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계절 특집]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읽기 (1)_이원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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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읽기 (1)

이원평 목사(춘천돋움교회)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작을 기독교세계관적 렌즈로 들여다보다

*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독후감을 4회에 걸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본문 인용/ <죄와 벌, 열린책들 간>의 허락을 받음.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인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Fyodor Dostoevsky, 1821-1881) 탄생 200주년인 2021년 이 가을은 우리에게 <죄와 벌>을 다시 읽을 충분한 동기를 제공해 준다.

저 젊음의 애욕으로 들끓던 카르다고가 없었다면,
저 음습한 베드퍼드가 없었다면,
저 치욕의 굴락 체험이 없었다면,
성 어거스틴도, 영원한 순례자 번연도,
서구를 향한 예언자 솔제니친도 없었을 것이다.

아, 광활하고 거친 시베리아여, 그대에게 복이 있을지어다! 두려운 신비의 땅, 우리가 아는 대문호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는 삶의 단절과 존재의 소외를 낳는 변방 땅 시베리아에서 재탄생했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는 그곳에서 살인범 라스콜리니코프를 구원으로 이끌었으며 시베리아 죄수들의 어머니가 된 ‘거룩한 창녀’ 소냐를 탄생시켰다.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돌아온 그는 불후의 장편 소설들을 이 세상에 내놓기 시작했고, 그 시작이 바로 <죄와 벌>이다. 유명 작가로서 러시아 통보지에 <죄와 벌>을 연재하면서 이제 대문호의 반열에 확고히 오른 그는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같은 대작들을 연이어 내놓으며 러시아 문학계를 이끌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시베리아, 대문호와 소냐는 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시베리아 유형소에서 유일하게 읽기가 허락되었던 신약성경을 통해 사상적이고 종교적으로 갱생한 도스토예프스키는 후기의 대작들에 무신론과 혁명적 서구 사상에 휩쓸렸던 지난 젊은 날 자신에 대한 반성과 시대적 성찰을 담아냈다. 시베리아 유형 이후 도스토예프스키는 작가로서 자신의 종교적 사명감도 완수해 나갔던 것이다. 때로는 암시적으로, 때로는 노골적으로!

서구 유럽을 향한 러시아의 갈망은 19세기에 그 절정에 달했고, 특히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 등 대도시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거대한 사회적 회오리와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본격적으로 본받고자 했던 서구에는 당시 정치적으로는 나폴레옹 3세, 철학적으로는 헤겔과 같은 자칭 초인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페테르부르크에 거주하던 청년이자 <가난한 사람들>로 화려하게 문단에 등단한 신인작가 도스토예프스키도 당대의 분위기에 휩쓸린 서구주의자였다.

그는 페트라셰프스키가 이끄는 모임을 통해 그 가능성을 모색했다. 그러다가 위기 의식을 느낀 짜르 니콜라이 1세의 전횡에 의해 일명 ‘페트라셰프스키 클럽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형대 위에 눈을 가린 채 묶여 있던 그는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극심한 공포감과 생의 초연함이라는 모순된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이 잊지 못할 사건은 그의 영혼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이후 그의 작품들 안에서 여러 캐릭터를 통해 반복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런데 사형 집행 직전에 황제의 특사가 말을 타고 급히 달려오며 집행 중지를 외쳤다! 사형대 위에 묶여 있던 죄수들은 특사가 외친 감형 선언에 의해 극적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이 일은 황제에 의해 세심하게 짜인 작품이었다. 특사에 의해 감형을 선고받은 도스토예프스키는 차디찬 바람을 맞으며 (“그러나 기분만은 좋게 하는”)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시베리아로 이송되던 그는 도중에 한 여인으로부터 “10루블 짜리 지폐가 표지에 숨겨진 복음서”를 몰래 건네받아 유형소로 가지고 들어가게 된다.

옴스크에서 유형소 생활을 마친 귀족 소위 도스토예프스키는 이후 일반병사로 강등되어 극지 세미팔라틴스크에서의 강제 복역을 마쳐야 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시베리아 유형 생활 중 그 복음서를 집중적으로 읽었다. 이로 인해 유형 생활을 마칠 즈음 그는 서구주의자에서 러시아주의자이자 대지주의자 그리고 정교회주의자로 확고히 변모해 있었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이미 18세기 초반 서구를 향한 러시아의 갈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초석을 놓았다. 표트르 대제는 네바 강변의 습지 위에 나무 등으로 기둥을 박아 세심하게 계획한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함으로 러시아의 ‘유럽을 향한 창’을 힘차게 열었다.

초인 라스콜리니코프의 등장과 끔찍한 ‘도끼 살인’으로 인한 고통이 시작된 곳도 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다. 그리고 라스콜리니코프의 구원도 페테르부르크 시내 중심가인 센나야 광장 근처의 네거리에서 시작되었다. 그 거리는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도 매일 거닐던 곳이었다. ‘창녀 구원자’로 등장한 소냐는 그 네거리에 가서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할 것을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요구했다. 그 네거리는 곧 십자로인데, 십자로는 독자들에게 죄인들의 구원이 이루어진 골고다의 십자가를 연상시킨다. 기독교(러시아정교회)에서 죄인의 구원은 무엇보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자기의 숨겨진 죄를 고백할 때 이루어진다. 그래서 소냐는 ‘은밀한 살인자’ 라스콜리니코프를 그 네거리 십자로로 인도하면서 그 앞에서 ‘공개적인 죄의 고백’을 촉구했다.
“일어나세요…… 지금 즉시 나가서, 네거리에 서서 먼저 당신이 더럽힌 대지에 절을 하고 입을 맞추세요. 그다음 온 세상을 향해 절을 하고 소리를 내어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세요. ‘내가 죽였습니다!’라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또다시 당신에게 생명을 보내 주실 거예요. 가실 건가요? 가실 거예요?”
“당신 지금 감옥에 대해서 말하는 거야, 소냐? 자수를 하라는 말이야?”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속죄하세요. 그래야만 해요.”

열여덟에 불과한 소녀, 그것도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인 창녀의 도전에 저항을 하던 강자 라스콜리니코프는 결국 그의 마음을 돌렸다. 초인이 비로소 인간성의 연대감을 되찾는 순간이다! 경찰서로 들어선 이 초인은 자수를 했다. 초인은 이제 범인(凡人)이 되었다. 그리하여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숭고한 결말을 우리에게 들려주게 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불현듯 무언가 그를 사로잡아서 그녀의 발에 몸을 던지게 한 것 같았다. 그는 울면서 그녀의 무릎을 안았다…… 처음 순간 그녀는 무섭도록 놀라서…… 그러나 곧, 바로 그 순간에 그녀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들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눈물이 그들의 눈앞을 가렸다. 두 사람 모두 창백하고 여위어 있었다. 그러나 이 병들어 창백한 얼굴에서는 이미 새로워진 미래의 아침노을, 새로운 삶을 향한 완전한 부활의 서광이 빛나고 있었다. 그들을 부활시킨 것은 사랑이었고, 한 사람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의 마음을 위한 삶의 무한한 원천이 간직되어 있었다.”

세상에, 창녀가, 그것도 이토록 연약한 한 소녀가 초인이자 살인자를 일깨워 구원하다니! 19세기 중엽, 아직 극히 보수적이었던 제정 러시아에서 창녀는 가장 힘없고 소외된 사회적 부류였다. 처음에 무허가 창녀였던 소냐도 시에 등록돼 ‘황색 감찰’을 받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집을 나가 독거를 해야만 했다. 그녀가 얻은 방이라는 것도 그저 남의 셋방을 막아 공간을 마련한 정도였다. 소냐는 가장 약자였고 게다가 지독히도 가난했다. 그 시대 러시아의 여성은 정상적인 일을 해서는 도무지 먹고 살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 약자 창녀가 강자 초인을 구원한 것이다. 지극히 다행스럽게도 강자 라스콜리니코프는 약자 소냐의 말을 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죄인(초인)들의 구원은 이처럼 ‘스캔들’ 중의 스캔들이다. 그러나 여전히 죄인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 달리신 힘없는 약자이신 메시아의 말을 들을 때이다!

소냐에 반해 이 초인, 살인범 라스콜리니코프는 어떤가? 초인은 사상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최강자의 위치에 오른 자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세상의 모든 규율과 법까지 스스로 초월한 강자였다. 그래서 “한 마리 이”에 불과했던 전당포 노파,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구두쇠 노파의 머리를 도끼로 내리찍었던 것이다. 그는 법과 규율, 윤리마저 초월한 초인이자 괴물이었다. <죄와 벌>의 두 주인공인 소냐와 라스콜리니코프는 이처럼 극과 극의 사회적, 종교적 위치에 있다.

초인 라스콜리니코프가 사용한 살인 도구는 공교롭게도 도끼였다. 도끼의 사용처 또한 극과 극이다. 러시아의 민초들에게 도끼는 숲과 나무로 뒤덮힌 곳에서 생존을 위한 필수 도구다. 동시에 그들의 종교 생활을 위한 거룩한 도구이기도 하다. 러시아의 농부들은 도끼로 땔감을 구하고 거룩한 이콘도 만들어 그 앞에서 기도를 드렸다.

창녀 구원자와 초인 살인자, 아무런 목격자와 증거물도 남지 않은 은밀한 살인 현장과 네거리에서의 공개적인 죄 고백, 살인 도구가 된 도끼와 거룩한 이콘을 다듬는 러시아인의 도끼는 <죄와 벌>의 핵심 사상과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시켜 주는 극과 극의 역할을 하고 있다.

모든 인간 안에는 극과 극의 가능성이 항시 존재한다. 약자 소냐와 강자 라스콜리니코프, 창녀와 초인, 땔감과 이콘과 같은 극과 극의 요소는 모든 인간 안에 상존한다. 인간에게는 죄인으로서의 일생과 의인으로서의 일생, 시민으로서의 일생과 초인으로서의 일생을 살 가능성이 주어진다. 그것은 한 사람의 일생이 끝나기까지 그 안에서 함께 간다.

<죄와 벌>에서 강자이자 초인으로 등장하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은 이미 작품 초반에 벌어진다. 그러나 고백한 죄인과 범인(凡人)으로서의 그의 모습은 마지막에 가서야 극적으로 드러난다. 이처럼 한 인간 안에서 죄와 선, 벌과 구원의 거리는 가깝고도 멀다. 그것은 극과 극이어서 한 인간 안에서 가능한 동시에 불능이 되기도 한다!

이미 도스토예프스키 자신 안에 그런 요소가 있었고, 그는 체험으로도 이 사실을 잘 알았다. <죄와 벌>에서의 소냐, <백치>에서의 미쉬킨 공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의 알료샤라는 지극히 선한 인물을 창조해 냈던 이 작가는 결코 성자가 아니었다. 그는 여러 여인들을 사랑했고, 때로는 거의 불륜에 가까운 치정극도 벌였으며, 한때는 사랑하는 부인마저 저버릴 정도로 구제불능인 도박중독자였다. 게다가 질투심 많은 사나이였다! 이러한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에서 소냐와 라스콜리니코프라는 극과 극의 캐릭터를 통해 자신 안에 있던 그것을 우리에게 강렬하고 리얼하게 보여주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