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강좌| 예수하나님의 사랑(요 3:14-16)에 관한 바른 이해_이복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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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요 3:14-16)에 관한 바른 이해

<이복우 목사, 합신 신약신학 교수>

 

 

하나님은 대속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고 우리를 사랑하시되 값싸게 사랑하지 않으셨으며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시는 가장 비싼 값을 치르셨다.

 

신자가 받은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보다 못한 것이 아니며 신자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과 동일한 것으로 영생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의 삶이며 신자 안에서 그리스도의 삶이다.

 

 

   요한복음 3:14-15과 함께 16절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을 준다.

16절을 14-15절과 함께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이 둘이 “왜냐하면”이라는 이유의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 둘 모두 “이처럼”이라는 말과(아쉽게도 대부분의 우리말 성경에는 이 말이 빠져 있다)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내용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신 방법과 이 사랑의 결과와 목적이 무엇이며, 또한 이 사랑의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1. 사랑의 방법 : “이처럼”

 

   본문은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방법에 대하여 알려 준다.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처럼’이 하나님의 사랑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이 아들을 주실 정도로 무한한 사랑을 하신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처럼’을 사랑의 분량으로 생각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많이, 이만큼,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처럼’은 본문에서 방법을 나타내는 의미가 더 강하다. ‘이처럼’은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또는 ‘이러한 방법으로’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14절에 의해서 쉽게 확인된다.

   아쉽게도 우리말 성경에는 14절의 상반절과 하반절 사이에 ‘이처럼’이라는 단어가 빠져 있지만, 원문에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이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로 되어 있다. 여기서도 ‘이처럼’은 정도나 양이 아닌 방식을 의미하는 것이 확실하다. 이 사실은 ‘이처럼’을 빼고 그 자리에 정도나 양을 나타내는 말을 넣어 읽어보면 금방 드러난다.

   먼저 정도를 의미하는 말을 넣어 읽으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그 정도로’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가 된다. 또한 양을 뜻하는 말을 넣어 읽으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그렇게 많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가 된다. 이 둘 다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방법의 의미를 넣어 읽으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가 된다. 이것은 의미가 아주 잘 통한다.

   따라서 한 절 다음인 16절의 “이처럼”도 정도나 분량이 아니라 방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인접 구절에서(14, 16), 그것도 같은 내용을 말하는 인접구절에서 같은 단어로 다른 의미를 나타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해석에 따라 14절과 16절을 다시 읽으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인자가 들려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방법으로’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는 말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었던 바로 그 방식으로 사랑하셨다(민 21:4-9).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길을 돌아가는 것으로 인해 마음이 상하여 하나님과 모세를 대항했다. 이에 하나님은 맹독성 불뱀을 보내어 그들을 물게 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기도할 것을 요청했고, 하나님은 놋으로 불뱀의 형상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게 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쳐다보는 자로 즉시 살게 하셨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지은 죄에 대한 죽음의 형벌을 그들에게서 거두어 장대 끝에 달린 놋뱀에게 몽땅 다 쏟아 부으신 것이다. 이것은 대리 속죄의 원리를 잘 보여 주는 것으로서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방법이다. 그리고 인자가 바로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십자가에 들리셨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에 대하여 매우 강조한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부른다(요 1:29, 36). 예수님은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말씀하셨다(요 12:32-33). 예수님 한 분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예수께로 이끄는 죽음이다(참조. “…을 위하여”, 요 6:51; 10:11, 15; 11:49-52; 15:13; 18:14).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방법이다.

  1. 사랑의 결과 : “그래서”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 방법으로 사랑하셨다고 말씀한 다음에 “그래서”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결과로 예수님을 주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주심으로써 자기의 사랑을 실행에 옮기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환상이나 공상적인 것이 아니요 말로만의 사랑도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을 나타낼 방법을 생각하셨고 또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행하셨다. 그것은 바로 독생자 예수님을 내어 주시어 세상의 모든 죄를 그 한 몸에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들리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대속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값싸게 사랑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시는 가장 비싼 값을 치르셨다.

  1. 사랑의 목적 :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이렇게 사랑하신 목적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믿는 자 멸망에 이르지 않게 하며,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러면 영생은 무엇이며 또 그것은 어떻게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일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신 속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요 5:26). 하나님은 생명을 본유적으로 소유하고 계시는 영생의 진원지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생명을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주어 그분 속에 있게 하셨다.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 6:25).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소유하시며 그 자신이 참된 생명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생명의 떡이다”(요 6:35, 48)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요 11:25; 14:6). 나아가서 예수님은 이 생명을 믿는 자에게 주신다(요 4:10, 14; 6:27, 51).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요 10:28; 17:2).

   결국 아버지의 생명이 예수님을 통해 역사 속에서 믿는 자에게 주어진다. 아들이 아버지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처럼 신자도 아들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요 6:57). 그런데 예수님은

신자에게 생명을 주시되, 자신의 생명을 쪼개어 분배하는 방식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신자를 하나님께 연합시킴으로써 생명을 주신다.

   신자가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것은 생명의 물리적인 분배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자가 생명의 원천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이루어진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신자의 완전한 연합과 이를 통한 하나 됨이 이것을 잘 증거한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참조. 요 17:21, 23).

   신자가 생명을 얻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하나 됨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에 소속되고 연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의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 그 자체를 공유하는 것이다(참조, 요 15:5의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 바로 이러한 하나님과 신자의 생명 공유성 때문에 신자는 영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의 본질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영생이신 하나님과 아들에게 연합된 ‘관계’를 의미한다. 영생은 시간적인 것을 넘어 관계적인 것이다.

   이처럼 믿는 자는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연합된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공유한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주신 생명은 하나님과 예수께서 소유하시는 바로 그 생명이다.

   신자가 받은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보다 못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생명과 질 다른 것도 아니다. 신자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과 동일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영생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자의 삶이며, 신자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삶이다(요 15:5; 갈 2:20; 엡 1:13-14).

   이러한 하나님과 신자의 생명의 동일성은 신자가 소유한 생명의 영원 불변성을 보증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영원히 존재하시듯이 하나님과 연합된 신자도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소유하였기에 하나님처럼 영원히 산다.

   하나님의 생명이 영원한 생명이기에 신자의 생명도 영원한 생명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은 것은 절대로 무효가 되거나 번복될 수 없으며 무름도 없다.

 

 

  1. 사랑의 대상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에 대하여 말씀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 본문이 말씀하는 세상은 넓게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만물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그 핵심은 인간이다. 왜냐하면 15절과 16절에서 “믿는 자”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세상 사랑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이 동반된다.

 

 

1) 비참하고 무가치한 자를 사랑하심

   하나님은 무가치한 인간을 사랑하셨다. 이것은 요한복음이 말하는 인간의 상태를 조금만 살펴보아도 금방 확인이 된다. 사람들은 어두움에 빠져 있어서(요 1:5; 참조. 요 9:39) 그리스도를 깨닫지도 못하며(요 1:5) 알지도 못하고(요 1:10) 영접하지도 않았다(요 1:11).

   니고데모는 세상적인 지식과 지위에 있어서 최고의 자리에 있던 사람이었지만 거듭남에 대하여 알지 못했다.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은 땅의 것에 집착하는 반면 하늘의 것을 알지 못했다. 이는 인간의 연약함과 타락을 잘 보여 준다(요 4:1-42).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을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비참한 인생들을 사랑하신 것이다.

 

 

2) 자발적인 사랑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동기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은 단지 죄인이며 연약하고 비참할 뿐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렇게 비참한 인간을 위해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에게 사랑받을 만한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유발시킬만한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철저히 자발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 유일한 동기와 근거는 오직 하나님 자신 안에 있다. 우리 안에 구원의 근거가 전혀 없듯이, 우리 안에는 사랑받을 어떤 근거도 없다. 그래서 구원이 우리 밖에서 오듯이 사랑도 오로지 우리 밖에서 오는 것이다.

 

 

3) 가치창조의 사랑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아무런 자격도 없고 가치도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참된 가치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무가치한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게 된다.

   무가치한 인생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되고 하나님과 한 생명을 공유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신자는 참으로 존귀한 자일 수밖에 없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의 사랑은 가치 창조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 가치를 인식하는 사랑이 아니라 인간 가치를 창조하는 사랑이다. 무가치한 인생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참된 가치를 가진 존귀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