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태동의 전야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제공
기욤 파렐
‘위그노’(프랑스어 : Huguenot)는 프랑스 신교(프로테스탄트) 신자를 통칭하는 이름이다. 16세기에 인문주의를 바탕으로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인들은 개혁자 칼뱅의 신학으로 무장하여 가톨릭과 다른 체계를 가진 교회를 세웠다.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질수록 점점 희미해지듯이 천년 중세의 막바지는 급격히 농도를 잃어갔다. 그런데도 아직은 유럽을 덮을 만큼 넓은 그림자를 걸친 한 인물이 에라스뮈스라는 이름으로 대륙을 활보하고 있었다. 에라스뮈스는 분수령처럼 전시대 및 동시대의 인문주의자들이 그에게 수렴되고, 그로부터 후시대의 종교 개혁자들이 발원하는 인물이었다. 앞에서 인간의 존엄을 주창했던 르네상스 사상이 이 사람과 함께 절정에 달했고, 놀랍게도 우리가 알고 있는 웬만한 종교 개혁자들은 모두 에라스뮈스와 접촉하였다.
그러나 중세를 그러모으고 개혁을 들이쑤시는 사상을 가득 수놓은 그의 그림자는 유럽 대륙의 광활한 공간을 덮었지만, 안타깝게도 시대의 경계를 넘지는 못하였다. 에라스뮈스는 끝끝내 가톨릭에 남은 채 종교개혁으로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어쨌든 유럽이 사랑한 최고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뮈스의 정신과 사상은 프랑스의 지성인들에게도 대단히 큰 영향을 끼쳤다. 그 가운데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문주의였던 르페브르가 있었다. 그는 미묘한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변화를 추구하는 에라스뮈스의 운동에 한 배를 탔다.
당시 프랑스 국왕 프랑수와1세는 인문주의가 전통을 존중하기만 한다면 기꺼이 허용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특히 국왕의 손위 누이 마르그리뜨는 인문주의에 깊이 영향을 받은 신여성으로, 읽기에 민망한 연애 소설을 발표할 정도로 상당한 필력을 지닌 실력자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말년에 프랑수와1세의 두터운 호의를 받아 죽을 때까지 프랑스에 머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때 다빈치는 많은 서적과 필사본들 그리고 그림들을 가져왔는데, 그 중에는 저 유명한 “모나리자”도 들어있었다. 이 그림이 지금껏 파리 루브르에 전시되고 있는 이유이다.
프랑스는 인문주의를 수용함으로써 약과 독을 함께 입에 털어 넣은 셈이 되었다. 절정에 달한 후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달콤한 열매를 맛보게 된 것이 약이라면, 프랑스 사람들이 정신적 각성을 겪으면서 오랫동안 썩어문드러진 가톨릭의 문제점들을 따갑게 인식하게 된 것은 독이었다. 이제부터 프랑스 인문주의자들이 가톨릭 비판에 대거 가세하기 시작하였다. 지성인들은 가톨릭의 의식과 행사를 비판하면서 교회의 내적 개혁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곳곳에서 복음적인 설교도 속속히 울려 퍼졌다. 파리에서 동쪽으로 50킬로 정도 떨어진 “모”(Meaux)라는 도시의 주교 브리소네는 1518년에 이미 에라스뮈스와 르페브르의 개혁 사상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국왕의 누이 마르그리뜨는 브리소네에게 인문주의 차원에서 교회의 개혁을 주문하였다. 이미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렸으므로 그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왕녀의 주문을 받은 브리소네는 1521년에 데따쁠과 함께 성경을 연구하는 그룹을 만들었다. 이 모임은 “모”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모 서클”이라고 불린다. 여기에는 젊은 학도들도 참석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10년 후에 쟝 깔방을 제네바 종교개혁에 끌어들인 파렐도 있었다. 그는 르페브르의 제자였다.
“모 서클”은 성경연구와 인문주의 연구에 몰입하였다. 여기에서 르페브르는 매우 중요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1524년에 출판된 프랑스어 신약성경 번역이다. 이것은 나중에 10년보다 조금 후 깔방의 육촌 올리베땅이 프랑스어로 성경전서를 번역해내는 데 기반이 되었다. 그런데 “모 서클”의 위험을 감지한 파리 소르본느 신학자들은 격렬한 비판을 가하였고, 마침내 이 모임은 파리 의회의 강압에 못 이겨 4년 만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모 서클”이 폐쇄된 후 파렐은 파리에 작은 비밀 모임을 만들어 금서로 지정된 루터의 프랑스어 번역 저술들을 읽었다. 위그노 운동은 이렇게 비밀리에 태동되었다.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대표 : 조병수 박사
경기 수원시 영통구 에듀타운로 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