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숙 언니
김미숙 사모(청목교회)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자들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사 52;7)
내가 일곱 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암으로 그만 돌아가셨다. 우리 집은 안동 쪽에 본가를 둔 유교 전통이 깊숙이 뿌리내린 가정인데 어머니마저 안 계시니 아버지의 자녀 단속은 더 엄해지셨다. 우리 칠남매가 엄마 없이 크는 애들이란 소리를 들을까 봐 그러셨던 것 같기도 하다. 초등학교 때, 우연히 친구를 따라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애들이 심심해서 다니나 보다 하고 묵과하시던 아버지께서 어느 날부터인가 시도 때도 없이 교회에 가는 것이 눈에 거슬리셨는지 출입을 간섭하시기 시작하셨다. 생각해보니 아버지의 신앙 핍박은 너무 어릴 때부터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폭언과 협박까지 서슴지 않고 던지셨다.
“너 또 교회 가면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린다.”
나는 너무 무서웠지만 신발을 문밖에 감추어 두고 아버지 몰래 집을 빠져나와 교회로 달려가기를 수없이 했다. 교회는 너무 즐겁고 재미있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올 때가 되면 아버지의 무서운 얼굴이 떠올라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 저 예수 편하게 믿게 해 주세요. 맘껏 교회 다닐 수 있게 도와주세요.’
아버지와 숨바꼭질 가운데에서도 세월은 빨리 지나갔다. 교회 중심으로 성장을 해서 청년이 되었다. 주님의 간섭하심 속에서 목회자 아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남편과 나의 섬김 덕분이었을까 끈끈한 가족애 덕분일까 친정의 불신 가족들은 차츰차츰 구원받는 놀라움이 일어났다. 모두 구원받은 후에야 한시름을 놓고서 눈을 돌렸다. 남편과 나의 동역의 초점은 주로 전도하는 일이었다. 지나고 보니 그 일에 가장 많은 시간을 드린 것 같다. 축호 전도와 노방 전도를 자유롭게 하다가, 코로나 이후에는 전도방법을 고민해야 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마음껏 전도하고 가가호호 다니면서 초인종을 누르며 복음 전하던 시절이 이젠 아련한 시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주님! 길을 열어 주십시오!’
수 십 년 계단을 오르내리는 전도 생활로 무릎에 무리가 생겼는지 연골 파열로 병원에 다녔다. 양쪽 무릎 연골 시술을 하고 의사는 수영을 권했다. 워낙 운동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 나에게 수영은 고역이었다. 어떤 날은 ‘내가 왜 여기 와 있나?’ 싶을 때도 있었다. 우두커니 서서 남들 수영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어느 날, 머릿속에 번뜩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여기가 네 황금어장이다 네 마음껏 사람 낚는 어부가 되거라’
갑자기 심장이 펌프질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확실한 답을 찾은 것이었다. 그때부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영복을 입고 있든 머리가 젖은 채로 집으로 가는 길이든 부딪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반응은 천차만별이지만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물 안에서 운동하고 나면 생면부지의 사람이라도 쉽게 친밀감이 생긴 모양이었다.
여자들 사이에서는 얼굴이 익숙해지고 나면 금세 언니 동생이 되었다. 내 나이보다 어린 사람들이 태반이니 나는 그들에게 ‘미숙 언니’로 통했다. 어릴 때 동생이 부르던 언니라는 말을 수영장에서 듣게 될 줄이야, 목회를 시작하고 나는 수십 년 동안 사모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늘그막에 나를 언니라고 부르는 새 동생들이 생기게 될 줄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친밀감이 생긴 우리들은 운동 후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시간이 점점 잦아졌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나도 그들을 집으로 초대를 했다. 우리 집을 처음 방문한 날이다.
“언니 집에 맥주 있지?”
“아, 내가 어제 끊어서 없는데”
“정말 없어?”
“응. 없어.”
그중 한 명이 가게 들려서 사가자고 하더니 정말 맥주를 한 보따리 사들고 들어왔다. 그 중 한 명이 정말 맥주가 없는 지를 확인하려고 냉장고를 열어본 다음 내 얼굴을 다시 쳐다보더니 웃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목회자 사모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었다. 차려준 밥을 맛있게 먹으면서 서너 명이 맥주를 한 캔 씩 따서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태연한 척했지만 내심 놀랐다. 대낮에도 여인들이 이렇게 술을 마실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 주님이 준비해 두신 사람들만 만났었다. 그러면서도 뭐든 다 안다고 했는데 사람에 대한 경험이 이렇게 미천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한 보따리 사들고 온 그들의 맥주는 순식간에 빈 깡통이 되어 쓰레기통에 가득 찼다. 우리 교인 중에 한 명이 그때 우리 집을 방문했더라면 아연실색하고 되돌아갔을 것이다. 이런 진풍경을 목사님 댁에서 볼 수 있으리라 상상이나 했겠는가.
나는 남편이 목사라는 것을 밝혔다. 그럼에도 아랑곳없이 신앙이 없는 그들에게는 나는 여전히 친한 미숙 언니였다. 그들은 수시로 술자리를 만들었고 함께 동석한 나는 그들의 될 소리 안 될 소리들을 다 들으며 다투고 울고 웃고 하는 그들의 내면 깊숙한 곳을 보게 되었다.
짧으면 두세 시간, 길면 네다섯 시간이 훌쩍 지나고 돌아갈 때가 되면 술 마시지 않은 내가 일일이 집 앞까지 차례대로 데려다주었다. 차에서 내릴 때가 되면 90도 각도로 인사를 하며 자신의 미래 모습을 한 마디씩 고백하듯이 뱉었다.
“언니 나도 교회 나갈게. 십일조도 할 꼬야……”
그것도 취중에 울면서 허리를 굽히며 감사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복음의 가랑비에 옷이 젖고 있었다.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당연한 것이지만, 예전의 나 같으면 이렇게 술자리를 함께하며 그들의 취중 이야기를 다 들어줄 수 있었을까. 더 나아가 어떻게 내가 술 마시는 사람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쌓여갈수록 진심으로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고 나도 모르게 사고방식이 바뀌었다. 때론 조언이나 격려조차도 함부로 하지 않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알맞게 했다. 복음을 듣게 하려면 어떤 상황에도 그들을 진심으로 대하며 지혜롭게 대처해야 함을 이미 터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일예배 준비를 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언니 나 O운이, 나 교회 아래인데 예배드리러 올라가도 돼?”
이 O운, 그녀는 환갑을 코앞에 두고 있고 아들 둘을 결혼시키고 손자 손녀가 셋 인 자매다. 남편의 알코올 중독으로 그녀는 수 십 년간 남편의 폭언 폭행 등을 감당해야 했다. 숱한 고비를 겪으면서도 매번 참아내며 집도 장만하고 자녀들을 결혼까지 다 시켰지만, 정작 본인은 심한 우울증으로 약을 장복하고 날마다 자살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던 자매였다. 언제쯤 약을 먹고 죽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낙심만 하던 그녀가 며칠 전 집으로 찾아와 자신이 살아온 아픈 삶의 알맹이를 모두 털어놓았다. 그날, 나도 울고 그녀도 울고 우리 거실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날 이후, 이 자매는 결단을 하고 예배를 드리러 온 것이다.
교회 첫 발을 내디딘 2021년 7월 25일, 그녀에게도 내게도 잊을 수 없는 주일이었다. 처음 온 날부터 그녀는 준비된 사람처럼 보폭이 일사불란했다. 그동안 나와의 짧지 않은 교제 속에서 교회생활이란 것을 나름대로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공식적인 예배(주일예배, 오후예배, 수요예배, 금요 구역예배, 심야기도회, 성경공부)에 대부분 참석하고 새벽기도에도 가끔씩 비치더니 일대일 양육까지 예정에 넣어 두었다.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정리가 되어갔다. 술은 단번에 끊기 어려웠던지 차차 끊겠다고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하더니 몇 달이 지나자 본인 말대로 정말 금주를 단행했다. 그다음 말이 더 놀라웠다. 자살충동에서 자유로워졌다고 한다. 한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는 나를 지켜주지 못하지만 이젠 하늘 아버지가 생겼다며 어린아이처럼 행복하다고 했다. 한 발 더 내디뎌, 함께 술 마시던 친구들의 야유와 비아냥거림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그들에게 힘 있게 말을 전했다.
“야. 니들 내 아버지 하나님 욕 하지 마. 니들도 다 하나님께로 와.”라고 큰 소리를 치더니 출석교인답게 십일조 헌금, 선교헌금, 구제 헌금까지 정갈하게 드렸다. 드디어 교회 양육 과정에 따라 학습교육을 열심히 받고 금 번 부활주일에는 학습 교인으로 세워지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자, 복음을 전해 받은 그녀의 남편이 많이 달라져 아내에게 살갑게 대하고 건강한 부부관계가 형성되어가고 있다고 전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변화를 주변에 알리기 시작하더니 자연스럽게 전도하는 일에도 소매를 걷었다. 한 번은 고향 언니라는 사람을 내게 소개해서 함께 식사를 하고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천주교 신자였던 그녀의 고향 언니는 다니던 성당에 발을 끊고 십여 년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있던 처지였다. 우리는 함께 기도드리며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어느 날 그녀는 그 고향 언니로부터 울며 괴로워하는 전화를 받은 끝에 하나님께로 나올 것을 권유하니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겠다고 했단다. 그 자매는 호통을 치며 신부는 자기 문제도 해결 못해 밤마다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며 괴로워하는데 무슨 고해성사를 하냐며 자기 방식으로 말을 이어갔던 모양이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여태 지켜보지 않았느냐, 나는 하나님 딸이 되어 무슨 일이든 다 말씀드리면서 즐겁게 살아가려고 노력 중이다, 같이 기도드려보자,’ 등 마음을 다해 간곡히 권했던 모양이다. 그 고향 언니가 오후 예배를 드리러 왔다. 그 후로도 예전에 함께 술 마시며 놀던 동생뻘 자매를 구역 예배에 참석하게 하고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에게도 복음의 통로가 되어갔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내 모습을 뒤돌아보았다. 수년 동안 내가 해 오던 전도 방법에 대해서도 점검이 절실했다. 상대방은 들을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데, 나는 입을 벌려 삽으로 밥을 퍼 넣듯이 복음을 쏟아내고 결단을 촉구하곤 했다. 그 결과들이 어땠는지는 뻔하다. 생각해 보면 진심으로 기다리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되는데 내가 지나치게 성급했던 것이다.
누구를 위한 교회 부흥이었던가? 남편의 은퇴를 1년 앞두고 있는 시점이다. 남은 사역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아버지 집에 이르기까지 은퇴 없이 지속되는 전도와 선교의 방법을 구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내게는 코로나19의 위기가 오히려 유익한 전도의 분깃점이 된 셈이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지난 일 년 동안은 다니던 수영장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지금은 다른 수영장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예비하신 또 다른 영혼을 만나기 위해 물속을 열심히 휘젓고 있다. 힘이 들 때는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는 방도뿐이 없었다.
‘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즐거움과 기쁨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 나리이다 (사 51:11)’
지금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당연한 책무로만 생각하고 몸이 부서져라 내 힘으로 해 왔다. 이쯤에 이르니 그것조차 다 은혜였다. 그것을 입술로 고백하고 나니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천국으로 인도하실 그날까지 한 영혼이라도 더 아버지 집으로 안내하고 싶은 생각뿐이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수영장 심부름, 할 수 있는 날까지 성실하게 해내는 ‘미숙 언니’로 감사하며 살아가겠다. <끝>
<대상 수상 소감/ 김미숙 사모>
여러모로 부족한 수기를 대상으로 선정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사모로서의 역할을 연약하나마 감당하면서 전도와 선교에도 늘 마음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 년에 두 주간 아프리카 동남쪽에 위치한 탄자니아에 선교를 갑니다. 8년째인 올해도 변함없이 갑니다. 처음엔 그분들의 모습이 무섭기도 하고 타 문화의 현장이 너무 힘겨웠는데 3년차 갈 때에서야 그들 영혼이 가슴에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선교 현장에서는 물론 믿음과 마음이 가장 중요하지만 의약품이나 생필품이 많이 부족한 현지 분들을 위해 더 효율적으로 봉사하려면 물질도 필요합니다. 이번에도 선교 봉사 활동을 준비하며 기도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에 수기 공모 안내를 보고 응모하게 되었는데 뜻밖의 대상을 주셔서 놀랍고 감사했습니다. 이번에는 귀한 상금으로 우산 100개 정도를 준비해 갈 수 있을 듯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알고 감사하며 이런 기회를 주신 기독교개혁신보와 뽑아 주신 심사위원님들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더욱 은혜를 간구하며 섬기겠습니다. 기독교개혁신보 창간 4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더욱 번창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