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기도의 세 대상(마 6:5-9)_이복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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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세 대상(마 6:5-9)

이복우 교수(합신 신약신학)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다(눅 11:1-2). 신자인 우리도 기도를 배워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마 6:9). “너희는” 기도하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제자는, 신자는 기도하는 사람이다. 기도하지 않으면 제자도 아니고 신자도 아니다. 신자의 신자 됨은 기도하는 데 있다. 또한 예수님은 너희는 “기도하라”고 명령하셨다. 기도는 ‘하는 것’이다. 기도는 행위이다. 기도는 사색이나 이론이나 생각이나 견해가 아니라, 몸으로 실행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기도는 아무렇게나 하는 게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기도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식과 내용을 따라 해야 한다. 기도라고 해서 다 기도인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모범을 따라 하는 기도가 바른 기도이다.

 

기도의 세 대상

예수님께서 “이렇게”(οὕτως) 기도하라고 말씀 하신 것은 앞에 나오는 외식하는 자의 기도(5-6)와 이방인의 기도(7-8)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그들의 기도가 잘못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누구에게’ 기도하느냐, 즉 그들의 ‘기도의 대상’과 관련되어 있다.

1) 사람

예수님은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5)고 명령하셨다. 외식하는 자들은 회당과 넓은 길의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서서’ 기도하는 것 자체는 문제 되지 않는다(막 11:25; 눅 18:11, 13). 예수님이 문제 삼으신 것은 기도하는 외적 모습이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기도하는 목적이다. 그들은 자신이 열심히 기도하는 자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싶어서 사람이 많이 모이고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회당과 큰 길의 모퉁이에서 기도했다. 비록 그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들먹이며 요란한 행위로 기도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사람들에게 자신의 종교적 우월함을 과시하는 데 목적이 있을 뿐이었다. 외식하는 자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5) 기도했기 때문이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하는 기도이다. 결국 그들의 기도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다(5). “좋아하다”는 “사랑하다”(φιλεῖν)는 말이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따라 움직인다.”(박윤선, “나의 신학과 나의 설교”, 『신학정론』 4/1, 1986, 24).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 기도를 하지만, 사람들로부터 칭송과 존경 받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한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하여 “그들은 자신의 상을 전부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했고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았으니 받을 것을 다 받았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은 하나도 없다.

신자도 기도할 때 외식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외식은 사람의 평가에 신경 쓰는 반면에 하나님의 평가에는 어떤 관심도 두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에게는 자유하고 사람에게 종속되는 것이다. 사람에게 매이면 하나님에게서 멀어진다. 외식의 본질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것, 즉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런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 우리는 미사여구를 다 동원한 자신의 화려한 기도문을 사람들에게 자랑하려는 유혹을 거절해야 한다. 사람들의 칭찬과 자기 과시의 기도를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2) 우상

예수님께서는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금하셨다(7a). 중언부언은 말을 많이 하는 것(7b, πολυλογία)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순히 말을 많이 하는 기도 자체를 금하신 게 아니다. 예수님도 같은 내용을 반복하여 기도하거나 밤새 기도하심으로써 많은 말로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언부언 앞에 있는 “이방인과 같이”라는 말에 주의해야 한다. 예수님이 금하신 중언부언의 기도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처럼’ 말을 많이 하는 기도이다. 이방인들은 왜 기도에서 말을 많이 해야 했을까? “그들은 자신들의 많은 말 때문에 그들이 들려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7b). 이방인들이 중언부언의 기도를 한 근본 이유는 말을 많이 해야 그들의 기도가 그들의 기도 대상에게 들려진다고 생각한 데 있다.

이방인들의 기도 대상은 우상이다. 우상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한다(시 115:5-7). 이러니 우상에게 기도하는 이방인들은 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만일 신자도 자신의 많은 말로, 자신의 노력으로 기도가 들려진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곧 중언부언하는 기도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우상처럼 여기는 악한 행위이다. 기도는 나의 무능이 하나님의 전능을 만나는 사건이다. 사람은 기도에 있어서도 무익한 존재일 뿐이다. 우리는 그들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8a). 신자는 오래 기도하고 많이 기도하고 자주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 자체 때문에 기도가 하나님께 들려지는 것은 아니다.

3) 하늘 아버지

신자는 누구에게 기도하는가? 이 질문은 매우 어리석게 들릴지 모른다. 신자는 당연히 하나님께 기도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6)고 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면서 “아버지여”(9a)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하라고 가르치셨다(참조. 눅 11:2). 예수님 자신도 언제나 아버지를 부르심으로써 기도를 시작하셨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마 11:25; 눅 10:21, 참조. 마 26:39; 막 14:36; 눅 22:42; 요 17:1).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행 1:24; 7:59).

그런데도 우리는 다짜고짜 밑도 끝도 없이 “아름다운 꽃이 피는 계절입니다”라든지,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와 같은 말로 시작하는 기도를 종종 듣게 된다. 또한 매우 자주 성경구절을 멋들어지게 읽고 기도를 시작하는 경우를 본다. 언뜻 보면 꽤 경건해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기도가 무엇이며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행동이다(참조. 2023. 6. 14. 기독교개혁신보 사설). 이런 기도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모범을 따르는 기도가 아니다. 신자는 언제나 ‘아버지’를 부름으로써 기도를 시작해야 한다. 신자의 유일한 기도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에 대해 이렇게 항변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을 부르든 부르지 않든 신자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게 당연하지, 그러면 누구에게 기도하겠는가?” 그러나 예수님과 사도들과 초기 교회 성도 모두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그들은 언제나 아버지를 부름으로써 기도를 시작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부름으로써 기도를 시작하라고 가르치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아버지를 부름으로써 기도를 시작해야 한다. 아버지를 부를 때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신 하나님 아버지” 등 다양한 표현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를 부름으로써 기도를 시작하는 이유

이처럼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부름’으로써 기도를 시작하라 하신 데에는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다. 첫째, 아버지라는 말은 신자의 기원과 출처를 밝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하나님으로 인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존적이고 자충족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의존적인 존재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한다(행 17:28). 우리의 생명과 활동과 존재가 모두 하나님 안에 있다. 기도는 단지 무언가를 구하고 그것을 채워주는 기계적인 일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 존재의 근원이심을 고백하고 철저히 의존하는 하나님께 대한 관계적 행위이자 신앙고백이다. 우리는 이 신앙고백으로 기도를 시작하고 진행하며 마쳐야 한다.

둘째,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로 알고, 믿음으로 기도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상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아버지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시요(6),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아버지이시다(8; 6:32).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실뿐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아버지이시다(마 6:33). 이처럼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보시고, 아시고, 더하여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기도를 시작하게 하심은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과 활동에 대한 바른 믿음에 근거하여 기도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셋째, 위선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너는 기도할 때, 너의 골방에 들어가라. 그리고 너의 문을 닫은 후, 은밀하게 계시는 너의 아버지에게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하게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너에게 주실 것이다”(6). 예수님은 “그러나 너”(σὺ δέ)라는 말씀으로 앞에 나온 외식하는 기도자들과 제자를 강하게 대조하신다. 이 대조에 이어 예수님은 “너”라는 말을 6절 한 절에서 무려 여섯 번이나 반복하신다. “너”라는 단어를 쏟아붓고 계신 것이다. 외식자들과 제자 사이의 이와 같은 강한 대조는 외식하는 자들이 회당과 큰길 어귀에 서서 기도하는 데 반해 제자인 “너”는 골방으로 “들어가라”, 너는 문을 “잠그라”(6)는 말씀에서도 두드러진다. 하나님은 골방뿐 아니라 회당과 큰 거리도 다 보시고 아신다. 그런데도 굳이 예수님께서 이렇게 강한 대조로 골방 기도를 말씀하신 것은 외식하는 기도를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은밀한 곳에도 계시고 모든 은밀한 것을 보시는 아버지이시다. 이 사실을 믿고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며 기도하면 외식하지 않게 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주실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땅에 있는 악한 자라도 떡을 달라하는 자식에게 돌을 주거나, 생선을 달라고 하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버지는 없다. 땅에 있는 악한 자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한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선하시며 온전하신(마 5:48) 아버지, 아무도 가까이할 수 없는 영광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녀에게 온전하고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는가?(마 7:9-11, 참조. 약 1:17)

 

맺음말

신자는 기도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기도의 대상을 부름으로써 기도를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내가 누구에게 기도하며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바로 알고 믿음으로써 기도하기 위해서이다.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자의 정성이나 열정이나 말의 조합이 아니라 기도 대상에 대한 바른 인식과 신앙고백이다. 신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부름으로써 기도를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 의존적인 존재임을 고백하고, 사람에게 보이려는 외식 기도를 거절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존재와 성품과 활동에 대한 확실한 신앙고백으로 기도하게 된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온전한 것으로 응답해 주실 것을 확신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