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를 넘어 공유의 섬김으로…’_변세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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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를 넘어 공유의 섬김으로…’

< 변세권 목사, 온유한교회 >

 

그리스도와의 수직적 연합의 관계가 이루어진 사람은 교회 안에서 지체와의 수평적 연합관계를 반드시 이뤄야

 

 

새해가 되면서 나 자신이나 교회가 새로운 사명과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야 되겠다고 결심했다. 설날도 지났으니 이제 더 머뭇거릴 수도 없다. 그것은 개인의 소유를 넘어 우리 모두가 공유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제는 진정으로 이러한 삶을 살 때가 되었다.

구약과 신약의 총체적인 뜻은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느냐, 그렇지 않고 떡으로 사느냐의 문제이다. 출 16장이나 고후 8, 9장의 교훈은 우리의 삶을 평균케 하는 원리가 되고, 이것은 공유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

칼빈의 교회론에서 그리스도와의 수직적 연합의 관계가 이루어진 사람은 지체와의 수평적 연합관계를 반드시 이루는 것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섬김의 오묘한 연합이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일반적으로 세상의 정신세계는 물질문명의 척도에 따라 타락하는 법인데, 신자의 삶은 이렇게 차이가 난다. 이런 공유하는 삶은 교회 공동체의 지체의 연합적인 삶이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낼 때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공유주의를 제도화하자는 말이다.

필자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는 것을 전제로, 물질을 주신다는 것을 감히 단언하는 바이다. 사실 교회 안에서는 부의 불균형 문제가 있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서 신자가 당하는 고난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불치의 병으로 이것은 하나님이 이제는 그만 데리고 가시겠다는 명백한 섭리이다. 그분의 은혜의 긍휼에 맡길 수밖에 없다. 또 하나는 경제문제이다. 교회 안에서 지체가 어려움을 당할 때 함께 나누고, 함께 살 수 있을 때 그 신자는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면에서 칼빈은 “부자들의 의무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데 있다”고 했다. 신자가 혼자만 잘 살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는 텅 빈 생활인 것이다.

칼빈은 역시 그의 주석에서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공평과 균형이 있기를 원하신다. 즉 사람은 아무도 너무 많이 갖거나, 필요한 것도 가지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자기 자신의 정도에 따라 궁핍한 사람을 위해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한다”고 했다.

앙드레 비엘레도 “만일 교회가 정말 이 가르침을 중요하게 여기고 제대로 실천했다면 공산주의자들이 이 근본적인 성경의 사상을 기독교 종교에서 떼내어 자기들의 유물론적, 전제주의적 견해에 접목시키는 일은 결코 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교회 안에서의 빈부의 격차를 교회의 질서로 보았다.

엔드류 카아네기도 “어느 정도의 부가 쌓이면 그것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라고 했고, 에릭프롬도 “물건과 소유에서 행복을 찾지 말고 존재에서 찾으라”고 했다.

우리 개혁주의 신학은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신학이다. 신자의 온전한 거듭남은 풍성한 생명력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플라톤의 행복론도 조금 부족하게 소유하라는 것이다. 행복은 실체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체는 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질은 중용의 도리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는 내세를 바라보고 현세를 지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가 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그분의 진리와 주권으로 하나님의 뜻을 더불어 함께 담아낼 수 있게 된다.

진정한 노후대책이란, 더더욱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는 일 밖에 달리 있을 수 없다. 우리 자신이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망각하면서 사는 인생처럼 어리석고 가련한 인생도 없다. 지금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가 소유일색의 환경으로 짜여 있어서 소유만 하고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욕망의 기차를 타고 멸망의 역을 향하여 겁도 없이 달리고 있다. 뺄셈의 소유에서, 덧셈의 공유로, 공유지수를 높이는 것이 행복지수가 올라가는 비결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공유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람을 가까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자식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소유로 생각하지 말고 자녀들에게 이제라도 부지런히 공유사상을 가르쳐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자녀나 후대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많은 유산을 물려줘서 자녀들이 행복한 것이 아니다. 소유로 가면 마이너스로 가는 인생이 되지만, 나눔을 실천하는 공유의 삶으로 가면 플러스 인생이 된다. 나누는 일, 공유하는 일, 베푸는 일이 오히려 제일 행복한 것이다.

소유는 순간이지만, 내가 나누는 것에 대한 의미와 보람은 영원하다. 소유는 쾌락은 있어도 보람은 없다. 보통은 자식에 관한한 우리의 소유욕은 하늘을 찌른다. 이것부터 고쳐나가야 한다.

서로의 환경이 서로에게 도움을 줘야 한다. 우리는 다 가졌는데 왜 행복해하지 않는가를 고민하고 결단할 시점이 되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기독교 경제관과 사회관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통장에 플러스가 되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하는 그 태도와 생각을 바꿔서 많이 나누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서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밝혀갈 때 행복한 삶이 되는 것이다.

이웃을 돕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어디서도, 언제라도, 무엇에서도, 누구에게서도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르냐를 염려하지 말고 종교개혁의 상속자들과 그 후예답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신실하며 역사의 흐름을 이어받아야 한다. 

이것이 개혁교회 신자다움이요, 우리의 조국과 기독교 세계 전체를 위해 할 수 있는 공헌이며, 인류에게 궁극적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봉사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