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페르니쿠스적 전환

0
2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장홍태 목사_경북노회 새비전교회, GBT 선교사

우리말에 ‘문 닫고 나가라’처럼 곰곰이 생각
하면 어딘가 어색한 표현이 있다. 국어학계는
이 경우 연결어미 ‘~고’가 반드시 시간의 선후
를 뜻하지는 않는다며 꽤 진지하게 이 표현을
구제해 왔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우리는 말
이 안 되는 소리도 하며 살아가는 다소 어리
숙한 존재라고 인정하는 편이 더 빠르지 않
을까? 이해하기 쉽자고, 기억하고 강조하기
편하자고 어떤 것을 앞에 두고 크게 세우는
일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습성이다.

문제는 이러한 편의에 기대어 형성된 언어
습관과 사고방식이, 어느 순간 스스로를 ‘진
실’이라 주장하며 터줏대감처럼 군림할 때
다. 사실은 그렇지 않음이 드러나도 “옛날부
터 늘 그래 왔다”는 말 한마디로 정통과 전
통, 보수의 외피를 둘러쓴다. 그래서일까. 실
험적 증거 앞에서는 기존 가설이 즉각 무너
질 것만 같은 과학의 세계에서도, 새로운 증
거는 종종 기존의 세계관과 전통, 권위를 지
키려는 관성에 부딪혀 거부된다. 20세기 과
학철학을 바꾼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
조』(1962)는 바로 그 점을 지적한다. 그가 대
표적 사례로 든 것이 바로 유명한 ‘지동설 논
쟁’이다.

철학자 칸트는 지동설로 세계관을 바로잡
은 코페르니쿠스의 이름을 빌려, 인식론에도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외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석
한 결과, 곧 ‘우리 마음이 그렇게 느끼도록 구
성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
대성이론이 우주를 바라보는 시각에 가져온
대전환 역시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관의 전환이 어찌 물리
학이나 우주론, 철학에만 국한된 문제이겠
는가. 사람이 세계를 대하는 관점을 말하기
에 앞서, ‘세상과 우리’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
적인 관계에 대해 바른 시각을 일깨우신 분
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오병이어 사건 이후
“너희가 구하여야 할 것은 썩을 양식이 아니
라 영원히 있는 양식이다”(요 6:27)라고 하신
말씀이 그러하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겠냐는 질문에 대해, 무엇
을 할까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믿
는 것’이 ‘하나님의 일’(요 6:28~29)이라고 하
신 답변도 마찬가지다. 시선이 잘못되어 엉뚱
한 것을 붙드는 이들, 질문이 어그러지니 정
답에 이를 수 없는 이들을 향한 교정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두 번의 교정으로 완전
히 달라질 만큼 순한 사고의 소유자들이 아
니었다.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또 다른 표
적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가 하나님과 자신들 사이에서 무제한 공급
을 중개하는 모세와 같은 존재가 되기를 바
랐던 듯하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고 전환을
위한 설명은 계속된다. “만나는 모세가 떼를
써서 얻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이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본래 주시려던
영원한 생명을 위해, 그리스도를 ‘생명의 떡’
으로 너희에게 주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이와 같은 ‘생명의 떡’이시라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분을 믿는 것밖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무슨 식인종도 아닌데,
오죽하면 자기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극
단적인 표현으로 당신과의 연합만이 영생에
이르는 길임을 말씀하셨을까. 그래서 그분의
가르침에는 일이 아니라 믿음이, 감각적 인
지가 아니라 당신께 나아오는 인격적 반응이
강조된다. 그 결과로 인간이 무언가를 획득
하는 영생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구원이 전면에 놓인다. 인간이 생각하는 구
원과 하나님의 계획은 이처럼 다르다. 그러
니 믿음조차도 인간의 단단한 수련으로 빚어
낸 ‘사리’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
라 하신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님은 시종일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요 6:37, 39)를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생명의
떡이 되신 이의 사명은 분명하다. “내가 하늘
에서 내려온 것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 그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
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8~39).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그리스도의 역
할을 아는 것은 인간이 깨우쳐야 할 그 어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능가한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는
찬송의 고백처럼 말이다.

이전 기사
다음 기사풍경이 있는 묵상_이정우 목사
기독교개혁신보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의 기관지로서 바른신학, 바른교회, 바른생활이란 3대 개혁이념을 추구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본사는 한국 교회의 개혁을 주도하는 신문이 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