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하나님은 (삼상 23:6-14)
이수환 목사(강변교회)
블레셋 사람들이 유다의 성읍인 그일라를 쳐서 곡식을 탈취하였다는 소식을 다윗이 들었습니다(삼상 23:1). 블레셋을 물리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이스라엘 왕의 사명입니다. 지금 그 사명이 다윗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다윗은 바로 이 일을 위하여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할 일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일을 잘 처리하면, 다윗의 입지가 이스라엘 안에서 회복되어 이전보다 훨씬 올라 갈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인기와 인정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는 정당성이 있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윗이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울은 제 역할을 못합니다. 정치적, 영적 정당성이 그에게는 충분합니다. 같은 민족의 고난을 보며 구원의 일을 행해야 하는 당위성도 그에게는 있습니다.
다윗에게 절호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다윗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장 전쟁을 시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움직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다윗은 먼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무리 모든 상황과 여건이 긴급하고, 자신을 지지하고 있고, 자신에게 필요하고 유익하다 하여도, 다윗에게는 상황과 자신의 판단이, 하나님의 뜻보다 앞설 수 없었습니다. 그는 먼저 신중히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다윗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왕의 사명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과 나라를 이루시기 위하여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는 우리의 판단이 조급하여 하나님의 뜻보다 앞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우리의 시간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에 우리를 맞추어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의 뜻이며, 그 때가 가장 좋은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맞는지,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우리가 움직이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전쟁을 허락하시고, 승리를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다윗은 바로 전쟁을 시작 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다윗의 사람들의 반대”(3절) 때문입니다. 이 ‘다윗의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놉 땅에서 제사장 아히멜렉이 준 성전의 떡을 같이 먹은 ‘소년들’일 수도 있고(삼상 21:4), 아둘람 굴로 숨어들었던 400명일 수도 있습니다(삼상 22:2). 그들이 누구이든 상관없이, 당시 상황에서 다윗을 따른다는 것은 상당한 결단과 헌신, 그리고 각오가 있어야 하는 일입니다.
즉, 그들은 다윗이 쉽게 외면하거나 무시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더하여 그들의 반대는 매우 합리적입니다. 그들의 말대로, 유다에 있는 것도 위험한대, 블레셋 사람들을 치는 전쟁은 감히 엄두를 못 낼 일입니다(3절). 그러나 딱 한 가지가 그들의 말과 논리 속에 빠져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윗은 기도했지만, 그들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명하신 사명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현실을 자신의 이성에 따라 합리적으로 판단할 뿐입니다.
이러한 그들을 향하여 다윗은 화를 낸다거나, 논쟁을 하지 않았고, 그들을 무시하거나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다윗은 또 다시 하나님께로 나아가 기도합니다. 그들이 아무리 영향력이 있고, 그들의 말이 아무리 합리적이어도, 다윗에게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뜻 보다 앞설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다시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자, 순종하여 나아갑니다. 그 사이에 하나님께서는 모두의 마음을 움직이셨고, 결국 다윗과 모든 사람들은 승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이 우리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릴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 긴급해 보이고, 중요한 사명이 우리의 등을 떠밀고, 우리의 마음속에 헌신이 불처럼 타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의 합리적인 반대와 방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정말 온 몸의 힘이 쭈욱 빠집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중심은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의 이치와 합리성이 아니라, 조금 늦더라도, 번거롭더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걷는 믿음의 걸음을 택해야 합니다. 기도로 사명의 걸음을 떼어야 합니다. 그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그일라에서 블레셋을 크게 물리쳐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어려움이 곧 닥쳐왔습니다. 바로 그일라 사람들입니다. 다윗의 전쟁과 승리의 소식을 사울이 듣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잡으려고 군사들을 그일라로 보내어 성읍을 포위합니다(8). 사울은 단순히 성읍을 둘러 싼 것이 아니라, 놉 땅의 선지자들을 죽였듯이, 그일라 사람들도 죽이려 했습니다(10).
왕이 자기 백성들을 죽이려는 것입니다. 이미 사울은 왕으로서의 정체성, 사명, 의무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왕의 자격을 상실했습니다. 그러한 위험이 닥쳐오자,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을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을 사울에게 넘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1,12) 그들을 위하여 온갖 어려움과 위험을 무릎 쓰고, 목숨을 걸고 전쟁을 한 다윗을 버리고, 도리어 자신들을 위협하는 사울에게 항복합니다. 그들을 위한 왕의 사명을 감당한 다윗은 버리고, 왕의 사명을 잃어버린 사울에게 순종합니다.
어쩌면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사울이 놉 땅의 제사장들을 학살한 것을 그일라 사람들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그들은 그러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힌 그일라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현실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누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인지, 누가 하나님의 뜻에 합한 사람인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저 눈앞에 벌어진 현실로만 판단하고 생각하여 다윗을 사울에게 건네주려고 합니다.
그 때 다윗이 무엇을 했는가요? 그일라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배신한 그일라 사람들을 향하여 복수의 칼을 들지도 않았습니다. 다윗은 또 다시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하여, 아비아달이 들고 온 에봇을 찾습니다(9). 그리고 하나님께 또 다시 기도합니다. 다윗은 사명의 벽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결국, 그일라 사람들의 시도도, 사울의 공격도 모두 실패로 돌아갑니다. 다윗은 또 다시 광야로 도망가야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셨기에, 그 누구도 다윗을 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울이 매일 다윗을 찾았습니다.(14절) 그러나 하나님이 다윗을 붙드셨기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지키셨기에 그는 안전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섬기는 모든 공동체를 위하여, 이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맡기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명을 완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기를 소원하며 그렇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명을 완수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전혀 지지를 받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다윗의 뜻에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반대 정도가 아닙니다. 그일라 사람들은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기려 합니다. 그들을 위하여 전쟁을 감당한,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한 다윗을 죽음의 자리로 몰아넣으려고 합니다. 이런 배신, 이런 배은망덕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할 때, 우리도 다윗과 같은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했는데 결과도 안 좋고, 사람들이 오히려 나를 비난하고 공격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사람들을 위하여 애쓰고 땀 흘린 나의 눈물과 기도와, 수고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힘이 빠집니다. 절망하고 낙심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모든 사명을 의심하게 됩니다. 원래 오늘 설교의 제목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였습니다. 아무도 우리의 수고와 헌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 도리어 비난과 공격을 가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알아주지 않을 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삼상 23:14 And Saul sought him every day, but God did not give him into his hand.(ESV))
다윗은 바로 그 하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현실의 벽 앞에, 사명의 위기 앞에, 절망하거나, 사람의 도움을 청하거나, 세상의 방법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우리도 또 다시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모두가 우리를 알아주지 않는다 하여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모두가 외면하고 비난하며 알아주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알아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우리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길을 알려 주십니다. 그 길을 걸을 힘을 주시며, 지켜 보호하여 인도해 주십니다.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도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 때에 우리가 우리에게 맡기신 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사명을, 직분을, 사역을, 교회를, 믿음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길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길을 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까? 세상의 큰 권력을 얻어서 권세를 부리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길은, 세상과는 다른 길을 간다는 것입니다. 세상과는 다른 목적, 다른 비전을 향하여 간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걷지 않는 길을 걷는다는 것입니다. 세상과는 다른 방법을 택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의지하는 힘이 아닌 다른 힘으로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노아가 세상의 조롱과 비아냥 속에서 그렇게 묵묵히 믿음의 길을 나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고향 친지를 떠나, 알 수 없는 곳을 향하여 묵묵히 믿음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요셉이 알 수 없는 가운데, 극심한 고통과 두려움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걸어가셨습니다. 사람들의 온갖 조롱과 미움과 채찍과 침 뱉음에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셨습니다. 바울이, 스데반이, 베드로, 요한이 그랬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며, 그 믿음의 길을 나아갔습니다.
다윗을 통하여,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반대가 있습니다. 수고와 노력과 헌신을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비난과 조롱을 당하는 현실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원래 믿는 자의 모습이었고, 교회가 살아온 현실이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며, 묵묵히, 담담히 이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시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의 길로 함께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수환 저 <그의 나라, 그의 왕, 그의 백성. 2021. 세움북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