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향기 15] 구약과 하나님의 나라 11_김진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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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과 하나님의 나라 11

김진수 교수(합신, 구약신학)

 

앞에서 하나님을 대리하여 동물세계를 지배하는 아담의 역할이 노아를 거쳐 솔로몬으로 계승되는 것을 보았다. 식물과 동물에 탁월한 지식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는 솔로몬의 모습은 분명히 태초의 아담이 동물의 이름을 지은 일과 연관된다. 이는 인간을 만물의 지배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 확고하고 불변함을 알려준다. 시편 8편에서 다윗이 인간에 대하여 노래한 내용도 같은 사실을 증거한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6-8절). 솔로몬과 아담을 연결하는 구약계시의 의도는 “선악의 분별”이란 모티브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솔로몬은 왕으로 등극한 다음 하나님께 백성을 재판할 수 있기 위해 “듣는 마음”과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다(왕상 3:9). 이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아담의 태도와 대조를 이룬다. 둘의 상반된 태도는 상반된 결과를 낳았다. 아담은 낙원의 상실과 아울러 만물을 다스리는 지배자의 위치에서 세상과 힘들게 투쟁하는 자로 떨어졌다(창 3:15-19). 반면 솔로몬은 낙원의 회복과 아울러 세상을 다스리는 지배자의 권세를 되찾는다(왕상 4:20-28).

아담의 타락과 함께 생겨난 변화를 더 추적하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동물과의 관계에서 찾아온 변화이다. 홍수전 노아는 방주를 만들고 동물들을 방주 안으로 이끌어 들인다. 이 때 동물들은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간다(창 7:8-9 참조). 노아와 동물 사이에 어떤 긴장이나 불안이 보이지 않는다. 동물은 아무 저항 없이 노아의 인도에 복종한다. 홍수가 지속되는 기간에도 이 관계는 지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노아와 동물 사이의 평화로운 관계가 홍수 이전의 세상에 보편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노아가 특별히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특별한 일이었을 수 있다(창 6:8 참조). 홍수 이전의 세상이 폭력으로 만연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추측은 더욱 타당성을 얻는다(창 6:11 참조). 인간과 동물의 비정상적 관계는 홍수 이후를 기점으로 공식화되고 새로운 삶의 질서로 자리를 잡는다. 동물과 인간의 평화로운 공존은 지나갔으며 동물이 인간에게 저절로 복종하는 일도 없다. 이제 동물은 자신을 해칠 수 있는 인간을 두려워해야 하며 인간 또한 동물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을 수 있다(창 9:2, 5 참조). 인간의 지배권은 동물의 공격성에 위협받는다.

이는 훗날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을 얻는 과정에서도 대두되는 문제이다.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들을 단시일에 쫓아내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자손이 “번성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얻을 때까지 … 조금씩 쫓아내리라”(출 23:30; 신 7:22 참조)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놀랍게도 그 땅에 있는 들짐승 때문이다.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들이 갑자기 제거될 경우 들짐승이 번성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해칠 것을 염려하여 그런 말씀을 주셨다(출 23:29 참조).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 하여 광야를 지나는 동안 부르짖는 짐승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셨다고 말씀하신다(신 32:10).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길 경우 “들짐승의 이와 티끌에 기는 것의 독”(신 32:24)으로 그들을 벌하실 것이라고 경고하신다(겔 5:17; 14:15, 21; 39:4 참조). 이 경고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 실제로 응하였다(시 79:2; 80:13 참조).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망하고 사마리아 주민들이 우상숭배를 일삼자 하나님은 사자들을 보내셔서 그들 중 얼마를 죽이셨다(왕하 17:25-26). 경우에 따라 하나님은 메뚜기 떼를 보내셔서 범죄 한 백성을 벌하기도 하셨다(욜 1:4 참조).

이런 배경에 비추어보면, 다윗이 양을 지키기 위하여 사자와 곰을 쳐 죽인 일은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삼상 1 7:34-35). 그것은 타락 이후 인간 세상에 적대적이고 공격적으로 변해버린 동물세계에 대한 지배권의 회복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사무엘상 17장의 맥락에서 다윗이 사나운 짐승을 죽인 일은 하나님을 모욕하고 하나님 나라를 훼방하는 블레셋의 거인장수 골리앗을 죽일 일을 예고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사나운 짐승이 하나님 나라에 적대적인 세력과 연결되는 경우는 선지서에서 확인된다. 다니엘서는 사나운 괴물짐승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하나님 나라에 적대적인 세력을 묘사한다(단 7장 참조). 세상 나라가 사나운 짐승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굳게 설 것이다(단 7:18; 2:44 참조). 선지자 이사야는 종말에 있을 구원을 내다보며 “사나운 짐승”이 올라오지 않는 “거룩한 길”을 예언한다. 여기서 “사나운 짐승”은 문자 그대로 들짐승을 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대적인 세력을 가리키는 은유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시편에서 짐승은 우매하여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비유로 언급된다(시 49:20; 73:22 참조).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하는 악인을 황소, 개, 사자, 뱀, 독사 등에 비유하는 경우도 있다(시 22:12, 16, 21; 58:4,5; 140:3 참조). 타락 이후의 세상에서 인간에게 공격적인 동물과 하나님 나라에 적대적인 세력은 그 포학성과 잔인성에 있어서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이 종말의 회복된 세상을 내다보며 동물과 인간이 다시 평화롭게 공존하며 동물이 자연스럽게 인간의 지배에 복종할 것을 예언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사 11:6-8 참조). 특히 어린 아이가 “젊은 사자”(kepîr, 사냥할 만큼 충분히 자란 사자)를 이끌 것이라는 예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인간이 다시 동물세계에 대해 지배권을 행사할 것을 예고한다.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적대적인 세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을 가리키는 비유로 이해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종말에 타락한 피조세계가 새로워지며 그곳에는 더 이상 악의 세력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다.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그때에는 더 이상 전쟁을 연습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사 2:4; 미 4:3 참조). 이런 의미에서 다윗이 이방 민족들을 모두 정복하고(삼하 8:1-14) 솔로몬 시대에 평화가 이룩된 것은(왕상 4:20-28) 구속사적 차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태초에 아담에게 주어진 만물의 지배권이 온전히 회복될 종말을 앞당겨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신약은 구약이 예견한 종말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증언한다(막 1 15 참조). 예수님은 세상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을 회복할 둘째 아담이자 새 인류의 머리시다(롬 5:14; 엡 2:15 참조). 그러므로 예수님에게서 아담이 가졌던 지배권의 회복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베드로가 예수와 연합된 성도를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고 표현한 것은 분명히 예수 안에서 회복된 인간 본연의 지위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것을 알려주는 보다 구체적 언급이나 사건은 없을까? 칼케돈 신조(451 A.D.)의 가르침대로, 예수님은 한 인격에 신성과 인성을 분리되거나 혼합되지 않고 가지신 신-인(the God-man)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신 일의 어떤 부분을 따로 둘째 아담의 역할에만 돌리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분명히 아담의 역할을 완성하신 분이다. 이런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예수님이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막 1:13)는 마가의 설명은 주목할 만하다. 주석가들은 이 구절이 동물세계를 지배하며 동물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인간 본연의 역할과 위치의 회복을 나타낸다고 해석하기도 한다(예, R. Pesch나 R. A. Culpepper). 골즈워디(G. Goldsworthy)는 예수님이 바다 폭풍을 잔잔케 하신 일 등에 대해 “이런 사건들은 … 원래 아담, 첫 하나님의 아들에게 주어졌던 통치권을 반영한다. … 새 아담이신 예수님은 피조 세계와 악의 권세에 대한 인간의 통치를 회복하고 있다”고 말한다. 메릴(E. H. Merrill)도 예수님이 피조세계에 행하신 일들 가운데 많은 부분을 같은 관점으로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