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문화관 / 교회 중심성의 재발견
< 민현필 목사, 새순교회 부목사 >
“개혁주의 문화관의 풍성하고 다양한 유산들을 만날 수 있어”
신학은 그 신학이 태동하게 된 시대적 배경뿐 아니라, 그것을 수용하고 소비하는 주체들이 처한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다양한 함의를 갖게 된다.
한 때는 유행하던 신학이 한 세대가 지나면 진부한 것으로 드러날 때도 있고, 과거에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신학이 재조명되기도 한다. 그것은 진리의 상대성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 능력이 가진 한계성 때문에 발생하는 부득이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런 특성 때문에 신학은 어떤 면에서 역사적이면서 동시에 인문학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신학사의 뒤안길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해줄 뿐 아니라, 우리를 좀 더 분별 있는 성찰의 길로 안내해주는 좋은 길잡이와 같은 책이다. 저자는 개혁주의권의 대표적인 문화 신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카이퍼와 스킬더, 그리고 반드루넨, 다우마를 중심으로 어떻게 신학이 당대의 컨텍스트와 조우하면서 변천해 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책이 가진 최고의 미덕 중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개혁주의 문화관의 그리스도 중심성, 교회 중심성을 다시 한 번 새롭게 재조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재윤 교수가 인상적으로 부각시킨 ‘개혁주의 문화관의 교회 중심성’은 여러 가지 차원에서 의의를 갖는다. 예를 들면, 최근 <하나님 나라의 비밀>(스캇 맥나이트)이라는 책이 출간된 이후로 페이스북 상에서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 교회와 문화의 사이의 관계에 관한 열띤 논쟁이 있었다.
그 책에서 스캇 맥나이트는 아브라함 카이퍼를 해방신학의 원류로 규정하면서 이런 시도가 ‘사람들을 교회에서 빼어냄으로써 교회를 탈중심화’시키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한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 나라의 사명’은 곧 ‘교회의 사명’일 수밖에 없음을 논증하면서 상당히 래디컬한 자신의 재세례파적 입장을 천명했다.
물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사회봉사나 인권운동과 같은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일과 등치시키는 오류를 지적한 부분은 공감할 만하다. ‘교회의 신실한 현존’ 없이 어떻게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그것은 필연적으로 교회를 통한 사역일 수밖에 없다. 또, 지역 교회의 일상 속에서 서로 교제하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일구어 나가는 평범한 삶의 비범성을 풍성하게 드러낸 점 또한 스캇의 공로 중 하나다.
그러나 김재윤 교수는 ‘개혁주의 문화관’의 다양한 유산들을 소개하면서,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반은총론이나 변혁주의에 대한 비판이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며, 그 대안이 꼭 재세례파적인 입장으로만 귀결될 필요는 없다는 것을 ‘행간의 메시지’를 통해 지적한다.
스캇처럼 카이퍼를 비판했던 같은 개혁주의자인 스킬더에 의하면, 신칼빈주의자들이 추구했던 문화변혁의 비전이 꼭 일반은총론을 기반으로 한 카이퍼주의로만 한정되지도 않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회복된 ‘문화사명’을 이어받은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음을 지적한다. 또, 스킬더는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삼중 직분이 교회를 통해 이루어져 나가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는 일방적으로 스킬더의 손을 들어주기보다는, 두 사람이 처한 시대적 상황이 전혀 달랐음을 지적하면서 카이퍼의 공헌을 인정한다. 다시 말해, 카이퍼는19세기 말의 발전과 진보의 시대를 살았던 신학자로서, 겉보기에는 기독교가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는 듯 보이는 세상을 살았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은 이미 프랑스 혁명 이후에 본격적으로 태동한 이성주의, 자유주의였음을 보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근대적 자유가 당시 유럽 사회를 오히려 ‘획일성’의 늪에 빠뜨리고 있음을 간파했다. 따라서 카이퍼는 이 근대주의에 대한 ‘대안적인 삶의 체계로서의 신학’이 필요함을 절감하면서 ‘일반은총론과 영역주권’ 개념을 주장했던 것이다. 물론 저자는 이 영역주권 개념이 당시 네덜란드 교회의 상황과도 밀접하게 연결된 개념임을 지적한다.
하지만 스킬더는 1,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신학자였다. 스킬더가 보기에 죄로 인해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고 회복하실 유일한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었다.
또 스킬더는 아무리 훌륭해 보이는 문화라 할지라도, 그것은 원래 주어졌던 은사들을 ‘도둑질하여 실행한’ 것에 불과한 것이며, 그것은 본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문화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말한다. 문화와 관련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문화명령이 주어지지만, 그것을 원래 주어진 의미대로 수행하는 사람들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듯이 스킬더가 문화변혁을 거부하고 반문화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식의 견해를 일축한다. 오히려 스킬더는 카이퍼를 비판적으로 수용했던 것이다.
스킬더가 문화변혁에 대해 얼마나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는 그가 바르트의 탈정치적이고 탈문화적인 신학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는 점이다.
스킬더에 의하면 바르트의 ‘극단적인 그리스도 중심성’이 젊은 청년들로 하여금 분별을 잃게 만들어 급기야 나치주의의 협력자들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바르트주의자들은 이러한 스킬더의 비판은 지나친 것이며, 오히려 스킬더가 더 권력 지향적이라고 일축한다.
그들에 의하면 나치의 상황에 직면했던 바르트에게 탈문화, 탈정치적 입장은 곧 나치에 대한 저항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바르트주의자들의 변론은 일면 정당하게 들린다. 하지만, 스킬더의 지적 또한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이 외에도 이 책은 다우마나 반드루넨 같은 최근의 학자들의 대안적인 작업들도 소개하는데, 이 부분도 흥미롭다. 필자가 보기에 저자의 궁극적인 의도는 독자들이 특정한 신학적 입장을 지지하거나 선택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기보다는, 개혁주의 문화관의 풍성하고 다양한 유산들을 산책하면서 독자들을 좀 더 분별 있고 신중한 신학적 사색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구체적인 언급은 하고 있지 않지만 행간에 개혁주의 문화관에 대한 비판적 논의와 최근 학자들과의 대화의 흔적과 이를 반영한 성찰들이 엿보여서 좋았다. 아마도 기독교 세계관 논의에 있어서는 또 하나의 필독서가 될 것 같다.
특히 스킬더를 재발견한 것은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은 큰 소득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