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신학과 설교 딤후 3:10-4:5
< 김병훈 목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
본문의 말씀을 통해 상기하고자 하는 교훈은 설교자란 어떠한 자이며 설교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 명령의 무게: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예수 앞에 설 것을 기억하라
먼저 설교자란 명령을 받은 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딤후 4:2) 하셨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5)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명령의 권위와 엄중함의 무게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1절에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라 명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장수가 부하 병사에게 명령을 주는 듯한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자들에게 아주 확실하게 설교자로서의 직무를 다할 것을 밝히 명령하십니다. 사도의 말씀은 마치 이와 같습니다: “알고 사역의 부름을 받은 것 아니냐?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또한 이 세상을 그의 뜻대로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이 되면 심판하실 것이니, 그 날에 산 자들이나 또 그 날에 이미 죽은 자들이나 모두 심판을 받을 것이다. 설교자들이여 기억하라, 그의 나라가 임할 때 여러분들이 어떠한 심판을 받을 것이지 기억하라.”
이렇듯이 무거운 명령을 받은 설교자는 설교 사역을 가볍게 대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마지막 날에 주님을 뵐 것을 정말로 믿는다면, 그 날에 명령을 가볍게 여길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또한 확실히 믿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설교자를 향한 명령의 권위가 이러한 만큼, 설교에 목숨을 걸라고 명하십니다. 그 목숨은 이 세상에서 사는 잠깐 동안의 목숨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영원한 생명을 걸라는 압박의 무게로 명령을 하십니다.
이보다 엄숙하며 장엄한 명령이 있겠습니까? 이 세상의 어떤 일이 이보다 더 크고 무거운 책임을 요구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절대 명령입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는 명령이며, 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명령을 받는 자의 존재 목적을 결정하는 명령입니다.
- 설교자의 상황: 바른 교훈을 전하라. 그러나 사람들이 많이 따를 것으로 생각하지는 말라
하나님을 거역하는 반역의 시대에 설교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딤후 3:4-5)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며, 세상에서 환영을 받기는커녕 배척과 위협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자가 겪을 환경이 이러할 것임을 미리 아시며, 또한 충분히 알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며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눅 10:1-3)고 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는 상황 가운데로(딤후 4:3-4) 설교자들은 보냄을 받습니다.
설교자의 상황은 어려울 것이지만, 그것은 사람들에게 바른 교훈을 전하기 때문에 겪게 되는 어려움입니다. 만일 바른 교훈을 전하지 않고, 또한 사람들의 사욕에 비위를 맞춘다면, 결코 겪지 않아도 되는 어려움입니다. 따라서 본문이 3-4절에서 교훈하는 바는 환영을 받기를 기대하지 말고, 바른 교훈을 전하기에 힘을 쓰라는 것입니다.
바른 교훈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딤후 1:13)에서 보듯이 사도에게서 들은 말씀, 곧 복음의 교리입니다.
디모데에게 명하면서 상기시키고 있는 바울 사도가 행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를 들어 사도행전 17장 2-3절에서 보듯이 다만 성경을 풀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오직 성경을 강론하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강론하는 것, 이것이 진리를 전파하는 바른 교훈이며, 또한 거짓교사를 분별하는 가장 핵심적인 기준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강론하는 설교자에게 “어찌하여 당신은 우리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여 우리의 마음을 곤란하게 하며, 우리를 잘못되었다고 하는가? 우리가 듣고자 하는 말들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여 가르치는 선생이 얼마나 많은 줄을 아는가? 보라 당신만이 옳은가?”라고 힐문하며 바른 교훈의 말씀에 저항을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청중의 반응과 규모가 바른 교훈을 전하는 설교인지를 판단하게 하는 기준이지 못할 때가 더 많을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너무 경직된 말일까요?
요컨대 사람들이 기뻐한다고 하여 목사는 성급하게 기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충 얼버무리고 세상 이야기나 도덕교훈을 담아 감상적 이야기를 전했는데 반응이 끌려온다면 그것은 은혜를 받을 것이 아닙니다. 듣고 싶은 것을 들어서 나온 반응일 뿐입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설교를 바르게 했는가를 결정짓는 객관적인 기준은 오직 하나님 말씀뿐입니다.
- 바른 교훈을 전하는 설교의 효과와 설교자의 자세
모름지기 바른 교훈을 전하는 설교가 환영을 받지 못하는 까닭은 설교가 일으키는 효과들 때문입니다. 설교를 바르게 하면 경책과 경계의 효과(딤후 4:2)가 나타납니다. 경책하라는 것은 죄를 드러내라는 말씀이며, 경계하라는 것은 죄를 용납하지 말고 그 죄를 꾸짖으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설교가 죄를 꾸짖는 효과를 낳지 못한다면, 그러한 효과를 회피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설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면한 죄인은 누구라도 죄를 상기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바른 설교도 또한 경책과 경계를 줍니다.
그런데 설교가 이러한 효과를 갖는 만큼, 설교자가 자칫하면 정죄하는 자세를 갖기 쉽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위험성을 고려하여, 설교자의 태도에 대해 부드럽게 돌보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권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하라고 명령합니다.
설교자가 전하는 복음은 설교자에게 이미 권하며 오래 참음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딤전 1:15-16), 설교자 스스로 마땅히 그러한 은혜를 입은 자로 성도를 대하여야 합니다.(예, 고전 3:1-8)
- 설교자의 직무: 결과론적인 성공이 아니라 바른 말씀의 선포
설교자가 그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였는가에 대한 판별은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모았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모이는 것은 중요하며 더 없이 기쁜 일이지만, 바른 말씀이 선포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무익한 일입니다. 본문은 설교자가 마땅히 직무를 다할 것을 명령합니다(5절).
설교자의 직무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59에 따르면, 말씀 사역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1)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부지런히 바른 교리를 설교해야 하며, (2) 쉬운 말로 하며, (3) 사람의 지혜로 사람을 끌려고 하기 보다는 성령과 능력이 나타나도록 해야 하며, (4)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낱낱이 충성스럽게 알게 하며, (5) 청중이 무엇을 필요로 하며 받아들일 것인지를 알아서 거기에 자신들을 적응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6) 하나님과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불붙는 사랑을 가지고 열심을 다하며, (7)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음과 동시에 (8) 사람들이 거듭나고 교화를 받아 구원에 이르도록 열심을 다해야 한다.
설교란 성경을 가르치는 것 이외에 다른 일을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보다도 성경은 진실로 특별한 계시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으면 어떠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일을 온전하게 이룰 수가 없으며, 그 결과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도록 할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 설교는 교인들을 죄 가운데서 죽도록 방임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설교에 다른 이야기를 섞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성도들을 세우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것을 섞으면 그것은 설교자의 직무를 바르게 감당하지 못할뿐더러, 더 나아가 성경의 가르침을 훼손하거나 심지어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죄를 범할 우려가 높게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설교가 성경을 풀이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설교가 과연 신앙고백서과 요리문답과 같은 신앙의 표준문서의 교훈에 일치하며, 그것을 반영하고 있는가에 의하여 분별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면 충분하다는 주장을 내세워 만일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과 같은 표준문서들을 무시하는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해석이 성경의 권위를 차지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항상 해석을 통해 읽혀지는데, 신앙표준문서에 의하여 자신의 해석을 통제받지 않기 때문에 결국 자신의 해석이 곧 성경이 되는 매우 잘못된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러한 오류의 전형을 바로 이단에서 봅니다. 설교자가 이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면, 늘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을 익히고, 또한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은 목사의 기본적인 의무입니다. 그리고 설교가 그 가르침에 일치할 때, 비로소 그 교회는 보편교회에 속한 교회로서, 적어도 장로교회에 속한 교회로서 참 교회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가 설교를 바르게 행할 때에라야 교인들에게 바른 태도로 설교를 듣도록 가르칠 수가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문항 160에서 설교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요구할 사항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요구할 것은 말씀을 듣기 위하여 열심을 다하여 준비하고 기도함으로써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들이 듣는 것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검토하고, 진리를 믿음과 사랑과 온유함과 열린 마음을 가지고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묵상하고 참고하며, 마음에 간직하며, 생활 속에서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한다.”
요컨대 교인으로 하여금 성경의 교훈을 알고 그것을 적용하여 열매를 맺도록 하는 일이 설교자가 교인들에게 행하여야 하는 직무인 것입니다.
마치는 말
정암 박윤선 목사의 음성을 다시 들으시기 바랍니다.
교계에는 신학 무관주의의 경향도 적지 않다. 즉 신학은 어떤 형태로 존재하든지 학문이므로 문제될 것이 없고, 실제로 신앙생활만 바로 하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운동에 시비를 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도자의 신학은 그의 신앙과 그의 성경관에 영향을 미친다. 그의 신학이 바르지 못하면 그의 성경 해석이 바르지 못하므로 듣는 자들의 신앙을 무너뜨린다.
신학교에서 배출되는 신학도들이 얼마나 성경을 바로 알고 확신을 가지고 졸업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경성하여 천추에 한이 없도록 해결해야 될 과제이다.
중세 교회가 흑암으로 뒤덮였던 원인을 살펴보면,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관용하고 후원하는 그 기회를 타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 왔는데, 그들을 성경으로 바로 가르치지 못했으므로 교회의 지도자 가운데는 성경에 무식한 자가 많았으며, 심지어는 거듭나지 않은 자들도 넘쳤던 것이다. 영적 무식은 영적 부패를 동반하는 법이다. 중세의 암흑 상태는 세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중세는 암흑시대였다.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사 21:11, 신학정론 2권 1호, 2-3>
정암은 이것이 어찌 중세교회만을 향한 탄식이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오늘 한국교회를 향한 탄식이 아닐 수 없으며, 합신은 이러한 상황에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되묻습니다. 오늘 우리 합신은 어떠합니가?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불쌍히 여기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