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 담긴 은혜
< 배현주 목사, 주교개혁장로교회 >
“성삼위일체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제2장 1항에서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신데 살아 계시고 참되시다”고 진술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아버지 하나님께 마지막 간구를 드리실 때 영생에 대하여서 진술하셨다. 그것은 이러하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예수 그리스도의 간결한 진술에 영생이 무엇인가 드러나 있다. 영생이란 성삼위일체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언약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살아 계시고 참되시기(living and true) 때문이다. 여기에서 살아 계시다(living)는 의미는 모든 생명체가 의존하는 스스로 자충족적이시고 홀로 독립적이신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분이시다. 모든 존재들이 그분에게 의존하는 지존자이시다. 그래서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가 여호와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 내라는 사명을 받았을 때, 다음과 같이 여호와께 여쭈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출 3:13).
그러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그렇다. “여호와”라는 의미는 지존자라는 의미이다.
스스로 존재하여 계시면서 만물이 그로부터 존재케 된 바로 그 존재자이시다. 지존하시고 영존하시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홀로 존재 그 자체로 불리우시기에 합당하시다. 유일신론이란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에 대한 교리적 진술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신다. 그 하나님께서는 불변하시고 무한하시며 영원하신 생명으로 존재하여 계신다. 그러므로 성삼위일체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
존 칼빈은 그가 작성한 “제네바 요리 문답”의 제1문답에서 “인생의 최고의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묻고 그 답변으로 “인생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인생의 최고의 목적이다. 그것이 영생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져가는 삶이 영생의 삶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져가는 삶이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신 목적에 부합하는 삶이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신자들의 생애 최고의 목적이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이다.
인생들이 살아 있음은 그와 함께 동행함이고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 자라가는 것이다. 인생의 최고의 선(Summum Bonum)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를 알아가는 것이 최고의 선을 이루어 가는 삶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장 1항에는 “그는 몸이 없으시고 부분이 없으시다”(without body, parts,)는 진술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한성에 대한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시기에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 몸이 없으시고 부분도 없으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한하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불가해하시다”(incomprehensible)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 계신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하여서 알아가려고 할 때에는 그가 어떠하신 분이신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떠하신 분이 아니신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속성은 인간 편에서 불가해하기에 다만 하나님께서 어떠하신 분이 아니신가를 아는 것이 먼저 중요하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어떠하신 분이 아니신 것을 알게 될 때 그 반대로 희미하게나마 하나님께서 어떠하신 분이신가를 이해할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은 변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불변하신다.” 그렇게 신자들은 변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알아 가게 될 때에, 하나님의 불변성을 희미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한계가 없으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한하시다”고 우리는 신앙으로 고백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무한성은 자연 과학을 통하여서 측량한 우주의 무한성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자연 과학이 측량한 우주의 광대함이란 단지 인간이 우주의 크기를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무한성은 우주의 광대함을 뛰어 넘어 그 우주를 창조하신 분으로서 무한하심이다. 단지 수량적으로 거대한 크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무한성을 상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우주의 광대함조차도 하나님 편에서는 없는 것과 같다. 하물며 우주의 먼지 보다 작은 인간이야 더 할 나위 없다. 그 무소부재하시고 편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주의 먼지만도 못한 우리 인생들이란 실로 없는 것과 동일하다. 존재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물며 우리를 구속하신 그 크신 사랑이야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주의 먼지보다 작은 인생들이 자기 마음대로 헛되이 사고하고 자기 멋대로 헛탄하게 행동하는 것은 크나큰 죄악이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오직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긍휼이 있으므로 인류가 진멸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 3:22-23). 그렇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셔서 지금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 크신 은총에 감사할 따름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장 1항에는 “하나님께서는 가장 사랑과 은혜와 자비로우심이 넘치신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어서 “선하심과 진리가 풍성하시다”고 진술한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로우심은 선하심과 진리와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곧 사랑과 은혜와 자비로우심이고 하나님의 진리가 곧 사랑과 은혜와 자비로우심이다.
하나님의 선이 곧 진리이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진리가 풍성하시다. 이것은 신자들의 삶과도 연결 되어있다. 선하지 않는 자는 진리가 없는 자이다. 그것은 원래 하나이기 때문이다. 진리가 풍성한 자는 반드시 선함이 풍성하다. 왜냐하면 선함이 곧 진리이며 진리가 선으로 드러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가 풍성하신 자로서 선하신 행적이 풍성하시다. 참된 신자들은 진리를 자양분으로 하여서 선한 삶을 이루어낸다. 그러한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신자들이 진리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삶 자체가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경배하는 삶의 열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