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과 하나님의 나라 6
김진수 교수(합신, 구약신학)
하나님은 온 세상을 정의와 공의로써 심판하시는 하늘의 대왕이시다
지난 번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여호와는 자기 백성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자-왕이시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구원행위에는 필연적으로 적들과의 전쟁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구약에는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을 적대시하고 심지어 그들에 대한 기억을 세상에서 지워버리려 하는 세력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시 83:5[4]). 이스라엘에 대한 그토록 강한 적대감은 고대 세상에서 흔한 영토분쟁이나 정치, 경제, 군사 차원에서의 패권다툼 이상의 근본적 대립을 나타낸다. 그것은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용인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신앙과 관련되며, 그런 의미에서 여호와께 대한 반역이자 도전에 해당한다(신 25:18; 시 2:1-3 참조).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적은 곧 하나님의 적이었다(창 12:3 참조). 그러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이름을 기억에서 지워버리려 하는 세력들을 향하여 그들의 의도와 행위에 상응하는 일을 선언하셨다(출 17:14; 신 7:23-24; 25:19 참조). 전쟁은 불가피했다. 구약에서 전쟁이 주요 이슈로 등장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전쟁이 없다면 여호와만을 섬기는 거룩한 나라가 세워질 수 없었을 것이며(출 19:5-6 참조), 이스라엘은 다신교적 이교도 문화에 동화되어 그 고유한 정체성을 가질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신 7:1-4 참조). 따라서 “전쟁의 야영지”(Das Kriegslager)를 “국가의 요람”(die Wiege der Nation)이라고 평가했던 벨하우젠(J. Wellhausen)의 말은 나름의 진리를 담고 있다.
그러나 모든 전쟁이 그렇듯이 “여호와의 전쟁”에도 폭력적인 요소가 동반된다. 그것도 지나치게 가혹하다 싶을 정도의 무서운 폭력행위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소위 “헤렘”(ḥērem) 전쟁이 여기에 속한다. 이 전쟁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적국의 모든 사람 즉 “남녀와 유아”를 가리지 않고 모두 “진멸”하는 것이며(신 2:34; 수 10-11장), 경우에 따라 가축들도 진멸의 대상이 되었다(신 13:5; 수 6:21; 삼상 15:3). 이것은 구약을 읽는 독자들에게 때로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되기도 하였다. 초대교회의 이단자 마르시온(Marcion)은 구약에 묘사된 하나님의 모습은 신약의 그것에 비해 열등하고 심지어 악하기까지 하다고 평가하며 구약을 기독교 정경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시온이 보기에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라는 여호와의 명령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는 신약의 가르침과 도무지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마르시온은 정죄되었지만 그의 입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는 19~20세기의 교회사가 하르낙(A. Harnack, 1851-1930)이 마르시온을 평가하며 한 말에서 뚜렷하게 확인된다: “2세기에 구약을 배제한 것은 잘못된 일이며 교회가 그것을 배격한 것은 잘한 일이다. 16세기에 그것을 유지한 것은 종교개혁이 피할 수 없었던 운명이다. 그러나 19세기 이후에도 여전히 그것을 개신교 정경으로 유지하는 것은 종교적, 교회적 마비의 결과이다.”
이런 평가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현대의 구약학자들 가운데는 대담하게도 헤렘 전쟁을 명하신 여호와께 대하여 “악마적이다” 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악마적인 주(主)가 지상의 자기 군대에게 악마적인 전쟁을 수행하도록 요구한다.” 코울스(C. W. Cowles)는 헤렘 전쟁에 반영된 하나님의 이미지는 “사탄보다 더 악마적이다”라며 망언을 한다. 이들은 구약의 내용이 지닌 특수한 역사적, 신학적 의미를 고려하지 않은 채 인간의 보편적 정서나 윤리에 호소하기에 그토록 외람된 주장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구약이 계시하는 하나님은 윤리와 관련해서도 매우 높은 기준을 가지고 계신다. 율법을 요약한 십계명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게다가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가난한 자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신다(출 22:22, 25; 신 10:18; 15:11; 시 68:5, 10; 146:9; 사 10:2; 렘 22:16; 슥 7:10). 하나님은 사회, 경제적 약자들의 생계를 위해 기업 무르는 제도(레 25:25), 일곱째 해에 밭을 묵혀두는 제도(출 23:11), 추수할 때 곡식을 다 베지 않고 떨어진 이삭을 줍지 않는 제도(레 23:22) 등을 마련하셨다. 밭을 묵혀두는 제도와 추수에 관한 제도는 들짐승을 배려한 것이기도 하다(출 23:11; 레 25:4-7). 하나님은 심지어 원수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져도 그것을 도와 짐을 내려주라고 말씀하셨다(출 23:5). 한마디로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신 분이다(시 103:8; 116:5; 렘 3:12; 호 11:8).
하지만 하나님이 용납하시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이다(출 20:3-6, 12-17).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온 세상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므로 심판받아야 하며 도덕적 타락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에 반하는 일이므로 용납될 수 없다. 여호와께서 명하신 전쟁에서 헤렘의 대상은 언제나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에 탐닉하는 자들이었다(신 7:25-26; 레 18:1-30 참조). 그들은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적대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여호수아의 정복전쟁에서 가나안 원주민들이 특히 그랬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 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일으키신 기적을 들어 알고 있었다(수 2:10-11 참조). 무엇보다도 그들은 여호와의 능력으로 요단강이 갈라진 사건을 지근거리에서 전해 들었다(수 5:1 참조). 그랬음에도 그들은 여호와께 대항하는 길을 택했다. 성문을 굳게 닫아 잠근 여리고와 이스라엘과 맞서 싸운 아이는 여호와께 대한 저항과 도전의 대표적 사례들이다. 여리고의 함락과 아이의 멸망을 지켜본 가나안 사람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마음을 완고히 하여 여호와의 군대인 이스라엘에 맞서 싸웠다(수 11:20 참조). 그들의 완고한 태도는 출애굽 당시 여호와께 도전한 바로의 완고한 태도와 흡사하다. 그들에게 기회가 주어졌다면 이스라엘의 이름은 역사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수도 있다(시 83:5[4] 참조). 헤렘 전쟁은 이런 역사적, 신학적 배경 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정의와 공의로써 심판하시는 하늘의 대왕이시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우상으로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곳에 설 자리는 없다. 물론 현 세상은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시는]”(마 5:45)는 일반은총의 원리가 지배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정하신 마지막 심판의 날이 오기까지의 기간에 국한된다(행 17:31; 히 9:27; 계 20:12-15 참조). 이 기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 죄인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은혜 받을 만한 때”이며 “구원의 날”이다(고후 6:2). 그 후에는 마지막 심판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심판을 앞당겨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임할 무서운 심판을 예시한다(요 3:18 참조). 구약 성경에 기록된 헤렘 전쟁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종말에 우상 숭배자들과 불의를 행하는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앞당겨 보여준다. 그것은 클라인(M. D. Kline)이 말한 “침입 윤리”(intrusion ethics)로서, 현 세상에 마지막 심판의 윤리가 침투해 들어온 것이다. 따라서 헤렘 전쟁은 일반은총이 지배하는 현재의 윤리적 잣대로 평가할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헤렘 전쟁에서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는 하나님의 왕권을 깨닫고 종말에 임할 심판을 대비해야 한다. 죄인들을 대신하여 심판받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