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진/단| 현재적 칭의와 종말의 칭의 이해_박영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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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적 칭의와 종말의 칭의 이해

< 박영돈 목사, 고신대 교의학 교수 >

 

성령 안에서 성화가 진행되는 증거와 열매가 전혀 나타나지 않아도 믿기만 하면 이미 구원받은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것은 교인들을 무서운 자기기만과 방종에 빠지게 하는 것  

 

칭의는 하나님이 신자의 전인, 즉 그의 존재 뿐 아니라 그의 행함도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며 이때 행함은 칭의의 조건은 아니지만 믿음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필수적인 열매  

 

   칼빈은 신자에게는 확신과 두려움이 공존한다고 했다. 즉 우리의 확신에 경건한 두려움이 깃들여 있어야 우리를 죄와 방종에 빠지지 않도록 보존하여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칭의의 탈락이라는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사랑과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확신에서부터 오는 두려움이다. 곧 자신이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지극히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참으로 확신하는 사람에게는 그 은혜와 사랑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까 우려하는 두려움이 있다. 이는 율법 아래 있는 종의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지극히 사랑받는 자녀들 안에 있는 복음적인 두려움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위로와 확신을 주는 말씀과 두려움과 경종을 불러일으키는 말씀 사이의 미묘한 긴장을 믿음 안에서 살아있게 해야 한다. 이런 두려운 말씀이 부패성을 안고 있는 신자가 방종으로 치우치는 것을 막아주는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하게 한다.

 

  1. 연합되어 있는 칭의와 성화

 

   오래 교회생활을 했음에도 성화의 열매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의 진정성은 반드시 점검되어야 한다. 자신이 구원받았는지의 여부를 심각하게 돌아보고 성찰해야 할 사람들에게 억지로 구원의 확신을 주입시키려는 인위적인 시도는 사람들을 거짓구원의 확신으로 세뇌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사탄은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확신을 공격하며 흔든다. 반면에 위선자 안에 거짓 구원의 확신을 더욱 강화한다. 위선자들은 거룩함의 열매가 없이 죄 속에 살면서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확신으로 충만하여 자신의 구원을 전혀 의심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확실히 망하게 한다.

   한국교회에 구원파적인 복음, 성화와 단절된 칭의로만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가르침은 교인들을 진리의 영이 아니라 미혹의 영이 주는 거짓 확신에 빠지게 한다. 성령 안에서 성화가 진행되는 증거와 열매가 전혀 나타나지 않아도 믿기만 하면 이미 구원받은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것은 교인들을 무서운 자기기만과 방종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이런 위험에 대응하여 복음 전도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와 성화는 하나로 연합되어 있으며 칭의가 참되다면 반드시 성화를 수반한다는 점을 강조해야한다. 어떻게 사느냐와 상관없이 믿기만 하면 구원받은 것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안일하고 태평하게 사는 이들에게 성화의 열매로 칭의의 진정성을 증명해야한다고 강력하게 도전해야한다.

   참된 칭의의 증거와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교인들에게 자신의 구원을 의심해보게 해야 한다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조언은 매우 적절하다고 본다. 이런 의심이 참된 확신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다.

 

  1. 성령의 사역과 칭의

 

   칭의론을 성령론의 맥락에서 재조명하여 칭의와 성령사역의 긴밀한 연합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칭의 교리의 남용과 왜곡을 막는 길이다. 칭의론은 기독론뿐 아니라 성령론적인 관점, 즉 교회론, 종말론,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다루어야한다.

   칭의론이 면죄부로 왜곡된 근본책임은 교회 강단에 있다. 칭의의 교리가 신자의 거룩한 삶을 증진시키기보다 오히려 방해하는 역기능을 하게 된 것은 칭의의 복음이 성령의 조명 가운데 제대로 전파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의 조명이 함께하기 힘들 정도로 성경이 증거하는 칭의 복음의 진수가 빠진 구원론이 한국교회에 범람한다.

   불의한 자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삼위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셨는지, 그 은혜의 영광과 풍성함을 구속사적 맥락에서 온전히 드러냄이 없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메시지의 단조로운 반복이 거짓 확신과 윤리적인 혼란을 가중시킨다.

   구원의 확신은 인위적으로 창출해내는 종교적인 감정이 아니다. 진정한 구원의 확신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우리의 어두운 마음에 비추어 주심으로 생성되는 진리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마음의 확증이다.

   성령은 죄인들을 의롭다고 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삼으셨다는 칭의 복음을 통해 십자가의 정점에서 찬란하게 계시되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그리스도의 얼굴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신다. 따라서 이런 성령의 조명이 없이 참된 믿음과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칼빈은 성령의 역사 없이 믿음은 불가능함을 강조한다.

 

  1. 경건의 삶을 동반하는 칭의

 

   의롭다함을 받은 신자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롬5:1-2). 성령은 우리 안에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확신뿐 아니라 미래에 궁극적인 구원에 이를 것이라는 확신까지 갖게 하신다.

   이런 확신의 강력한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시는 성령의 사역이다(롬 5:5). 의롭게 된 이가 체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힌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의 임함이다. 의롭게 된 이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하나님과 영적으로 먹고 마시는 천국잔치에 참여한다.

   성령은 궁극적인 구원과 영생의 보증이며 첫 열매이다. 신자는 성령 안에서 이미 종말론적인 은혜, 하늘에 속한 복을 그 첫 열매로 맛본다. 신자는 이미 심판대를 지나 하늘의 지성소로 들어가 아버지의 품에 안긴 것이다. 그는 이미 하늘의 영역에 속한 사람이다. 하늘의 처소에 들어가 아버지 집에 거하며 천상의 신령한 복을 누린다(엡1:3, 2:6).

   성령 안에서 누리는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와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는 하나로 연결되어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사는 이는 결코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역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 사는 이는 반드시 완성될 천국에 들어간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의로움이 우리가 죄로 인해 상실한 하나님 나라에 지금 들어가게 할 뿐 아니라 미래의 천국입성까지 확실히 보장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므로 이미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였다. 영적으로 부활하여 새 생명을 얻었고(롬6:1-5, 엡2:1-5, 골3:1), 부활의 능력을 체험한다(엡1:19-20). 영적으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현재적인 면과 마지막 육체가 소생하는 미래적인 부활은 불가분리적으로 연결된 한 짝이다.

   신자 안에 내주하는 부활의 영인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린 것처럼 우리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릴 것이다(롬8:11). 신자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이 이미 부활의 능력으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이 마지막 육체의 부활과 영생을 확실히 보장해준다.

   따라서 영적인 부활 뿐 아니라 육적인 부활까지 칭의의 열매인 동시에 칭의의 확증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그가 의로우심을 입증하셨듯이 마지막에 우리를 다시 살리심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확증하신다.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요일3:3). 이 소망이 참된 경건의 비밀이다. 의롭다함을 받는 믿음은 소망하는 믿음이다. 의롭다함을 받은 신자는 이미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선 자로 산다. 심판대 앞에 선 것처럼 산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며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한다.

 

  1. 칭의에 대한 종말론적 이해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참된 신앙의 증거인 종말론적인 지향성을 상실한 것이다. 하늘의 영광이 아니라 이 땅의 영광과 권력과 번영을 추구하는 현세지향적인 신앙으로 전락하였다. 이것이 한국교회 세속화의 근본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종말의 영인 성령을 거스르고 대적하며 살고 있다는 반증이다.

   칭의의 복음은 성령을 거스르고 사는 위선자들을 위한 면죄부가 아니다. 칭의론을 방종의 라이선스로 남용하는 자들은 아무리 믿노라고 할지라도 그 행한 대로 심판받을 것이다(롬14:10-12, 고후 5:10). 마지막 날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 믿노라고 고백할 것이다.

   거짓 선지자들도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을 행했다고 그들의 대단한 믿음과 업적을 과시할 것이다. 그들이 고백하는 믿음의 진위를 가리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심판밖에 없다. 따라서 심판은 우선적으로 주님이 자주 말씀하신 알곡과 쭉정이, 위선자와 참 신자를 가려내 영구히 분리시키는 방편이다.

   믿노라고 하면서 성령을 계속 거스르고 거짓되게 행한 위선자는 불신자와 똑같이 그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이다. 그들의 행함 없는 믿음이 그들을 의롭다 하기보다 오히려 더 혹독한 심판을 자초할 것이다. 그 때에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고 하실 것이다.

   주님이 위선자는 정죄하시나 참 신자는 사탄의 고소 앞에서 강력하게 변호하실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줄기차게 강조하는 바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3-34).

   따라서 참 신자에게 정죄와 영벌에 이르는 심판은 더 이상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죽을 몸을 다시 살리시는 자체가 만천하에 우리가 의롭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행위인 셈이다.

 

마치는 말

 

   최후의 심판에서 신자에게는 이미 부활로 인해 가시화된 칭의에 대한 공적인 확증과 선포가 있을 것이다. 동시에 그가 범한 죄악에 대한 사죄와 함께 그가 행한 선에 대한 인정과 상이 결정될 것이다. 악행에 대한 사죄의 근거도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데 있으며 선행에 대한 인정과 상급의 근거도 칭의이다.

   우리의 선행과 의로움이 하나님의 완전한 의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미미하기 짝이 없고 흠투성이 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것을 의롭게 여기시고 그에 대한 상급까지 약속하셨다.

칭의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이 신자의 전인, 즉 그의 존재 뿐 아니라 그의 행함도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행함은 칭의의 조건은 아니지만 믿음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필수적인 열매이다. 이 열매 없이 하나님의 심판대를 통과한다는 보장은 없다.

 

 

<편집자 주> 이 원고는 12월 5일 개최된 ‘2016 미래포럼’에서 발표한 원고의 일부를 편집한 것이며, 원고의 전문은 https://www.facebook.com/ danielydpark/posts/1319516361424163?pnref=story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