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규칼럼| 성자 그리스도와 인간 존재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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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 그리스도와 인간 존재 이해

< 김영규 목사 >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그리스도인들은 세계를 지탱해 나가는 힘으로 존재하고 있어야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을 받을 그릇들로 창조되었다. 피조세계 안에 깊게 있는 임의성이나 자유성은 그 그릇의 신비를 상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선물은 구별이 되어야 한다. 곧 사람이 은혜로운 마음을 가지고 은혜로운 행위들을 나타낸다고 해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실체적 속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그런 속성이란 하나님의 실체와 함께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실체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자 하나님이 택자들을 위한 직분으로서 그리스도라는 직책을 얻어 시간상에 인간이 되었을 때조차도 하나님으로서 동시에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실체적인 속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 자체를 나타내신 일이 아닐 수 있다는 인식이 생길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으로서 성령 하나님의 실체가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심으로 인하여 계시되는 경우에서나 그런 거하심에 의해서도 그 실체적 속성으로서 성령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신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나 보이는 세계 및 그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존재하는 것으로서 기능들이 나타나고 서로 간에 지각이 된다고 해서, 그렇게 나타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가감을 일으킬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선물들 사이는 분명히 구별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모든 창조된 세계란 하나님의 선물들에 불과하되, 하나님의 은혜를 그대로 담을 수 있는 그릇들도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자연스러운 깨달음도 생긴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곳에 그런 실체적 한 속성이 다른 모든 실체적 속성들과 분리되거나 나누어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선물로서 피조물 안에 그런 실체적 속성들이 축약이 되어 충분히 나타날 수도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을 통하여 인간의 말로 표현하실 때, 어떤 것을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성경에 자주 표현하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전한 하나님과 완전한 인간으로서 인간에게 요구되는 완전한 자의 이상이 표현되었을 때, 거기에는 하나님의 모든 실체적 속성들도 가감이 없이 표현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처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창조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닮아 가는 역사들이 세계 안에 계속 진행이 된다고 해도, 그런 역사들이 하나님의 명령 혹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마치 없는 것으로부터 창조되는 그런 방식에서 이루어진 역사로서 하나님의 은혜가 극대화된 역사로 이루어지고 있는 한, 어떤 인간도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히 동일하게 완전한 하나님과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 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선물들은 분명히 구별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완전한 인간이 되시기를 포기하지 않는 완전한 하나님과 완전한 인간이 되신 일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적어도 주후 2세기 이후에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서 독생자(unigenitus)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먼저 된 자(primogenitus)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확고히 구별해 왔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하나님의 아들들의 총화나 교회의 충만으로서 그리스도의 충만이 이루어지는 역사 없이도 독생자로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실체적 속성들을 영원히 발휘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셨고 계신다는 점에 그 구별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는 실제적으로 이런 구별점이 없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자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형체들로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자들이 되는 일이 역사로서 성취되는 일이라면, 독생자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하나님의 모든 실체적 속성들을 발휘하시는 먼저 된 자로 계신다는 것 자체와 별개로 하나님의 선물 혹은 하나님의 은택으로서 하나님과 같은 속성들을 발휘하는 그리스도와 하나된 자들은 그것과 구별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다르게 신자들은 긍휼의 그릇들, 하나님의 나라의 열매들을 맺는 자들, 성령의 열매들을 맺는 자들, 혹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옷을 입은 자들 등으로 구별되어 소개되고 있다. 지금 세계 안에 희망이 있다면, 하나님의 선물로서 그런 자들이 계속 등장하였고 등장할 여지가 남아 있는 세계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같은 선물로서 자연 속에 꽃이 있고 열매가 있으며 거기에 어떤 아름다움이 있다면, 또 다른 선물로서 하나님의 형상의 속성들을 발휘하여 열매들을 맺어 그 향기들을 나타내는 인간들의 삶에 대한 아름다움이 그 비유의 실체로서 있다는 점이다. 그런 관점에서 그렇게 높은 이상이 있는 세계를 그 이상대로 아름답게 꾸미거나 가꾸지 못한 것에서 사회나 세계의 불행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이상을 향해서 세계는 분명히 아름다워야 한다. 역으로 그런 이상적 아름다움이 구현이 되지 못한 곳이나 사회에는 문화와 예술이 있어도 실제적으로 그것들이 지향하는 화려함이나 아름다움이 거기에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한 구석에서라도 그런 아름다움을 구현하면서 살아가야 할 주체로서 세계를 지탱해 가는 힘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