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은 잔악한 학살자였는가?
< 권현익 목사, 프랑스 선교사 >
“카스텔리옹의 주장은 칼뱅을 살상자로 몰고 가려는 반 칼뱅주의자들이 가장 즐겨 인용하는 유일한 참고 문헌”
“칼뱅을 공격하기 위해서 상상력을 동원하여 지어낸 역사적인 서술은 전혀 학문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아”
최근 인터넷 ‘당당 뉴스’는 검증되지 않는 소문을 근거하여 ‘칼뱅은 학살자’라는 내용을 게재함으로써 역사적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칼뱅을 마치 잔악한 학살자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고 있다.
이는 감리교 소속의 운영자들이 인터넷 당당 뉴스를 통해 칼뱅에 관한 감리교의 경향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일고의 가치가 없는 허무맹랑한 내용들이지만 거짓이란 사람들의 귀를 유혹시키며 재빨리 전달되고 증폭되는 것으로, 이제는 칼뱅 학살이 마치 사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인식되는 지경이 될 수 있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역사적 진실을 확인하고자 한다.
- 소위 ‘칼뱅 학살‘의 주장 및 그 주장의 근거
칼뱅의 학살 주장의 진원지는 칼뱅 당시 콜레쥬 드 리브(Collège de Rive)의 교장이었던 카스텔리옹(Sébastien Castellion, 1515-1563 )이다.
그는 목사가 되기를 원하였지만 평소 그의 행실과 신학적 소양으로 인하여 칼뱅과 쥬네브 목사회는 그의 청원을 거부했다. 이에 그는 칼뱅에 대한 반감을 증폭시키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칼뱅이 인도하는 목사들의 성경 공부 모임에 나타나 칼뱅과 목사들을 비방한 죄로 쥬네브 시의회로부터 면직을 당하게 되었고, 생계유지를 위해 자유와 학문의 도시인 바젤로 옮겨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카스텔리옹은 세르베 화형 사건(1553.10.27)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칼뱅을 향한 비난의 소리가 커지자 그 비난에 동승하여 익명으로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
역사 속에 거의 묻혀 있던 이 책은 300년 뒤 유태인 극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가 이를 다시 출판했고 당시 칼뱅을 반대하는 시대적 조류에 편승하여 일약 베스트셀러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책 내용 중 “칼뱅이 통치한 불과 5년 동안에 당시 전 인구가 1만 3천 명에 불과한 쥬네브 시에서 13명이 교수대에서 살상되었고, 10명이 목이 잘리고, 35명을 화형시키는 끔찍한 범죄들을 벌였다”는 카스텔리옹의 주장은 칼뱅을 살상자로 몰고 가려는 반 칼뱅주의자들이 가장 즐겨 인용하는 유일한 참고 문헌이다.
이처럼 근거 없는 카스텔리옹의 이 글을 한국에서 심상용, 조찬선 등이 수용하여 반 칼뱅주의의 선봉장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들이 목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카스텔리옹보다 더 많이 인용되어 인터넷에 칼뱅 살상이라는 이름으로 돌아다니고 있다.
이처럼 카스텔리옹, 슈테판 츠바이크, 조찬선, 심상용은 칼뱅을 중상모략(中傷謀略)하려는 이들의 교과서인냥 인용되는 주요 인물이다.
- 카스텔리옹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주장은 사실인가?
1) 근거없는 카스텔리옹의 기술
카스텔리옹의 역사 서술 방식은 증언의 3대 요소인 ‘언제, 누가, 어디서’에 관한 언급이 없다. 예를 들면 이런 형식의 서술이다.
“칼뱅과 그의 종교국은 80세 노인과 그녀의 딸을 무참하게 처형했다. 그 유일한 사유는 자녀들에게 유아세례 주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한 출판업자는 칼뱅을 비난했다고 해서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혀를 잘렸다. 어떤 사람은 예정설을 반대하는 말을 했다고 해서 가혹한 고문을 받고 광장에서 화형을 당했다. 게다가 자크 그뤼에란 사람은 단지 칼뱅의 정책을 반대하고 그를 ‘위선자’라고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극한 고문을 받은 후 처형되었다.”
일괄되게 어떤 이가, 아니면 80세 노인이 전부이며, 그들이 처형된 날짜도 없으며, 장소는 쥬네브에서 광장이 단 하나 밖에 없었던 것처럼 ‘광장에서’가 사건 설명의 전부이다.
당시 모든 역사 서술에는 반드시 처형되는 사람의 이름과 나이, 처형된 날짜와 장소가 반드시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자신의 이름을 숨긴 채, 10년 후에 그것도 칼뱅이 머물고 있는 도시가 아닌 다른 곳에서 폭로하였다면 누가 그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유 때문에 그의 역사 언급은 그 어떤 역사책에서도 인용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가 유일하게 이름을 밝힌 자크 그뤼에(J. Gruet)라는 인물은 여러 역사 서술에서는 등장하는 인물로, 그의 주장과 달리 필립 샤프는 ‘반역과 무신론의 혐의로 참수를 당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2) 극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의 악의적 편집
츠바이크가 ‘칼뱅의 정통 신앙 변론’이라는 책에서 인용했다는 내용에 의하면 “심지어 칼뱅은 이단을 처형한다는 일은 결코 그리스교도적 사랑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반 신자가 이단의 거짓 가르침에 물드는 것을 막아주는 구실을 하기 때문에 그것은 사랑의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목적을 위해서는 한 도시의 주민 전부를 없앨 수도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지만 그의 인용문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유령 인용문이다.
단지 칼뱅이 신명기를 인용하여 “하나님께서는 전 도시를 그들의 주민들과 더불어 동일한 처벌 속에 가두신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거주하게 하시는 한 성읍에 대하여 네게 소문이 들리기를 너희 가운데서 어떤 불량배가 일어나서 그 성읍 주민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한다 하거든 너는 자세히 묻고 살펴보아서 이런 가증한 일이 너희 가운데에 있다는 것이 확실한 사실로 드러나면 너는 마땅히 그 성읍 주민을 칼날로 죽이고 그 성읍과 그 가운데에 거주하는 모든 것과 그 가축을 칼날로 진멸하고’라고 하신다”(신 13:12)는 언급에 하나님이라는 단어에 칼뱅을 대치하였고, 그 다음의 내용은 칼뱅을 벼랑으로 몰아세우기 위하여 악의적인 창작 활동까지 더 하였던 것이다.
카스텔리옹의 주장을 여과 없이 그대로 수용할 뿐 아니라 칼뱅을 공격하기 위해서 극작가다운 츠바이크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지어낸 그의 역사 서술은 전혀 학문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
3) 조찬선의 악의적 인용
조찬선은 “장로교 창시자 존 칼뱅”이라고 지목하면서 칼뱅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세르베는) 칼뱅의 저서 『기독교 강요』를 비판했다가 칼뱅에 의해 쥬네브 근교에서 불태워 죽임을 당하였다. 칼뱅은 세르베가 산 채로 서서 참혹하게 불타 죽기까지 다섯 시간 정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총칼에 의해 일순간에 죽는 것도 아니고, 이글이글 서서히 타는 불에 죽는 처참한 광경을 상상해 볼 때, 신앙의 잔악성은 그 어느 전쟁의 잔악성보다 수 백 배 더하다고 보아야 하고 보복적 수단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의 출처는 1908년 뉴욕에서 출간된 로마 가톨릭 백과사전에서 나온 것이며, 두 글을 비교해 본 즉 대부분 그대로 인용하면서 그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자신의 글인냥 서술하였다.
카톨릭 백과사전에는 조찬선의 주장과 일치하는 칼뱅에 관한 글이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칼뱅은 세르베의 죽음을 주도할 뿐 아니라 세르베가 죽는 그 현장에 친히 참석하여 죽어가는 모습을 즐겼다”고 서술하면서, 영국의 역사학자 기븐 (Edward Gibbon, 1737-1794)의 칼뱅에 대한 저주스러운 평가를 다음과 같이 인용해 놓았다. “나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천주교 종교재판’(auto-da-fé)에서 타오른 수많은 희생보다 세르베 한 명의 처형에 대해 더 깊이 분개한다.”
로마 천주교회는 이 글을 읽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행하였던 다른 수천, 수 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 학살의 희생들은 칼뱅에 비하면 그 죄악이 경미하며 매우 신사적이었다는 동정을 받아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찬선이 몰래 훔쳐다 쓴 이 글은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판단조차 서지 않는다. 그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왜곡된 천주교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한 천주교 대변인 노릇을 자처하였을 뿐이다.
- 칼뱅이 쥬네브의 실제적 지도자로 학살을 주도하였는가?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제네바에는 분명히 가톨릭의 이단 심문소와 유사한 ‘종교재판국’(종교법원 또는 장로치리회)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들의 행위는 온 유럽에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같은 기간 제네바 외에 스위스의 다른 도시들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방법으로 죽었다. 그런데 근 25년간 그곳의 실제적 지도자였던 칼뱅이 그런 마녀사냥 재판과 만행을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존 칼빈(장수민 저, 칼빈아카데미 발행)에 의하면 “1549년 2월, 드 에끌레시아는 동료 목사들 앞에 소환되어 잘못된 교리를 전했다는 이유로 견책을 받았다. …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같은 가르침을 되풀이하면서 심지어 동료 목사들을 비난하고 다녔다. 결국 목사회는 그를 면직시켰다. 하지만 그는 의회에 항소하였고 수석 행정관인 페렝을 움직여 구명 운동을 펼쳤다. 목사들은 페렝의 압력에 못 이겨 그를 다시 복직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세르베가 죽은 1553년 당시 상황을 소개한 일지들을 보면 당시 쥬네브 목사들에게 정치 투표권과 시의회 참석하는 권리권 마저 박탈된 상황 속에서 칼뱅이 무슨 수로 시의회를 장악하여 마녀 상황을 주도하였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악의적인 왜곡자들은 ‘세르베투스’가 화형을 당한 다음 해에 ‘정통신앙 옹호론’에서 “많은 사람들은 내가 파괴한 사람을 내가 ‘다시’ 죽이고 싶어 하는 잔학성에 대해 나를 비난하고 있다. 나는 그들의 말에 관심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나는 그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는 사실에 기뻐한다”(T.H. Dyer, “The Life of John Calvin”, Harper 1855, citing ‘Defensio’ Calvini Opera Vol.8, at 516.A)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작 위 인용 출처인 오페라 제8권 516쪽에 이런 내용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인용물을 제시한 T.H. Dyer가 1855년에 그의 책을 출판한 이후, 칼뱅 반대파들은 단 한 번도 칼뱅의 오페라를 확인하지도 않고, 초지일관 이 거짓 인용문을 오늘날까지도 인용하면서 이를 근거로 칼뱅의 잔학성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 역사적 사실은 무엇인가?
1) 1640년에 프랑스 왕국 서열 2인자였던 리셀리유 추기경(1585-1642)은 칼뱅을 중상모략함으로써 칼뱅의 권위를 깎아내리기 위해 칼뱅의 고향인 느와용의 역사 자료와 프랑스의 모든 기록들을 통하여 흠집을 낼만한 것을 찾도록 지시하였다. 하지만 그 어떤 혐의도 결코 찾아내지 못하였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2) 철학자 볼테르(1694-1778)는 “범죄와 형벌에 대한 해설”(Commentaire sur le livre Des Délits et des Peines, 1766)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학살의 자료를 찾아 그의 책에 게재하였다. 하지만 그의 글에는 수십 명을 학살했으며, 유아 세례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집행했다는 그런 기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3) 데오토르 베즈가 세르베 사건으로 유럽의 다른 지역(루터교를 포함)에서 ‘쥬네브에는 관용이 없는 잔악한 도시’라고 공격을 해 오자, 그는 “종교적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한 당신들이 세르베 사건 외에 단 한 사람도 죽이지 않은 쥬네브를 과연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라고 반박하고 있다.
4) 쥬네브의 마녀 사냥 역사를 기록해 놓은 역사 기록물이 칼뱅의 무흠함을 증명하고 있다. 쥬네브에서 마녀 사냥은 1531년으로 끝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그 어떤 역사책에서도 칼뱅의 학살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칼뱅을 싫어하는 학자들이 근거 없이 칼뱅이 학살을 주도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정설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근거하는 사료가 칼뱅을 공격하려 했던 리셀리유 추기경의 칼뱅 폄하 노력으로 인하여 이 책이 출판된 1640년 전의 사료가 아니면 그 사료의 그 정당성을 인정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 논쟁에서는 사료가 무엇보다 중요하며, 증거로 제출할 사료가 없을 경우에는 그 입을 다무는 것이 역사 논쟁에 임하는 진정한 자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