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논/단] 전쟁과 평화, 그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관점_박동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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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그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관점

박동근 목사(안양 한길교회)

끊임없는 분쟁과 갈등의 환경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인 평화관을 정립해야

끝없는 국가 간에 전쟁과 분쟁 속에서 세계와 국가 간의 관계를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는 고민할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만사에 있어 그러하듯, 이 문제에 있어서도 부패한 인류 속에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려는 본성이 있다. 따라서 한편으로, 인류는 이상주의적이고 집단주의적인 관점에서 온 인류를 집합주의적으로 묶고 통일시키려는 ‘국제주의’를 추구한다. 한편으로는, 국제적 관계를 무시하고 자기 국가, 자기 문화, 자기 번영만을 추구하는 ‘국가주의’를 추구한다.

부패하고 유한한 인류는 보편을 생각하면 개체를 잃고, 개체를 생각하면 보편을 잃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인류는 집단주의에 시달린 경험이 많고, 개인주의로 인해 경험하게 되는 병폐도 많다. 국제주의와 국가주의 사이의 갈등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극단을 경계한다. 칼빈주의의 가장 큰 장점이 ‘성경적’이라는 데 있다면, 칼빈주의는 성경을 통해 얻게 된 지혜로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를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에 대한 방향성도 제공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게 만든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극단적인 제국주의를 허락하지 않으신다. 창세기 11장은 바벨탑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아담 안에서 온 인류가 죄인이 되어 부패한 후, 심판인 동시에 세상의 정화로서 노아의 방주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큰 심판을 경험하고도 얼마 되지 않아 인류는 하나님 앞에 간악한 집단적 범죄를 자행하는데, 그것이 바벨탑 사건이다.

창세기 11장은 인류 타락의 심각성을 보여주므로, 타락에 대한 대안으로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12장 사건의 배경이 된다. 부패한 인류가 하나님 없이 통일된 하나의 국제사회를 만드는 일은 끔찍한 결과를 불러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어 인류를 흩으신다. 주님께서 재림하시어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될 때까지 인류는 하나 된 힘으로 규합(糾合)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없는 전 세계적 통일을 악하게 보신다.

한편, 하나님께서 인류를 흩으시고 각각의 경계와 지경을 주시므로, 각국이 자체의 문화를 발달시키며 국가를 이루게 하셨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국가주의는 자신의 국가의 번영과 패권만을 추구하려는 성향 때문에,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를 훼손하려는 병폐가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없는 세계 정부와 같은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경계와 지경 안에 있는 국가가 타 국가와 일정한 질서와 협력과 박애를 실천하는 것을 막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류가 아담이라는 한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7:26절도 이렇게 기록한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인류는 한 혈통 안에 있는 형제이기도 하다. 타락하여 그 통일성을 잃었고, 하나 될 수 있는 구심점을 잃었지만, 하나님께서 양심에 새겨주신 율법과 보편가치로서 선한 윤리들 안에서 국가와 국가 사이에 평화와 연대와 책임을 나누는 일이 제한적으로나마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에 근거하여 칼빈주의는 극단적인 국제주의나 극단적인 국가주의를 경계한다. 칼빈주의자가 취할 수 있는 국제 관계는 각자의 경계와 지경을 부여받은 각 국가들을 존중하며,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온 인류가 형제적 평화와 사랑을 추구하는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국가와 국가의 관계를 규정하는 질서는 ‘국제법’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만물을 모두 통치하시는 모든 존재의 왕이 되신다.

그러나 구속하신 백성들을 통치하시는 교회의 통치와 보편 세상을 향한 통치는 그 성격이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향해 구속적 통치를 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생명을 소유한다. 성도와 교회의 열매들은 생명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보편 세상, 곧 사회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는 부패성을 억제하시는 통치이다. 보편 세상의 완악함을 제어하시고 억제하시는 하나님의 손길로 세상에서도 도덕과 윤리가 존재하고, 온갖 박애 정신과 실천이 나온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 속에 주신 열매들은 생명에서 온 것이 아니라 억제하시는 하나님이 손길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보편 사회에서 나타나는 선행들과 결실들을 ‘찬란한 악덕’이라고 명명하므로, 거듭난 생명 안에 연합한 교회와 성도들의 덕과 생명 없는 세상의 덕을 구분하였다.

이로 보건데, 국가 간의 평화를 논함에 있어 바벨탑 류의 이상주의적 통일과 평화를 꿈꾸는 것은 비성경적인 사상이 분명해 보인다. 또 부패한 세계에서 전쟁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끊임없이 이러한 갈등과 패악이 반복될 것임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국가 간의 평화와 전쟁이 교차하는 세상을 인류는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시간까지 견디어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현실일 때, 전쟁은 타락 이후에 발견되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국가와 국가 간에 하나님께서 일반은총 안에서 주신 질서 안에서 그 합법성을 획득해야 한다.

정당한 전쟁도 없어야 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전쟁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 타락 후 세상이 처한 처지이기도 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 국가에 지경을 주시어 나뉘게 하시되, 인류애적인 관계 안에서 평화를 추구하도록 하셨다는 것을 앞에서 확인했다. 그러나 타락한 세상에서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고 조정하는 것은 효력 있는 ‘국제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양심에 자연법을 새겨놓으셨고, 도덕과 윤리 그리고 덕의 정신을 베풀어 주셨기에, 국가와 국가 사이에 관계를 규정하고 조정하는 국제법의 역할이 큰 것이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 그러한 것처럼, 국가와 국가 간에도 지켜야 할 법이 있고, 질서가 있고, 또 상호 책임이 있고 권리가 있다.

그러므로 부당한 전쟁이 있다. 이 모든 선한 경계와 법과 질서와 덕을 초월하여 타 국가에 피해를 주고 주권을 침탈하려는 전쟁은 부당한 것이다. 일방적인 피해를 주려는 전쟁으로부터 자신의 주권을 지키고 방어하려는 방어로서 전쟁은 합법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칼빈주의는 주변 국가가 부당한 전쟁으로 위험에 처할 때, 위험에 처한 국가를 형제애로 돕고, 혹은 부당한 전쟁과 폭압을 일삼는 나라를 국제 관계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느끼고 선한 역할에 나서고 제어하는 것을 옳게 여겼다.

즉, 국가 간에 선한 연대가 존재한다. 국제 관계의 복잡함과 인류 심리의 복잡함을 인해 이 짧은 글이 그 심오한 이치를 말하기에 한계가 있으나, 우리는 합법적 전쟁을 인정하고 부당한 전쟁이 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사도행전 17:26절에 있는 것처럼 국가의 경계와 지경을 주시어 살아가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므로, 타 국가의 경계와 지경과 그 안에 소득을 존중하는 일은 한 국가 안에서 사유재산이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 성경적 이치인 것과 다를 바 없다. 성도들은 교회에서 성도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시민적 지위를 소유하고 있다. 그리스도인 시민은 사회에 혹은 인류를 향해 빛과 같고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에 있어 그리스도인들의 어떤 역할과 소명이 없다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작정적 의지에 의해 때로는 악한 것들을 섭리적으로 이끄셔서 당신의 선한 목적을 이루어 가실 때도 있지만, 성도들은 교훈적 의지를 따라 선한 것을 추구하는 가운데, 선한 역할 속에서 선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 결과와 이득을 떠나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구속의 가치 안에서 교회를 이루는 동시에, 선한 보편 가치가 무엇인지 분별하여 시민적 삶을 살아가야 하기도 한다. 끊임없는 전쟁들과 분쟁과 갈등에 쌓여 사는 환경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적인 평화관을 정립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모든 것들 속에서 교회와 성도들이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