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67_사선에 선 목회자: 황금의 입, 끌로드_조병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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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에 선 목회자: 황금의 입, 끌로드

제공: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대표 조병수 박사) 경기 수원시 영통구 에듀타운로 101

 

쟝 끌로드(Jean Claude, 1619-1687)는 아젱(Agen) 인근의 마을 에서 위그노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 다. 아버지는 아들의 학업 재능을 알아차리고는 몽또방으로 보내 공부를 시켰다. 끌로드는 신학 공부를 마친 후 1645년에 26살의 나이로 목사 임직을 받아 목회를 시작하였다. 아버지도 그의 임직에서 안수하는 기쁨을 누렸다. 끌로드 목사는 1647년이 되자 몽펠리에 근처 작은 마을에서 목회 청빙을 받았다. 그는 이듬해 엘리사벳과 결혼하여 아들 이작 (Isaac)을 낳았다. 후일 아들도 스당(Sedan)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1678년에 아버지의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되었다.

1655년, 끌로드 목사는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님(Nîmes)의 큰 교회에 여러 목회자 가운데 한 명으로 청빙되었다. 비록 님 신학교에서 강의 하지는 않았지만, 설교학과 해석학을 학생들에게 사적으로 가르쳤다. 1661년, 랑그독 지방의 행정관이 가톨릭과 위그노를 재결합시키려고 시도하 였다. 이 문제가 노회에 상정되었는 데, 당시 노회의장을 맡고 있었던 끌로드 목사의 주도 아래 만장일치로 부결되었다. 두 종교가 화해하느니 빛과 어둠 또는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화해하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이 었다. 이 사건은 끌로드 목사가 랑그독 지방에서 추방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끌로드 목사는 이 문제를 탄원 하러 파리로 갔다. 탄원은 실패로 그치고 말았지만, 그사이 새로운 사건이 벌어졌다. 몇 명의 가톨릭 학자들과 격론을 벌여 세간에 일약 유명 인사가 된 것이다. 이 때문에 1662년부터 4년 동안 몽또방에서 임지를 얻었던 끌로드 목사는 거기에서도 추방되
고 말았다.

끌로드 목사는 탄원하러 재차 파리를 방문했지만 허사가 되었다. 그러나 몽또방에서 잃은 것을 파리에서 얻는 일이 일어났다. 1666년, 파리 샤릉똥(Charenton)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은 것이다. 아직 선임 다이예 목사가 목회하고 있을 때, 끌로드 목사가 목회를 시작했다. 그의 목회 초기는 가톨릭의 성찬론을 반박하는 등 가톨릭과 논쟁하느라 바빴다.

1681년에 끌로드 목사는 네덜란드의 흐로닝겐(Groningen) 대학의 신학 교수로 청빙을 받았지만 정중하게 사양했다. 루이 14세의 통치 아래 위그 노에 대한 박해가 가열되고 있는 상황에서 양떼와 함께 남는 길을 택한 것이다. 당시 루이 14세는 용기병을 가동하여 위그노를 가톨릭으로 되돌 리려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끌로드 목사는 여러 사람과 함께 국왕에게 위그노를 위해 탄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1685년, 마침내 루이 14세는 할아 버지 앙리 4세의 낭뜨 칙령을 철회하 였다. 낭뜨 철회로 모든 위그노 목사는 15일 안에 프랑스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샤릉똥 교회가 주일 예배를 한 번 더 드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파리 주교들은 간악하게도 예배 중에 전 교인에게 위그노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할 절호의 기회가 온 것으로 생각했다. 주교들의 속셈을 간파한 끌로드 목사는 전격적으로 주일 예배 회집을 취소했고, 주교 들은 격노하여 끌로드 목사에게 24 시간 안에 프랑스를 떠나도록 명령했 다. 그는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었다.

끌로드 목사는 망명을 떠나기 전에 고별 권면에서 “여러분에게 더 이상
(말씀)의 종들이 없겠지만 (말씀)의 주인이 계실 것입니다”라는 말로 성도들에게 성경에 달라붙으라고 강조 했다. 국경까지 국왕 친위대의 삼엄한 호송을 받은 끌로드 목사는 어쩔수 없이 네덜란드의 덴하그로 발걸음을 옮겼다.

끌로드 목사는 남겨둔 양떼를 생각 하면서 깊은 시름에 빠졌지만, 네덜 란드의 국가원수 빌렘 오라녜의 연금을 받으면서 박해받는 위그노들을 위해 글을 쓰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프 랑스 왕국에서 잔인하게 박해받은 신교 신자들의 비명”라는 책은 영어로 번역되었지만, 1686년 5월 5일에 영국 왕 제임스 2세의 명령으로 원본과 번역본이 공개적으로 불살라졌다. 프랑스 왕을 비방하는 표현을 담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지녔던 4세기 교부 크리소스토무스와 비견될 정도로 탁월한 설교자였던 끌로드 목사는 1686년에 성탄주일 예배 에서 마지막 설교를 전하고 두세 주간 병상에 누웠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