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15] 사건과 함께: 모(Meaux)의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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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함께: 모(Meaux)의 개혁

동이 트는 것을 막을 길이 없듯이, 르네상스 이후 유럽 전체를 기세등등하게 빠른 속도로 물들이는 인문주의의 저변 확산을 막을 길이 없었다.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었고, 특히 왕실의 변화는 눈여겨 볼만했다. 당시 프랑스 국왕 프랑수와 1세도 인문주의에 관심이 컸지만, 그보다 두 살 위 누이 마르그리뜨는 인문주의에 관심뿐 아니라 상당한 소양을 지닌 왕녀였다. 마르그리뜨는 오랜 시간 부정부패로 얼룩진 가톨릭교회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감지하였다. 이 때문에 그녀는 주변에서 평소 친분을 쌓았던 인재들을 중심으로 변화를 시험해보는 무대를 기획하였다. 시험장은 파리에서 동쪽으로 50킬로 정도 떨어진 “모”(Meaux)라는 도시에서 펼쳐졌다. 이 일을 위해 그녀의 눈에 들어온 최적의 인물은 기욤 브리소네였다.

기욤의 아버지는 본래 프랑스 왕국의 재무장관을 역임할 정도로 막강한 경제인이었는데, 가톨릭 사제들의 불량한 행실에 강한 불만을 품고 교회 내부로 들어가 변화를 일으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사제가 되려면 독신이어야만 했던 그는 부인과 사별하자 곧바로 가톨릭교회에 입문하여 랭스의 대주교가 되었고, 파리 센 강 남쪽에 위치한 생제르맹데프레 교회를 위임받았다. 같은 길에 들어선 아들 기욤은 아버지의 후광을 얻어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장이 되었다(1507년). 기욤이 가톨릭교회를 개혁하려는 뜨거운 의지로 부패한 사제들을 책망하면서 성경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자, 성경 연구에 목마른 사람들이 그 주변에 모여들었다.

기욤 브리소네가 “모”의 주교로 선임된 것은 더욱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었다(1516년). 그는 국왕의 누이 마르그리뜨에게 지원받아 인문주의 차원에서 교회 개혁을 시도하였다. 기욤을 뒷받침하는 걸출한 인물은 그의 옛 은사 르페브르 데따쁠이었다. 르페브르는 당시 인문주의 산맥의 거봉으로 여겨지는 에라스뮈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프랑스 인문주의의 거장이었다. 이미 그는 “오중언어 시편”을 편찬한 상태였고, 바울서신 주석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 신학을 마르틴 루터보다도 먼저 선보였다(1512년).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자가 서로 다른 인물이라는 그의 주장(1517년)은 거센 논쟁을 일으켜, 마침내 소르본 신학교의 정죄를 받기까지 하였다(1521년).

어쨌든 기욤 브리소네는 이처럼 대담한 르페브르의 도움을 받아 “모”에서 개혁 운동을 전개하였다. 1521년이었다. 여기에는 르페브르의 제자들이 합세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장차 쟝 깔방을 제네바 종교개혁에 끌어들일 기욤 파렐도 들어있었고, 이외에도 후에 시편찬송 초판을 편찬할 끌레망 마로 같은 젊은 학도들이 대거 참석하였다. 개혁을 주도한 세력은 “모 모임”(Cénacle de Meaux)이라고 불렸고, 성경 연구와 인문주의 연구가 이 모임의 주요 활동이었다. “모 모임”은 점차 루터의 신학을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 출판(1522년)에 도전을 받은 르페브르는 르페브르 데따쁠은 라틴어 불가타 성경 가운데 신약성경과 시편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1523년). 그의 번역은 신성시되는 불가타를 번역했다는 이유로 가톨릭교회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모 모임”은 매일같이 일반 남녀 신자들에게 시편과 로마서를 강의했고, 1525년에는 르페브르 성경 주해와 회원들의 설교를 바탕으로 프랑스어 설교집을 출판하는 쾌거를 일구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브리소네가 “모 모임”의 위험을 파악한 소르본느 신학자들에게 신랄한 비판을 받은 나머지 파리 의회의 강압에 굴복하면서 4년 만에 막을 내렸고, 모임을 주도하던 르페브르와 파렐 같은 인물들은 제각기 도피의 길에 오르고 말았다. 파렐의 뜻을 따라 제네바 개혁에 몸담은 깔방이 이후 프랑스 위그노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니, 위그노 운동은 “모 모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대표 : 조병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