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처한 ‘오직 성경’
김병기 목사 (주의영광교회)
교회 타락의 근본 원인은 신앙과 삶의 유일한, 최종 법칙인 성경에서 멀어졌기 때문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특징은 “계시 의존적 신앙”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들의 신앙과 삶에 있어 가장 근본적이고 최종적인 권위는 목회자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교회 조직에 있는 것도 아니며, 오직 성경에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신자들이 신뢰하고 순종해야 하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물론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치는 귀한 직분을 맡은 선생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한 사람의 교훈으로 성도들을 미혹하는 거짓 선생들이 존재해 왔다 (벧후 2:1). 또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주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리고 성령의 전으로 세워져 가고 있는 영적인 공동체이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세상의 교훈을 따라감으로, 훗날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는 책망을 받을 교회들이 존재해 왔다 (계 3:1). 따라서 신자에게 있어서, 오직 성경만이 성령의 영감으로 주어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가지며, 오직 성경만이 성도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법칙이요, 최종적인 법칙이다. (딤후 3:16-17, 벧후 1:19-21, 엡 2:20, 눅 16:29,31, 계 22:18-19 등).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모든 시대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법칙이요 최종적인 법칙으로 받아서 그 권위 아래 순복할 것인가, 아니면 그 권위를 부인할 것인가 하는 영적 전쟁이 계속 되어 왔다. 실제로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오늘날까지 교회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영적 전쟁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면 교회와 기독교 신앙은 영적인 부흥기를 맞이하였고, 이 영적인 전쟁에서 실패하면 교회는 영적인 쇠퇴기로 들어갔다.
중세 후기의 교회가 교리적으로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하게 된 것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교회가 신앙과 삶의 유일한 법칙이요, 최종적인 법칙인 성경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이다. 당시의 모든 교회는 로마제국의 언어라고 할 수 있는 라틴어로 번역된 “불가타”(vulgata) 성경만을 사용해야 했다. 그것도 성직자들에게만 그 성경이 허락되었고, 라틴어 외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읽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암호같은 라틴어로 된 성경만을 사용하므로, 중세 시대의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교훈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 시대를 살아가는 교인들의 신앙적인 권위와 확신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유한하고 불완전한 사람들이 전한 종교적인 전승이나 종교회의나 로마 교황의 가르침이었다. 그 결과 중세 말기 교회의 모습은 성경을 떠난 종교가 보여 줄 수 있는 온갖 타락과 부패함의 온상이었다.
이를 치유하고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교회가 성도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법칙이요, 최종적인 법칙인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것을 인식한 믿음의 선각자들의 노력의 여명을 연 사람은 “종교개혁의 새벽별”이라 불리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수면서 신학자였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였다. 그는 당시 “교황이 행사하던 최고의 권위는 성경이 가져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라틴어로 된 성서를 최초로 영어로 번역하여 영국 국민이 자국어로 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 열린 콘스탄츠 공의회 (Konstazer Konzil, 1414~1418)에서, 존 위클리프는 라틴어로 된 “불가타”(vulgata)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였다는 죄목으로 이단 판결을 받게 되었고, 그의 저작은 불태워졌으며, 그의 시체는 부관참시되어 뼈까지 불태워졌다.
위클리프뿐만 아니라 보헤미아 (체코) 지방에서 종교개혁 운동을 하여 “종교개혁의 아버지”라고 불리운 “얀 후스”(Jan Huss, 1369~1415)도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이며, 성경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주장했다. 얀 후스는 보헤미아인을 위해서 라틴어 성경을 모국어로 번역했고, 특별히 자국민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모국어로 설교했다. 그러나 그 역시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소집된 콘스탄츠 공의회 (Konstazer Konzil, 1414~1418)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어 화형당했다. 이와 같은 지속적인 로마 교황청의 위협과 금지에도 불구하고, 자국민이 읽을 수 있는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과,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교하고자 하는 노력들은, 훗날 중세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개혁하려는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중세 교회의 교리적 부패와 도덕적 윤리적 타락에 과감히 맞서 16세기 교회 개혁의 불길을 일으킨 사람은 독일의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였다. 원어 성경 연구를 통해서, 당시 로마 교회와 교황의 가르침이 성경의 교훈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의 “만성 교회” (All Saints’ Church) 교회당 문에 “95개 논제”(95 Theses)를 게시함으로 종교개혁의 불꽃을 일으켰다. 루터는 1518년 로마 교황청을 대표하는 추기경 토마스 카제탄 (Thomas Cajetan)과의 논쟁에서, “로마 교황보다 공의회의 권위가 더 높으나 모든 인간은 오류를 범할 수 있으므로 기독교 신앙의 최종적인 권위는 교회가 아닌, 성경이 가진다”라고 했다. 이처럼 “오직 교회!”가 아니라 “오직 성경!”을 외쳤던 마틴 루터 역시, 원어 성경을 자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하였고, 비로소 독일 기독교인들은 교회와 성직자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누구나 자유롭게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오직 성경”을 외치며 중세 교회의 부패와 타락으로부터 교회를 회복하고 개혁하려는 시도는 바다 건너 영국에서도 일어났다. 특별히 14세기 말 이후 영국 옥스퍼드(Oxford), 레스터(Leicester), 노리치(Norwich) 등의 지역에는 “중얼거리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롤라드”(Lollards) 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성경을 신앙과 삶의 최고의 권위로 고백했던 그들은, 최초로 성경의 영어 번역을 추진했던 “존 위클리프” (John Wycliffe)의 추종자들이었다. 당시 개인의 성경 소지가 금지된 상황 속에서 성경을 읽을 수 없었던 사람들을 위해, 그들은 성경을 외워 가지고 광장에 나가 성경 말씀을 선포했다.
대표적인 “롤라드”는, 위클리프의 성경 번역을 도왔던 “니콜라스 히어포드”(Nicholas of Hereford, d. 1420)라고 알려지는데, 그는 1382년 그리스도의 승천 기념일에 영어로 성경 말씀을 선포하여, 영국 전역에 하나님의 말씀을 보통 사람들에게 전하는 롤라드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로마 교회는 이들을 이단으로 단죄하고 잡아들여 목숨을 빼앗았다. 1401년 이교도 화형을 승인하는 잉글랜드 법이 최초로 통과되면서 “윌리엄 소트레이” (William Sawtrey, d. 1401)가 화형을 당해 롤라드파의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롤라드 신앙 운동은 영국 사회의 저변으로 확대되었고, 다가오는 영국의 교회개혁의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16세기 영국에서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최고의 권위로 여기며, 비성경적인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개혁하려는 운동의 불꽃을 본격적으로 지핀 사람은, “영어 성경의 아버지” (Father of the English Bible) 라고 불리는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 1494-1536)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눈에서 가려진 것이 교회 내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며, 성경 없이는 사람들을 진리 안에 굳게 세우는 것이나, 진리를 깨닫고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깨달았다.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능통했던 그는 자신이 원어 성경을 읽으면서 받았던 은혜를, 일반 교인들도 받을 수 있도록 성경 번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국왕인 헨리 8세와 교회 성직자들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자, 그는 “하나님께서 저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다면, 쟁기를 가는 소년이 당신들보다 더 성경을 알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상대적으로 성경 번역의 자유가 보장된 독일로 건너갔다. 독일에서 그는 루터의 도움을 받으며 최초로 신약 성경의 영어 번역을 완성하여 1526년에 출판했다. 그 후 벨기에로 이주한 그는 계속해서 구약 성경도 번역하던 중 체포되었고, 이단으로 정죄되어 화형당했다. 윌리엄 틴들은 영국의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읽을 수 있도록 목숨을 걸고 성경을 번역했고, 그래서 후대에 사람들은 그가 번역한 성경을 “순교의 피가 묻은 성경”(The Bible in blood)이라고 불렀다.
중세 말기에 나타난 교회의 부패와 타락으로부터 교회를 회복하고 새롭게 하고자 한 16세기 교회 개혁 운동의 근본적인 정신을 한마디로 말하면, “원전(성경)으로 돌아가자”(Ad Fontes)였다.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종교적인 전통이나 종교회의나 교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하여 교회가 믿고 따라야 하는 교리와 신앙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법칙이요, 최종적인 법칙으로 삼는 신앙생활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핍박을 각오하고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까지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했고, 자국어로 설교를 했던 것이다. 그 결과 16세기 종교 개혁기를 거치면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성경 번역과 인쇄술의 발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모든 신자들의 손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 개혁기를 지나 17세기 근대가 시작된 이후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는 더욱더 큰 도전과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6세기 종교개혁 이전 중세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노골적으로 부인했던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손에서 성경을 빼앗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지하게 만들었다. 대신에 종교적인 전통이나 종교회의의 결정을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것으로 높여서, 신자들의 신앙과 행위에 대해 성경이 가진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권위를 부인했던 것이다.
그러나 17세기에는 진리 탐구의 최종적인 권위를 인간 이성에 두는 계몽주의 사조가 일어나면서, 모든 진리는 인간 이성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역시 인간 이성에 의해 판단을 받게 되었다. 인간 이성에 근거한 과학의 발전과 물질 문명의 발전에 매료된 근대인들은,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 이성의 힘을 무한히 신뢰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신적 기원과 무오성은 노골적으로 부인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신자들의 신앙과 삶의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법칙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는 심각하게 도전받게 되었다.
인간 이성의 절대성을 믿는 계몽주의적 관점에서, 성경의 권위에 대해 도전하였던 여러 주장 가운데 중요한 두 입장은, 소위 신학적 “자유주의”(Liberalism)와 “신정통주의”(Neo-Orthodox)이다. “자유주의”(Liberalism)는 인본주의 르네상스 운동이 낳은 계몽주의의 뿌리에서 시작된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인간 이성의 빛에 비추어 비평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무오한 계시의 말씀으로 받기보다는, 인간의 종교적 사상이나 종교적 체험에 대한 오류 가능한 인간들의 기록이라고 생각했다.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슐라이어마허”(Friedrich D. E. Schleiermacher, 1768-1834)는 종교를 인간의 “절대 의존 감정”(das schlechthinnige Abhängigkeitsgefühl)이라고 했으며, 성경은 초자연적으로 영감되었거나 무오한 것이 아니므로 진리의 궁극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인간 이성의 절대성으로 무장된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을 인간의 인식 한계 안에서 비평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고, 성경의 권위를 인간 이성의 발아래로 끌어내렸다. 결국 과학에 기반한 물질문명 발전의 근거가 된 인간 이성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현대인들은 물론, 그들에게 설득된 신학적 “자유주의”에 오염된 오늘날 신앙인들은, 더이상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받지 않게 되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오류가 있는 사람들의 기록이요, 신앙과 생활의 유일무이한 최고의 법칙일 수가 없었다.
이러한 자유주의자들의 도전에 대해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이 “신정통주의”(Neo-Orthodox)이다. 실존주의에 철학적 기반을 둔 신정통주의는 하나님의 계시를 강조했으나,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실존적으로 주관화시켜 버렸다. 대표적인 신정통주의 신학자이며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자”라고 불리는 “칼 바르트” (Karl Barth, 1886-1968)는 성경과 계시를 구별했는데, 성경은 참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증언이므로,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일부 모순과 문자적 오류가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성경은 자유주의자들처럼 이성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주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성경 그 자체는 오류가 있지만, 신자가 성경을 읽거나 선포되는 성경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닫게 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자유주의에 대한 반기를 들고 일어난 신정통주의는, 성경의 무오성과 신적 기원을 부인한 자유주의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성경을 개인의 종교적인 경험과 체험을 해석하는 수단으로 이해하게 하여, 교인들이 자의적인 신앙을 추구하게 하는 발판을 제공했다.
그러나 오늘날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은 성경의 권위에 대한 자유주의나 신정통주의의 도전보다 더 심각한 도전 가운데 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오늘날 현대인들의 사고와 문화의 구석구석에 깊이 파고드는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 또는 “탈근대주의”의 도전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 이성의 절대성과 합리성에 근거한 무한한 진보와 발전 가능성이라는 근대주의(Modernism)의 믿음에 대한 회의와 반대로부터 시작되었고, 보편적이거나 절대적인 진리를 부인하며, 모든 가치와 지식과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한다. 사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인간 이성의 절대성에 대한 계몽주의적인 근대의 믿음은 무너졌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서 절대적 권위를 지닌 성경의 권위 앞에 머리를 숙이고 성경으로 돌아오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성경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인간 이성에 기초한 진리를 추구면서, “상대적” 진리를 추구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진리는 다 상대적인 진리다”라고 주장하면서도, “모든 진리는 다 상대적인 진리다”라는 이 주장만은 절대적인 진리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오늘날 21세기 사상과 문화의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이거나 객관적인 진리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너도 옳고 나도 옳고 자기의 관점에서는 모두가 다 옳다는 상대주의를 주장한다. 모두에게 옳은 객관적 진리는 없으므로, 결국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이다. 이러한 태도는 성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의 말씀이라는 주장에 대해 수용할 수는 있지만, 성경은 결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상대적인 진리라는 것이다. 즉, 성경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관점에서 진리이지,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나 교인들이 절대적인 진리, 객관적인 진리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포스트모더니즘에 물들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상은 성경의 교훈을 상대적인 진리라고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성경을 받아들일 때, 자기가 원하는 말씀은 진리라고 생각하는 반면,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은 비진리로 여기게 된다. 즉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이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의 철저한 상대주의적 입장은, 객관적 또는 보편적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성경의 절대성과 기독교 교리의 객관성을 심각하게 손상시키고 있다.
오래전 사사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는 이스라엘이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갔다면, 오늘날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오하고 최종적 권위를 가진 왕의 말씀, 절대적인 진리의 말씀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기 쉽게 된 것이다 (삿 21:25).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딤후 4:3-4)
오늘날이 신앙과 삶의 최종적이고 유일한 법칙인 성경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가고 있는 시대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성경을 가까이해야 할 이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현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신학을 배우는 학생들은, 신학을 공부하느라 모든 신학의 뿌리요 원천인 성경을 읽을 시간을 갖기 어렵다고 하고, 신학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많은 신학자들의 수많은 이론을 연구하며 강의를 준비해야 하기에 막상 모든 신학을 판단하는 최종적인 권위를 가진 성경을 연구할 충분한 시간을 갖기 어렵다고 한다. 더구나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며 가르쳐야 하는 목사들은, 온갖 교회 행정과 다양한 사역에 매여 성경 말씀을 읽고 깊이 묵상할 시간을 내기 어렵다고 말한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반 교인들의 상황은 어떠할까? 장년들은 경제 활동과 여가 생활로 바빠서 성경을 가까이하지 못한다고 하고, 어린아이들과 청소년들과 청년들은 학원과 입시와 취업에 매여 성경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시대가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받고 있는 교회의 온갖 부정적인 모습들은, 신자들이 성경의 교훈을 멀리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신앙생활을 한 대가로 맛보는 쓰디쓴 열매들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성경을 무오한 절대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신앙과 삶의 유일한 최고의 법칙인 성경의 권위를 부인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살아가는 교회들이, 중세의 교리적 타락과 도덕적 윤리적 부패함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서는, 깨어서 성경의 권위를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신앙과 삶의 최종적이고 유일한 법칙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의 권위를 소중하게 지키며, 하나님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을 회복해야 한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종교 개혁기 당시에만 필요한 신앙 구호가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 특별히 포스트모더니즘에 포위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반드시 가슴에 새기고 실천해야 하는 진리다.
– 신간, <성경통독 문답집, 김병기 저, 경장출판사>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