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하게 정리한 개신교의 ‘성령론’과 ‘선교’ 역사_장대선 목사

0
666

간단하게 정리한 개신교의 성령론선교역사

< 장대선 목사, 가마산교회 >

 

 

개신교 신자들은 흔히 종교개혁이 온전하게 하나의 흐름을 이루는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하곤 하지만, 실재 역사에 있어서 종교개혁이란 상당히 다양하며 모호한 역사와 배경 가운데서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세부적인 조망 없이는 결코 종교개혁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없다.

 

  1. 종교개혁과 함께 시작된 개신교의 두 진영

 

기독교 안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의 기류가 항상 존재해 왔는데, 그것은 바로 ‘확장’과 ‘분열’로서 종교개혁의 시대인 16세기의 유럽의 기독교 안에서도 그 기류는 그대로 재현되었다.

즉, 마틴 루터를 심벌(symbol)로 하여 불타오른 16세기 종교개혁은 그 불꽃이 작열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마틴 루터’와 ‘필립 멜랑히톤’을 중심으로 하는 진영과 반대로 ‘울리히 쯔빙글리’와 ‘오클람파디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두 개신교 진영으로 곧장 나뉘어서 ‘루터교회’와 ‘개혁교회’ 진영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으로는 루터와 쯔빙글리 사상을 정립한 칼빈의 신학을 기초로 하는 ‘정통주의’와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는 ‘실천주의’로 분열하는 양상을 볼 수 있다. 곧 개혁교회가 정통주의 진영인데 반해 상대적으로 일부 침례파를 포함하는 재세례파, 퀘이커, 경건주의, 메소디스트 등은 신앙의 순수성과 실천 그리고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는 실천적인 진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순수주의, 경건주의, 성령 신비주의적 특성을 강조한다.

이처럼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한 개신교(Protestant) 진영은 거의 처음부터 교리적 차이를 바탕으로 하는 정통주의 개신교 진영과, 성령 안에서의 자유로운 신앙과 경건의 실천을 강조하는 실천주의 진영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었다.

또한 확장, 즉 전도와 선교의 기류에 있어서는 로마 가톨릭 진영에 비해 개신교 진영에서는 처음에는 로마 가톨릭의 박해와 정치적 상황에 따른 핍박의 상황에 의해 상대적으로 제한적으로만 이뤄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특히 실천주의 진영에 비해 정통주의 진영의 경우에는 더욱 제한적이었는데, 올바른 신앙의 교리들을 도출해 감과 아울러서 그러한 교리를 가르치고 전수하는 정통주의와 달리 처음부터 교리적 엄밀함보다는 경건과 실천을 강조하던 재세례파, 퀘이커파, 경건주의파 등 실천주의 진영에서는 성령의 사역으로서 ‘전도’와 ‘선교’의 강조가 농후했었다.

 

  1. 성령론 중심으로 전향된 17세기 이후 개신교 동향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은 개신교 안에서는 처음부터 ‘분리’ 혹은 ‘분열’의 양상이 함께 했었으며 그런 분리 혹은 분열이란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부패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교리적으로 크게 부패하고 본래의 기독교 신앙에서 이탈된 로마 가톨릭에 대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원래의 기독교 신앙을 향한 ‘개혁’ 혹은 ‘회복’의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개혁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에 재세례파, 퀘이커, 경건주의 등 신앙의 실천을 강조하는 분파들의 성향보다는 정통주의의 성향이 종교개혁의 본질과 의미에 훨씬 부합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고전 12장 27절에서 사도가 말한바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말씀에서 한 몸을 이루게 하는 ‘평안의 매는 줄’이란 다름이 아니라 온전한 복음의 진리 가운데서의 하나 됨, 곧 참된 복음의 교리 가운데서의 신앙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해에 근거하여 정통주의 진영인 개혁교회, 그리고 개혁교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완전하지만 루터교회에서는 항상 교리적인 일치 가운데서 하나 됨과 ‘복음 진리의 전파’로서의 선교가 있었다.

반면에 신앙의 실천을 강조하는 진영에서 하나 됨과 복음 전파의 강조가 있었지만 그 양상은 교리적 일치보다는 십자가 복음의 기독론에 근거한 ‘신앙적 경험’과 ‘경건한 생활의 실천’으로서의 선교를 중시했다.

안타깝게도 서구의 개신교 역사에 있어서 흔히 정통주의 시대라고도 칭하는 16-17세기 이후의 주도권은 정통주의 진영이 아니라 오히려 실천주의 진영에 있었는데, 바로 그러한 주도권의 변화 가운데서 세속문화와 사상의 변화 또한 초래되었던 것이다.

이후로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거의 모든 개신교 진영에서의 확장은 실천주의 진영에서 이루어 졌고 오히려 정통주의 진영, 특히 장로교회들에서는 여러 차례의 분열이 초래되었는데 대표적인 분열의 역사는 주로 북미대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런가하면 19세기 이후, 특히 20세기에 이르러 주로 실천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개신교 진영을 중심으로 ‘교회일치 운동’(Ecumenical movement)이 급격하게 퍼져나가게 되는데, 그 중심적인 영역을 신학적으로는 ‘성령론’과 실천적으로는 ‘선교’에 두고 있었다.

 

  1. 종교개혁 정신에서 벗어난 19세기 이후 교회연합운동

 

특별히 18-19세기의 개신교 진영에 있어서 ‘부흥운동’의 중심적인 신학적 배경을 이루는 ‘성령론’은 이미 전술한 실천주의의 영향이 거의 지배적인데,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바탕으로 메소디스트 운동(Methodist movement)을 비롯하여 기독교 제3세력인 펜타코스트 운동(Pentecostalism/오순절운동)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개신교 역사의 중심에 ‘성령론’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그처럼 성령론을 중심으로 한 부흥운동의 양상 가운데서 ‘선교’의 강조가 있어왔는데, 그러한 성령론과 선교의 강조가 복합적으로 자리매김한 교회일치 운동은 20세기에 이르러 거의 대부분의 개신교들과, 심지어 장로교회들까지 포섭해 버렸다.

즉, 고전 12장 27절의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게 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실천주의 개신교 진영과 원래는 정통주의 진영이었던 상당수의 장로교회들이 ‘교회일치를 지향하는 선교론’과 이를 가능케 하는 ‘성령의 역사’라는 주제 가운데서 한 카테고리를 형성해 버린 것인데, 그런 교회일치 운동의 꽃이 바로 ‘세계교회협의회’(W·C·C)이다.

물론 현대 개신교의 대부분의 신학은 교회일치의 근거가 되는 성령론과 선교의 강조를 바탕으로 하는 실천주의에 대해 긍정적이며 발전적이라는 입장이다.

따라서 세계교회협의회는 동·서방교회의 일치추구를 근거로 로마 가톨릭과의 일치 또한 추구하고 있는데, 종교개혁의 배경 가운데서 이를 제대로 바라볼 때에 그것은 개혁을 돌이켜 파기해 버리는 맥락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W·C·C의 교파 통합과 관련한 역사를 보면 1925년에 캐나다의 개신교에서 이미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및 조합교회가 연합하여 캐나다기독교회(The Church of Christ in Canada)가 조직된 바 있다.

1947년에는 인도 남부의 성공회, 감리교회, 장로교회, 회중교회가 연합하여 남인도교회(Church of South India)가, 1076년에는 호주의 장로교회, 감리교회, 회중교회가 연합하여 합동하는 호주교회(The Uniting Church in Australia)라는 기구적 합동을 이루어지는 등 17세기 이후 실천주의 개신교 안에서 거의 모든 개신교가 통합을 이루었던 것을 볼 수가 있다.

이러한 개신교 역사에 대해 대부분의 기독교 역사학자들이 긍정적으로 분석하고 있지만, 그런 역사는 분명 종교개혁의 취지와 방향에 전혀 부합하지 않은 반종교개혁(Anti Reformation)적 양상이라 할 수 있다.

 

마치는 말

 

현대의 개신교가 보여주는 신학과 윤리의 실종(失踪)양상에 대한 종교개혁을 말하면서 여전히 실천주의 맥락, 곧 성경과 별도인 성령론에 바탕을 둔 선교와 교회연합을 부르짖는 개혁의 목소리들은 오히려 근본적인 종교개혁적 신학과 윤리의 실종으로 이어지는 전혀 무의미한 외침에 불과하다.

그러한 양상은 작금 세계 곳곳에서 주로 양적 성장을 추구하는 실천적 개신교를 추구하는 교회들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정통적인 의미의 개신교를 추구하는 교회들은 여전히 양적 성장보다는 교리의 가르침에 따른 신앙과 신학의 내적인 심화의 길을 더욱 추구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서도 두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성령론을 강조하는 실천적 개신교를 추구하는 교회들은 알파나 신사도 등 각종 프로그램을 도입하며 외형적 성장을 추구하지만 상대적으로 정통 개신교를 따르는 교회들은 종교개혁 정신을 최대한 보존하기 위해 신조나 요리문답 등을 공부하는 일에 더 힘을 기울이고 있다.

성경의 진리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추구하는 것을 시작으로 ‘신앙’과 ‘교리’의 일치를 추구하는 개혁주의야말로 시류(時流)를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진정한 종교개혁이다. 그 안에 분명히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선교가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은 외형적이고 실천적인 ‘연합’과 ‘일치’를 추구할 때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역사가 증명한 것처럼 더욱 큰 개신교의 ‘분열’을 야기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