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종교의 차이
복음과 종교는 겉으로 잘 구별되지 않는다. 복음과 종교의 가장 큰 차이는 마음의 동기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복음과 종교를 ‘참된 미덕’과 ‘보편적 미덕’으로 구분해서 설명한다. 보편적 미덕도 덕을 세우고 선을 행하지만 그 동기가 마음의 두려움이거나, 자존심을 세우는 교만이다. 마음의 두려움이란 “내가 이런 일을 하면 ~ 벌을 받을 거야”라는 두려움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이다. 교만은 “나는 이렇게 행동하는 부류의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이야”라는 동기로 선을 선택하는 것이다. 둘 다 선을 행하긴 하지만 마음의 동기가 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교만이라는 자존심과 두려움의 동기는 대부분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으로 작용한다. 사람들에게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나누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도 두려움과 교만이다. “나도 돈이 없는데, 내 것을 지금 나누면 내가 어려워질 때는 어떻게 되는가?”라는 두려움이 밀려오면 나누지 못하게 된다. 또 교만은 이 돈은 내가 노력해서 번 내 돈이라는 의식이 있을 때 나누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참된 미덕은 나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과 선 그 자체를 위한 선택을 한다. 복음은 내가 행한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행해주신 일을 믿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내가 존귀한 사람이 되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내가 가진 돈도 나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임을 알 때, 우리는 교만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또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면서 나를 구원한 인생임을 깨달을 때, 하나님이 지켜 주신다는 안정감이 두려움을 몰아내는 것이다.
성공을 향해 끝없이 달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두 가지 동기가 주로 작용한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도태될 것 같은 두려움이 열심을 내게 하는 동기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또 그것을 성취하게 되면 이제 교만이 작용한다. 교만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한 정죄와 비판으로 주로 나타난다. 결국 인간적인 윤리적 노력을 통해 무언가를 성취하게 되면 성취하지 못하는 자신을 실패자로 낙인찍던지, 아니면 성공한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던지 둘 중의 하나로 귀결된다. 즉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라는 열매를 맺게 된다.
팀 켈러는 <탕부 하나님>에서 비지니스를 윤리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업가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기업이 윤리적이 되면 사람들이 신뢰하게 되고 소비자가 더 제품을 좋아하게 되고 또 기업이 윤리적이 되면 일하는 직원들이 회사에 자부심을 가지기 때문에 제품의 질이 더 좋아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업이 윤리적으로 비지니스를 하는 마음의 동기,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자기의 이윤을 위해서이다.
이것은 종교를 가장해 교회 안에 침투해 오는 우리의 마음과 비슷하다. 결국 종교와 복음의 가장 큰 차이는 희생에 있다. 자기를 위한 모든 행동은 자기 자신에게 불리하면 일관성이 없어진다. 즉 손해를 보는 상황 속에서는 자신의 이익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죄를 짓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죄가 더 좋을 때, 죄를 더 사랑할 때 우리는 죄를 짓게 된다. 자신의 감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 자신이 손해가 되는 상황 속에서도 희생을 선택하며 하나님을 높일 것이다.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평판을 더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종교는 두 가지 동기 두려움과 교만이라는 뿌리에서 흘러나온다. 이 마음의 뿌리를 다루어주지 않으면 삶은 변화되지 않는다. 오직 복음의 동기만이 마음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이 주는 참된 안정감만이 우리를 사람들의 인정과 결과로부터 자유하게 해준다. 그리고 하나님과 선 자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준다. 종교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기본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복음을 우리의 삶에 적용시킬 필요가 있다. 내가 오늘 행하는 모든 선택의 순간 속에서 내 마음의 동기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을 하게 하는 동기는 두려움인가? 교만인가? 나를 위한 선택인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선택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