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져도 일어나는 교회(1)
최덕수 목사(현산교회)
들어가며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 상황이 많이 회복되긴 했지만 코로나 이전 상황으로 돌아간 교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교회 대부분이 코로나라는 맷집이 강한 선수를 맞아 고전을 면치 못했다. 심지어 넘어져 일어설 여력조차 갖지 못한 교회들도 생겨났다. 프랑스 위그노들은 종교적으로는 가톨릭과 싸우고 정치적으로는 왕정의 박해를 받는 상황에서도 믿음을 더 공고히 하는 등, 역사적인 개혁교회들은 고난과 박해 속에서 오히려 강해졌던 반면, 한국교회는 코로나를 통과하면서 교회의 연약성을 낱낱이 드러내고 말았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교회는 몇 가지 제도 때문에 잘못되지 않는다. 중세 기독교회의 타락에서 보는 바대로 교회 문제는 신학의 오류에서 비롯된다. 교회가 바른 말씀, 바른 교리를 전하지 않을 때 문제가 생긴다. 그러므로 교회를 올바로 세우려면 우선 교회가 타락하게 된 신학적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 교회의 체질을 약하게 만든 잘못된 가르침과 오류를 찾아내어 교정해야 한다. 나아가 바른 신학의 터전 위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워야 한다. 교회는 신학의 터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1. 신학의 필요성과 신학의 한계
목회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신학은 신학교에서 배운 것으로 충분하고, 정작 목회 현장에서 필요한 것은 목회 프로그램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신학 무용론을 펼치는 이들도 있다. 이는 매우 위험한 주장이다. 하나님을 아는 길의 안내자로서의 신학을 무시하거나, 신학을 중시한다고 하더라도 신학이 잘못되면 원하는 목적지로 갈 수 없다. 바른 신학 없이 바른 신앙생활은 불가능하다. 바른 신학은 언제나 중요하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수상이 되던 해인 1901년에 ‘작은 세 마리의 여우들’(De Drie Kleine Vossen)이란 책을 썼다. 이 책은 당시 포도원에 비유되는 네덜란드 개혁교회를 허무는 세 가지 사상을 여우에 비유하여 쓴 책이다. 카이퍼는 이 작은 책에서 세 가지 편향된 신앙관을 비판하였다(이상웅 교수의 유튜브 강의 참조, https://www.youtube.com/watch?v=b_lnw2Hu8NQ).
첫 번째가 실용주의(프래그마티즘)다. 실용주의란 우리 종교에 있는 지성적인 요소를 무시하고 신앙고백의 건전성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단적인 사상에 무관심하고 신비적인 요소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전도, 선교, 영적 훈련, 연합 훈련 등 종교활동을 하는 것만으로 좋아한다. 그리고 항상 바쁘고 늘 무엇인가를 하고 있고 이전과는 다른 무엇을 하려고 한다. 수적인 부흥을 한다는 교회 중에 이런 사상에 빠진 교회들이 있다.
교회를 허무는 두 번째 여우는 감정주의다. 감정주의는 신비주의적인 방식을 추구하되 감정과 느낌을 피상적인 방식으로 추구한다. 감정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감정은 조나단 에드워드가 말한 ‘신앙감정’(Religious Affection)과는 결이 다르다. 그들은 신앙고백과 진리에 대한 탐구에 대해서는 실천(실용)주의자보다 더 관심이 없다. 그들은 자기 영혼을 신비체험 가운데 방임한다. 자신들의 감정과 상상력을 자극해준다면 설교자가 본문에서 떠나있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오순절 계통에 속한 신자들이 주로 이런 경향을 보인다.
교회라는 포도원을 허무는 세 번째 여우는 지성주의다. 지성주의는 그리스도인들의 활동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고 이해도 없다. 지성주의자들은 모든 종류의 감정주의적 요소들을 경멸하고, 신비주의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신앙고백과 교리를 고수하면서 성경에 위배되는 것은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으며, 이단적인 사상을 감지하면 비판의 칼부터 꺼내든다. 엄밀한 개혁주의를 강조하는 이들 중에 이런 이들이 있다.
우리는 카이퍼가 말한 개혁교회를 허무는 세 여우를 조심해야 한다. 실천을 강조하거나 감정과 이성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어느 한 가지, 혹은 두 가지만 강조하면 전인격인 차원에서의 신앙성숙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런 잘못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신학을 더 깊고 넓게 공부해야 한다.
그러나 남달리 신학에 대한 깊은 조예를 가졌다고 해서 자만해서는 안 된다. 신학의 필요성과 한계를 재치 있게 설명하는 카이퍼의 주장을 들어보자.
“신학은 성경이란 산 옆에 쌓아 올린 망대와 같은 것이다. 망대를 산 높이만큼이나 높이 쌓아 놓으면 산 전체를 조망할 수 있고, 그래서 길 전체를 모른 채 그저 산길을 걸어 올라 갈 때 겪게 되는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하지만 망대에만 머물면서 산길로 걸어 올라가는 사람들에게 연신 시비를 거는 것은 온당치 않다. 망대 위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서 마치 산을 정복한 듯 해봐야, 거긴 산 정상이 아니다. 그저 망대일 뿐이다. 신학공부 좀 했다고 하나님과 함께 천상 정원을 거니는 듯 처신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2. 성경적인 교회의 기초 : 개혁주의 신학
성경적인 교회는 당연히 성경에 기초해야 한다. 하지만 성경만 보아서는 무엇이 성경적인지 알 수 없다. 성경을 가지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멋대로 요리하고 가르치는 이단들이 그 좋은 예다. 때문에 신학이 중요하다. 합신이 견지하는 신학은 개혁주의 신학이다. 우리는 개혁주의 신학이 가장 바른 신학이라고 믿는다. 그 이유는 영감된 성경과 달리 신학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어느 때고 성경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그것을 개혁하는 신학이 곧 개혁주의 신학이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공교회적인 차원에서 발전되어 왔고 검증된 가장 성경적인 신학체계다. 개혁신학은 특정한 교단에 국한된 신학이 아니다. 장로교단 안에도 복음주의 신학이 있고, 침례교단 안에도 개혁주의 신학이 있다. 이런 면에서 개혁주의 신학은 교단 차원을 넘어서는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성경적인 신학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신조와 신앙고백으로 구체화되었다. 신조와 신앙고백은 세 가지 면에서 유익하다. 첫째, 신조와 신앙고백은 진리 안에서 교회의 통일성을 지켜 준다. “교리는 분열시키지만 사랑은 결합시킨다” 또는 “교리는 분열시키지만 실천은 결합시킨다”는 말이 회자된다. 이는 신학을 강조하면 교회를 신학논쟁에 빠뜨려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교리를 ‘사랑’이나 혹은 ‘실천’과 대립시키는 것은 잘못된 이분법이다.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연합은 고백하는 진리에 근거하며, 그리스도인은 진리에 대한 반응으로 서로 사랑하며 선을 행하게 된다.
둘째, 신조와 신앙고백들은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한다. 4세기 아리우스 이단이 그리스도의 영원성과 신성에 대한 교리를 공격했을 때 각 교회에서 파견된 대표단들이 아리우스의 교리에 대응하는 신조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니케아 신경이다. 개혁교회는 지금도 보편교회 신조와 개혁교회 신조와 요리문답에 빚을 지고 있다.
셋째, 신조와 신앙고백서는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왜 믿는지를 가르쳐 준다. 종교개혁 때 작성된 신조와 신앙고백서는 사도신경과 십계명과 주기도문을 주요 골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도신경은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며, 십계명은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가르쳐 준다. 주기도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를 우리가 어떻게 이루어가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이 외에도 신조와 신앙고백은 구원의 도리는 물론, 율법과 복음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지도 가르쳐준다. 개혁교회는 이러한 신조들과 신앙고백서를 교회를 이루는 골격으로 삼는다. 신조들과 신앙고백들이 없었다면 개혁교회는 정체성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개혁교회는 신앙고백적인 교회다.
안타깝게도 개혁주의 신학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목회현장에서 교회를 이루어갈 때는 개혁신학의 원리를 적용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다. 설계도는 개혁신학인데, 짓고 있는 교회는 개혁교회가 아닌 경우가 많다. 개혁신학을 공부하였다면 개혁교회를 세워야 한다. 사람들은 “신학은 교회를 위해 존재하기에 신학은 교회를 위한 신학이라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배와 직제, 성례와 교회 정치와 같은 구체적인 부분에서는 개혁신학에 근거하여 교회를 세워가지 않는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침체기에 접어든 주요 원인이다.
3. 21세기 개혁교회상
목회자 중에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열심은 있는데 교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지 못한 이들이 있다. 전통적인 교회론에 대한 이해는 물론 현 시대 상황에 가장 적합한 개혁교회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과 기준을 갖지 않은 채 교회를 세우는 이들이 없지 않다. 이렇게 되면 반드시 교회 내에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다. 건강한 개혁교회, 넘어져도 일어나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바른 교회상을 정립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교회가 바른 교회라 할 수 있는가? 개혁주의 신학에 충실한 설교가 행해지기만 하면 되는가? 설교와 성례와 권징이 올바로 시행되기만 하면 되는가? 저마다 생각들이 다 다르다. 그것은 ‘개혁주의’나 ‘개혁교회’라는 용어를 똑같이 사용하지만 용어에 대한 이해와 입장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개혁교회 기준에 대하여 엄격한 입장을 취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다소 느슨한 입장을 취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이들은 너무 높은 기준을, 어떤 이들은 너무 낮은 기준을 가지고 있다. 교회에 대해 낮은 이상을 가지게 되면 거룩성을 상실하게 되어 교회인지 세상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교회에 대한 너무 높은 이상을 가지게 되면 보편교회와도 분리되고 세상과도 단절된, 외딴 섬 같은 교회가 된다.
교회는 정체성과 상관성, 이 둘 중에 어느 한 쪽만을 강조해서는 안 되고 이 둘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교회의 거룩성을 위하여 교회 문턱을 지나치게 높이면 세상 속에 있으면서 세상을 구원하는 기관이 될 수 없다.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눈을 뭉쳐서 굴려야 한다. 눈송이를 뭉치는 일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물론 눈이 없다고 돌이나 흙을 섞어서 눈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흙과 이물질이 눈보다 더 많이 섞이면 ‘눈사람’이 아닌 ‘돌사람’ 혹은 ‘흙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혁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개혁교회 전통을 이해함과 동시에 21세기에 적합한 개혁교회의 모델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16세기 종교개혁의 전통을 그대로 이식하거나 답습함으로 현 세상과 단절된 교회가 되든지, 아니면 일반적인 교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그저 그런 교회를 세우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현 상황에 안주하거나 제도와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에만 급급하지 말고 개혁신학이 예배와 성례와 직제 등 모든 면에서 적용되고 실천되도록 힘써야 한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