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참/관/기| “총회는 헌법을 해석하고 노회에서 헌의한 교리문제를 해명해야”_최덕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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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는 헌법을 해석하고 노회에서 헌의한 교리문제를 해명해야”

 

<최덕수 목사, 현산교회>

 

 

   사람은 두 사람 이상이 모이면 협의를 통해서 어떤 일을 결정한다. 교회 역시 두 세 사람 이상이 모여 구성된 일종의 회의체이기 때문에 무슨 일을 결정할 때는 회의로 모이게 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신적 논의를 통하여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삼위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한 기관이 교회이고 주님의 뜻을 구하는 가장 성경적인 방식이 회의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회의를 바르게 해야 한다.

 

   회의를 잘 하면 나뉘어졌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고 어려운 난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반대로 회의를 잘 하지 못하면 반목과 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회의를 아니한 만 못하게 된다. “회의(會議)를 하면 회의(懷疑)가 생긴다”는 자조 섞인 말이 회자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회의를 잘 할 수 있을까? 회의를 잘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려는 자세보다 주님의 뜻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안타까운 일은 회의를 앞두고 “이번에는 누구를 임원으로 밀자, 이 안건은 이렇게 처리하자”는 등등의 이야기를 하면서 여론을 조장하거나 작전을 짜서 회의에 참여하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장(場)인 회의를 자기 뜻을 관철시키는 수단으로 만드는 매우 경망된 행위이다. 애당초 주의 뜻을 묻고자 하는 마음은 없이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는 사람들이 회집한 모임에는 주님의 뜻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러므로 회의 참여자는 자기 뜻을 고집하기보다 주님의 뜻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신중하게 살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하기보다 듣기를 먼저 해야 한다. 그렇다고 회의 내내 입을 다물고 있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회의석상에서 만큼은 침묵은 금이 아니다. 회의란 단지 동의하는 사람을 찾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주의 뜻을 찾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의에 참여한 자들은 주께서 자신을 통하여 말씀하실 수 있음을 기억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야 한다. 그리고 의견을 개진할 때는 처음부터 자신이 발언하고자 하는 바가 동의안인지, 찬성 혹은 반대 발언인지를 분명히 할 뿐 아니라 의사 결정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목적에 맞게 발언해야 한다.

   간혹 동의와 재청에 이어 가부를 물어 최종 결론을 내는 기본적인 회의 형식에 맞지 않게 자기주장만을 되풀이함으로 참여자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일들이 발생한다. 이런 때에는 회의를 진행하는 의장이 지혜롭게 통제해야 한다. 의사 진행에는 부드러움과 재치도 필요하지만 단호함과 적극적인 제지도 필요하다.

   특히 의장은 표결에 참여하는 이들이 왜곡되거나 편향된 정보를 가지고 표결에 참여하지 않도록 어느 한 편의 주장만 계속되도록 방관해서는 안 되고, 소수 반대 의견을 가진 이들도 용기를 내어 발언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올바른 회의를 위해서는 회의의 성격을 파악하고 회의의 목적에 충실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단 총회 회의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헌법 제17장 6조 2항과 6항에 의하면 총회는 헌법을 해석하고 노회에서 헌의한 교리문제를 해명하는 일에 수종들어야 한다. 총회 때마다 제기되는 이단 문제도 이런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교회사 안에 나타난 이단과 정통’이란 책의 저자인 헤롤드 브라운(Harold O.J. Brown) 박사는 “신학은 이단에 대한 반응이고 이단은 진리에 대한 반응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총회는 이단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는 것을 진부하거나 고리타분한 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절대 진리를 강조하는 기독교의 독특성 때문에 기독교 안에는 이단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단논쟁이 길어지면 교회 화합이란 명분을 내세워 문제를 얼버무려 넘어가려 하고, 심지어 “회의는 가능한 한 빨리 끝내고 친목을 도모하자”며 타박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이것은 신학에 봉사하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는 총대의 직무 유기다.

   그레샴 메이천(J. Gresham Machen)은 “교리에 대한 무관심주의는 신앙의 영웅을 만들지 못한다”고 하였다. 오늘날 칼뱅과 루터와 같은 뛰어난 신학자나 교부 폴리캅과 같은 믿음의 영웅이 나오지 않는 것은 교리에 대한 무관심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사도들과 개혁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수많은 회의를 통해서 놀랄만한 신학적 업적을 만들어 내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첫 번째 총회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 공회는 신학적 논의를 위해 회집되었으며, 회의에 참여한 총대들은 지교회에서 겪고 있는 그릇된 가르침으로 인한 혼란을 해결하는 일에 기여하였다.

   예루살렘 공회에서 내려진 결정은 각 지교회로 전달되었고 예루살렘 공회가 내린 결정으로 인하여 교회의 수가 늘어나는 부흥의 역사가 나타났다(행 16:5). 이것은 교회 회의가 교회 성장의 걸림돌이나 방해물이 아니라 도약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따라서 회의 참여자는 각종 회의를 통하여 교회 선교와 성장에 유익을 주는 활발한 신학적 논의가 이루어지고 주의 뜻에 맞는 선한 결정들이 내려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회의를 통해서 회의(懷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과 위로를 얻고 진리가 판명하게 드러나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

   주여! 저희들이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당신의 말씀을 알아듣게 하시고 당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하소서!(렘 2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