에서 기록된 책이기 때문에 그러한 요소들을 다 걸러내고 다시 기록해야 한다고 이들은 강조한다. 이들에게 성경은 더 이상 권위 있는 경전이 아니다. 이들은 성경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권위를 모두 통째로 부정한다. 필자가 유학생 시절 1990년대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렸던 SBL(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학회에 참석했던 적이 있다.
요한복음 학회를 참석하였는데 어느 페미니스트 여성 신학자가 요한복음 4장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육체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참으로 신성모독적인 논문을 발표하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평학자들 간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겠으나 이들은 기독교적 정체성을 상실하였다. 무신론 신약학자가 신약을 가르친다고 들은 적도 있다. 다원주의가 대학에 깊이 침투하여 진리의 절대성을 주장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미국과 유럽의 신학교에 팽배하다. 북미주와 구라파의 여러 대학에서 신학은 그저 종교학의 한 분과로 취급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지난 해 한국에서 국제 SBL 학회가 열렸는데 마지막 날 축하 모임에 참석하였다. 외국의 어느 신약 학자가 자기의 출판물을 자랑삼아 이야기 하는데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그날 저녁 식사를 대접한 교회의 담임목사와 성도들이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얼마나 낙심천만했을까. 비평주의자들은 불신앙적 전제를 가지고 성경을 무너뜨렸고 결국은 교회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흐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북미주를 중심으로 복음주의 진영의 약진이 거듭되고 있으며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복음주의 학회(ETS)의 회원이 되기 위하여는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이고 무오성을 믿는다고 서명해야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복음주의 진영에서 탁월한 학자들이 즐비하게 배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이 학회에 몇 차례 참석해서 논문도 발표하고 사회를 맡아 회의를 진행한 경험이 있다.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시카고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의 은사들이 신약의 각 방면에서 활약하는 것을 지켜 볼 수 있었다. 이 분들이 비평주의의 거센 물결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진리를 변호하고 증거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필자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필자는 박사 학위 논문을 집필할 때, 영국의 케임브리지에 있는Tyndale House에서 여러 달 머물며 연구한 적이 있다. Tyndale House는 세계적인 성경 연구소로 뽑히는 곳이다. 크지는 않지만 매우 정선되고 중요한 성경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어서 전 세계에서 성경학자들이 찾는 곳이다. 필자는 그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성경학자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영국에도 비평주의 물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세계 여기저기에 남은 자들이 적지 않다.
오늘날, 신약 학자들이 경계해야 할 것을 꼽는다면, 신약의 탈신학화와 탈교리화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신약학계에서는 정통 신학과 교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본래 성경신학이 학문의 공식적인 분과로 독립하여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J.P. Gabler(1753-1826) 이후이다.
성경신학은 조직신학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하였으며 가블러는 성경이 교리 모음집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가블러는 1787년 Altdorf 대학 취임 연설에서 성경의 역사적 연구를 위한 독립성을 선포하였으며 성경신학은 조직신학이 채운 족쇄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연설하였다. 가블러가 왜 이렇게 조직신학에 대하여 적대적인 태도를 표명하였을까? 그는 조직 신학자들이 그들의 신학적 체계를 성경본문에 투입시켜 본문의 의미를 왜곡시켰다고 생각하였다. 가블러의 이러한 주장은 후대 비평 학자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뒤를 이어 브레데(20세기), 레제넨(21세기)은 모두 한결같이 역사와 신학의 분리를 강하게 주장하였다.
조직신학적 틀이나 교리의 틀을 과감하게 모두 던져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정경의 개념까지고 거부하며 그것도 교리의 일부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신약 학자들은 정통 기독교가 오랫동안 유지해 온 정통 교리와 신학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 비평 학자들은 더 이상 성경신학이라는 용어 자체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성경을 문헌학적 언어학적 관점에서만 연구하는 경향이 강하게 있다.
신학을 배제한 성경 연구가 만연하고 있다. 비평학자들은 신학을 모두 배제하는 것이 참된 성경연구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데 참으로 우려가 되는 것은 이러한 비평신학에 오염된 학자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간에는 적지 않은 긴장관계가 있어온 것이 사실이다. 여하간, 이 둘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지 서로 배타적인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교회가 오랫동안 발견하고 축적해온 신학과 교리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마치 21세기에 들어와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것인 양 주장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하다.
끝으로, 필자는 한국 교회를 섬기는 신약학자로서 다음 몇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철저한 성경관, 계시 의존 사색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관이 무너지면 결국 모든 방벽들이 하나씩 무너지게 되어 있다. 대학생 시절, 박윤선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힘주어 말씀하신 것을 잊을 수 없다. “온 세상이 성경을 안 믿어도 나는 성경을 믿겠다.“ ”내가 성경을 안 믿어도 나는 성경을 믿겠다.“ 당시에는 이 말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으나 이제는 이해가 간다.
둘째,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에 있어서 개혁주의는 좋은 전통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성경을 통합적으로 보지 않고 지나치게 세분화시키는 것은 경향이 만연해 있다. 성경 전체의 통일성을 부정하고 다양성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통일성과 다양성을 균형 있게 제시할 필요가 있으며 더 나아가 주석과 신학의 통합을 지향해야 한다.
셋째, 교회를 세우는 경건한 신학 방법이 중요하다. 무릇 신학이 교회를 세우지 못하면 이미 신학의 사명에서 벗어난 것이다. Eta Linnemann이 지적하였듯이, 신학이 교회를 떠나 일반대학에서 자유롭게 연구되기 시작하며 신학은 급속도로 세속화되었고 결국 신학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결과가 발생하게 되었다. 신학자는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신학이 교회를 세우고 살리지 못하면 결국 신학교는 문을 닫게 될 것이다.
넷째, 신학적 사대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한국 신학자들은 서구의 신학자들과 보조를 맞추며 연구하되 한국 교회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제는 서양 학자들의 이론을 소개하는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의 문제를 가지고 독창적으로 연구하며 사고를 펼쳐 나가야 한다. 한국 학자들은 성경을 가지고 우리 시대의 문제, 한국 교회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해야 할 것이다.
<김추성 교수> 일/문/일/답
- 중간기 유대문헌의 연구를 통해 신약에서 긍정적으로 새롭게 조명된 부분이 있다면?
이미 신약의 배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간기 유대문헌이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특히, 마카비 1서는 하스모니안 왕조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문헌이다. 이 문헌은 셀류커스 왕조의 핍박에 맞서서 Mattathias 제사장의 가문을 중심으로 경건한 유대인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투쟁하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묵시문헌의 연구는 요한계시록 연구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요한계시록의 상징법, 반복법, 구약 사용 등의 이해에 있어서 묵시문헌 연구는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 한국 신약학계에서의 비평학적 활동의 현황과 대응은?
한국의 신약학회는 크게 둘로 나누인다. 비교적 온건한 보수 신학자들을 위한 ‘복음주의 신약학회’와 한신, 감신, 장신을 중심으로 한 ‘한국 신약학회’가 있다. 필자는 복음주의 신약학회 임원으로 오래 섬겨 왔고 지금은 부회장으로 섬기고 있다. 한국의 비평학자들 간에도 워낙 편차가 크고 넓어 일목요연하게 답하기는 어렵다. 한국교회의 보수적 신앙의 영향으로 아직은 한국 신약학회에 몸담고 있는 학자들도 서양의 비평학자에 비하면 비교적 온건해 보인다. 그러나, 한국 비평학자들 중에도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학자가 있다. 더욱이 가장 과격한 ‘예수 세미나 운동’에 동조하는 학자들도 있어 매우 염려가 된다.
한편, 복음주의 진영에 소속된 신약학자들 중에 비평학자들의 전제에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비평학 연구 방법론들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이렇듯이 성경신학 분야는 조직신학 분야보다 경계선이 명확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 한국적 현황 속에서 한국 교회의 문제를 생각하며 신약학을 한다는 의미를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학생 시절 필자의 은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주석을 쓰는데 있어서 중요한 지침들을 준 적이 있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바로 한국 교회의 상황과 목회자들을 염두에 두고 주석을 쓰라는 것이었다. 이제는 한국 학자들의 수준도 놀라울 정도로 높아지고 그 저변도 넓어졌다. 그런데 한국의 신학자는 무엇보다도 한국 교회를 책임진다는 마음으로 신학을 해야 한다고 본다. 한국 교회를 사랑하고 한국 교회와 사회의 문제를 가져와서 성경 본문으로 고민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한국 신약 학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김추성 교수 약력
- 총신대학교 교회음악과 (B.M.)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
-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Th.M.)
-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Ph.D.)
<저서>
『요한계시록 4-5장 연구 : 구약과 묵시문학 비추어』(예영)
『요한계시록 연구』(경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