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에게 있어서 ‘계시록(啓示錄)’의 가치
< 장대선 목사, 가마산교회 >
한국의 기독교에 있어서 오순절운동(Pentecostalism)의 영향은 거의 모든 교단이나 교파를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그렇게 된 것은 이미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올 당시부터 교파적 특색이 점차 신앙의 경험에 치우치는 방향으로의 대대적인 왜곡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적인 성경 해석과 전천년기설(Premillennialism)을 바탕으로 하는 예수재림론은 신사도운동의 기원이기도 한 1940년대 소위 늦은 비 부흥운동(New Order of the Latter Rain)의 경우와 같이 종말론에 대한 큰 왜곡을 불러왔고, 그러한 왜곡 가운데서 요한계시록과 같은 묵시문학은 많은 신자들에게 과격하고 급진적인 두려움의 책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했다.
요한계시록과 관련하여 메이천(J. Gresham Machen, 1881-1937)은 이르기를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소망의 생활이다… 소망을 생생하게 하기 위하여 요한계시록은 미래의 영광스러운 광경을 보여준다… 요한계시록은 때와 기한을 계산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주신 책이 아니고 보좌에 계신 어린 양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책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라고 했다.
신자들에게 요한계시록은 공포의 묵시가 가득한 두려움의 책이 아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계 1:3)에게 복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계 1:2)이다.
한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 카이퍼(Abraham Kuyper·1837∼1920), 도예베르트(Herman Dooyeweerd, 1894-1977) 등 화란의 굵직한 신학자들 및 철학자들에 의해 ‘일반은총’의 강조와 ‘영역주권’등을 바탕으로 이 땅에서의 신자들의 생활에 대한 강조가 한 시대를 선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에게 모든 궁극적인 완성과 안식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대망 가운데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즉 신자들에게 있어 성화의 완성, 즉 ‘영화(靈化)’는 언제나 개인적 종말 혹은 궁극적 종말 가운데서 비로소 보게 되는 믿음과 은혜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대의 신자들에게 있어서 믿음의 영역, 혹은 은혜의 영역에 대한 안목과 이해는 빈약하기 이를 데 없으며, 상대적으로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강한 애착과 만족은 전혀 가시적인 영역 외에는 의미 있게 생각하지 않는 형편에까지 이르렀다.
심지어 말씀의 사역자들도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고난과 시련의 현실 가운데서 인내하는 ‘선비’ 같은 자들이 아니라 한낱 탐관오리(貪官汚吏)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실 일반계시든지 일반은총이든지 간에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서 주어지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특별계시요 특별은총으로서의 성경 외에는 그 어떤 일반적인 것들도 구원과 같은 하나님의 깊은 지식을 전해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과학이나 일반학문이 성경에 접근하는 길을 닦아주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성경을 근거로 하는 신학이 과학과 일반학문이 찾지 못하는 질문들에 답변을 하고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계시인 성경은 하나님의 택자(擇者)들 외에는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과학을 비롯한 일반학문들의 성경에 대한 관심은 결코 구원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미궁(迷宮)에 빠져버리고 마는데, 그것은 성경의 세부적 명칭 곧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이라는 단어에 어느 정도 암시되고 있는 바라 할 것이다.
구약과 신약이라는 명칭은 공히 ‘Testament’로 표기되는데, 이는 유언(遺言)이라는 의미다. 즉 첫 언약의 피와 새 언약의 중보자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그 언약(言約)이 유언의 효력을 발휘하는 의미가 구약이든 신약이든 공히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비가시적인 믿음의 영역 가운데서 그 택하심을 따라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히 9:15)하시는 새 언약의 중보자의 유언을 효과적으로 적용하시는 “영원하신 성령”(히 9:14)의 역사와 지도는 언약백성에게만 매순간 공급되는 은총의 진정한 국면이다. 그러므로 택자들 이외에는 성경이 교양을 넓히는 근거가 될 뿐, 구원에 관한 참된 지식을 전달해 주는 바탕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언약(구약과 신약)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많은 경우에 ‘Covenant’로만 생각하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흔히 본다. 마치 히브리서를 기록할 당시에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유대인(히브리인)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을 불쌍하고 어리석게 보면서 율법의 행위와 제사의 행위를 종용했었던 것처럼, 언약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쌍방의 계약이요 우리 편에서의 행위를 조건으로 해서 비로소 성립하는 계약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 언급하는 언약(διαθήκη)이라는 단어에는 ‘Covenant’만이 아니라 ‘Testament’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으며, 특별히 히브리서에서는 Testament의 의미로서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을 언급하며 공히 언약을 Testament, 즉 ‘유언’의 성격으로 소급(遡及)하고 있다.
이처럼 히브리서에서 말하고 있는 언약의 개념 가운데서 구약과 신약의 시대를 각각 생각해 보면, 공히 그 실체가 구체적으로 눈앞에 실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서 조망되어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즉 구약백성들은 예표(豫表)가운데서 믿음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구속을 바라보았고, 신약의 백성들은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영원한 기업에 대한 ‘약속’을 바라본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의 묵시적인 영광의 미래는 부르심을 입은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단적인 소망의 예시(豫示)가 된다.
메이천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설명 가운데서 “우리는 시련 가운데서 혹은 단조로운 일상들 가운데서 우리에게 있는 소망을 상실할 위험에 항상 직면해 있다”고 하여, 미래의 영광스러운 광경을 보여주는 요한계시록의 유용함을 말한다.
요한계시록은 회피할 두려운 책이나 당장의 실현을 조급하게 서두르도록 하는 조바심을 부르는 책이 아니라,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이미 족한 비전(Vision)의 책이라는 것이다.
물론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 22:20)는 말씀을 당장의 현실에 적용하는 폐해(弊害)가 흔할지라도, “주 예수의 은혜”(계 22:21)는 유언을 효력 있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편에서 베푸시는 것으로서 명백하고도 분명하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놀랍게도 이 말씀은 신약이 아니라 구약성경 합 2:2-3의 말씀이다.
나아가 4절에서는 이르기를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기록하고 있으니, 어찌 우리가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계 1:8)의 때를 대망(大望)하지 않겠는가? 하박국서와 요한계시록 사이의 ‘성취’(예수 그리스도의 구속)를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현대의 신자들에게 요한계시록이 멀리 있는 두려움이 책으로 되어버린 것은 그만큼 진정한 은혜와는 멀고 현실의 복락에 치우쳐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으로서, 이는 요한계시록에 있는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이라는 마지막 구절이 교훈하는 바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성경의 마지막은 바로 ‘은혜’, 즉 유언을 효력 있게 하신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혜다. 우리들의 그 어떤 수고와 노력과 헌신과 열정도, 그 너머에 있는 은혜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요한계시록은 그 너머에 있는 은혜를 공급하고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