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신문학상/사모부 가작] 수필_82년생 예비 사모_정은혜 사모

0
84

82년생 예비 사모

정은혜 (열린교회, 강도사 사모)

 

어제와 오늘이 비슷하게 보이는 삶 속에서 주님의 보호하심과 무탈함의 은혜와 감사가 넘쳐나

이제는 사모가 되어야 하나 보다, 받아들여야 하나 보다. 그래도 여전히 사모라는 타이틀은 부담스럽다. 사모를 서원하고 기도하는 분들도 있으니 조심스럽긴 하나 나는 절대 사모가 되고 싶지 않았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도 하고 또 이런 사람이 오히려 사모가 된다는데 나는 누구보다도 사모가 되는 것이 싫은 사람 중 한 명이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나, 사모의 자리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아는 것이 나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고, 나의 감수성과 기질 상 사모는 많은 제약을 가져오기에 참 거부하고 싶은 자리였다. 전형적인 사모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내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기에.

어느 때나 아내의 자리, 엄마의 자리, 남편의 자리, 사장의 자리 등 역할이 주어지면 그에 따른 책임과 의무와 부담이 따라오는 것이 현실이긴 하다. 내 어머니는 사모여서 참으로 많은 직분자들, 성도들의 일종의 타깃이었다. 목사인 아버지는 인상이 좋으시다, 우리 목사님 최고시다, 목소리도 좋으시고, 찬양도 은혜스럽다 라는 등 호평이 많은 반면, 왜 그런지 사모인 어머니에게는 옷을 잘 입으면 잘 입었다고, 못 입으면 못 입었다고 말이 많았다.

누군가에게는 웃어 주고, 내게는 웃어 주지 않는다고, 누구는 예뻐하고 우리 애는 안 예뻐한다 하고, 심지어 기도하며 눈물을 보이는 것조차, 눈치 아닌 눈치가 보이는 위치였다. 궁핍해도 티내지 못하는 자리였고, 그럴 가능성은 없었지만 설령 부유했더라도 이 또한 자유롭지 못했으리라. 울어도 웃어도, 성도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자리. 투명 유리 어항에 갇힌 금붕어마냥, 일거수일투족 어딜 가든 관심을 받는 사모님 자리.

이에 관해 겪은 웃지 못 할 일을 이야기하자면, 내가 집 근처 새벽기도를 나간 적이 있었다. 전통 있는 교단의 교회였다. 뒷자리에는 무릎을 꿇거나, 바닥에 앉기 불편한 이들을 배려하기 위한 전형적인 긴 의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그 소속교인이 아니었고, 잠시 조용히 기도하러 온 것이었기에 의자 한 모퉁이에 앉아 한참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눈을 떠보니 나이 지긋하신(권사님?) 여 성도님이 “죄송하지만 여기는 우리 사모님 자리예요”라고 하지 않는가?

사모님 자리…… 뜨악! 그래서 그 자리를 양보 아닌 양보를 하고 조용히 일어나 다른 자리로 옮겼다. 그 날 그 사모님께서 기도하러 오시지 않은 것 같았는데, 기도하고 있는 나를 굳이 자리 이동시키는 위력이며, 그 교회 사모님께서 기도하러 오셨더라도 내가 먼저 앉아 있었다면 그 자리 주인께서는 오히려 내게 양보하셨을 것 같은데…….

목사의 딸로 자라, 어릴 때는 교회가 ‘아빠 교회’였기에 내가 대장 아닌 대장 같았다. 하지만 중고등학교 때부터는 목사 딸이라는 것을 굳이 티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고등학교 다닐 때 음악부에 속했는데 그리도 목사님 딸들이 많았다. 우연이었을까? 친구, 선후배 목사님 딸들이 반 이상은 된 듯했다.

그렇게 자연스레 피아노 전공을 하게 되었고 반주는 모조리 내가 도맡아 하게 되는 영광을 누렸다. 수요일, 주일 오전 대예배, 저녁예배, 성가대 반주, 부활절, 크리스마스, 부서별 찬양대회 등등. 엄마가 나를 피아노를 시킨 이유가 반주자들의 예기치 않은 공석을 막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나는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능이 있었기도 했고 초등학교 3학년 때 선교 순회 선박인 ‘둘로스 선교선’을 보고 선교사의 꿈을 키우며 음악선교사가 되기를 소원했었다. 이렇게 나는 자연스레 기독교 문화 가정에서 자라면서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교회를 애증 하는 자가 되었다.

그래서 20대 때는 소개팅 대상 경계1호가 신학생들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대학 졸업 후에는 단기선교도 다녀오게 되었고 선교단체에서 간사로 섬기게 되었다. 그 무시무시한 선교단체의 간사가 되다니! 그러면서 20대 후반, 30대 초반을 h보냈다. 이 때 간사와 관련된 재미있게 읽었던 김지윤 작가의 「사랑하기 좋은날」이라는 책이 문득 떠오른다. 수련회에 그리 열심이고 교회생활에 헌신적인 자매들이 결혼이 잘 안 되는 이유며 여성성을 찾아야한다는 에피소드 같은 내용들.

이 책을 보며 내가 너무 전투적이어서 소개팅에 실패하고, 너무 헌신적이서 형제들이 부담스러워하나 싶어 내 자신을 비추어 보았다. 특히 선교단체에 있으니 나의 경계대상 1호들과의 만남도 성사되었다.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확실히 하면 될 것을 분명 분위기도 좋았고 식사며 대화도 즐거웠는데 돌아가면 감감무소식이었던 경계대상 1호들. 용기 내어 다음 만남을 이어가시겠느냐 라고 여쭈어 보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기도해보겠다, 사모감이 아니라는 등, 거절의 이유도 참 신학적으로 정중히 대던 분들이었다.

그렇게 나의 짝을 찾던 시절을 지나, 34세에 결혼도 하고 아이가 둘인 엄마가 되었다. 남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 남자를 만나기 위해 그 간의 나의 맘고생이며, 기다림의 결실이라 여겼기에 귀하고 귀히 여기며, 평범한 직장 생활하는 형제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그런데 과거형이 되어버린 평범한 직장인이다. 예상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남편이 강도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예비 목회자 사모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평범한 직장인을 만나서 신혼생활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나의 가정에 허니문베이비가 찾아와 신혼 때부터 온갖 낯선 생활의 연속이었다. 신혼집도 낯설었다. 나는 단기선교1년 기간을 제외하고 한 번도 집을 떠나 살아본 적이 없었다. 결혼하고야 부모님 곁을 떠난 전형적인 경우이다. 임신까지 한 상황에 모든 것이 결혼과 동시에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 때 하필, 나의 부모님은 몽골로 선교를 나가고 한국에 계시지 않았다. 남편은 직장 특성상 야근이 필수인지라, 밤 12시면 일찍 들어왔다. 밤에 들어와 새벽에 나가고 내 곁에 있어주고 싶어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입덧이며, 나 혼자 모든 이런 변화를 감당하기에 서럽고 벅차 울다가 지쳐 침대에 쓰러져 잠들었다 깨어나도 나 혼자였다. 정말 다시 생각해도 눈물이 날 정도로 외로웠다.

그렇게 임신 중기를 지나고 드디어 남편과 같이 시간을 보낼 여름휴가가 주어졌다. 우리가 다니던 목사님의 권유도 있었고 남편도 총각 때 신학교 가기를 원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신랑만!! 공부 차원으로’라는 생각에 신학교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전도사 목사는 절대로 되지 말고, 공부 차원으로.

다만 선교사의 꿈은 호의적이었기에 선교사가 되기 전 신학공부는 해 봐도 좋을 것 같았다. 신학교를 가려면 우선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데, 그러면 나와 있는 시간도 많아 질것이고 내가 덜 외로울 것 같았다. 곧 아기도 태어나는데 혼자는 자신이 없었다. 직장을 그만두게 되자 주변에서 그 좋은 직장을 왜 그만두느냐고, 신학 공부도 좋지만 1년 휴직하고 다니라고, 유혹하는 말들이 우리를 고민케 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이왕 신학교 가는 것 공부에 전념하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신앙양심상 세상에 한 발을 담그고, 휴직하는 건 언제든 돌아갈 안전장치를 만들어 놓는 것 같아 단호히 뿌리쳤다. “무슨 소리냐 우리는 사표 쓴다” 하며 신학교지원을 하여 합격하고 신학생이 되어버렸다. 나의 경계 대상 1호였던 신학생. 이때도 내 마음속에 ‘목회는 절대 아니다. 신랑만 공부하는 것이다. 공부만……’이라는 다짐을 굳게 하고 있었다.

사람이 보든 안 보든, 티가 나든 안 나든, 나와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부끄럼 없이 충성되게 해야

새해가 되어, 아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남편은 신학교에 가버렸다. 헬라어 공부를 시작으로 야근, 직장생활보다 더 힘든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는 태어났는데 당장 퇴직금으로 생활하며, 둘에서 셋이 되었는데, 기쁨도 잠시 현실은 현실이었다. 신랑은 1학년 때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우리는 기도를 많이 해야 했다.

기숙사 생활. 이건 예상치 못한 난관이었다. 신학교를 보낸 이유 중 하나가 나와 시간을 보내고 태어날 아기를 같이 양육함이고자 했는데, 월요일에 기숙사에 들어가면 금요일 오후에 오는 남편을 기다리며 화, 수, 목 신생아와 함께 단 둘이 지내게 되었다. 이건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기저귀 값이며, 분유 값이며, 학비며, 생활비며, 뒤 돌아보니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셔서 부족함 없이 은혜로 지내왔음을 고백하지만, 그 때는 정말 막막했다. 전도사도 아니고, ‘학생‘의 신분이었기에 그렇다.

나도 이제 곧 사모가 된다고 한다. 남편은 과정에 따라 강도사가 되었고 결혼도 했기에 목사고시를 보고 합격하면 목사가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 때 아내도 같이 가서 면접을 본다고 하는데, 나는 가서 뭐라고 해야 할지 무척 고민이 된다. 남편이 공부하고 사역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아내이기에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서 공부하고 설교 준비하던 남편에게 감히 한 마디 했었다.

“주여, 부족한 자 쓰지 말고 준비되고 똑똑한 자 쓰시옵소서. 저희는 아닌 것 같습니다.”

둘 다 웃고 말았지만 남편도 막상 신학을 공부하니 신학이 왜 이렇게 어렵냐고, 하나님 믿기가 너무 어렵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한다. 나 또한 아직 남편이 M.div인지 Ph.D 인지 전공이 무엇인지 늘 헷갈린다. 그리고 목사 딸인데도 교단이 합신인지 합동인지 통합인지 장신인지 이것도 알려주면 그때뿐 관심도 없지만 잊어버리고 만다.

신학교에 가게 되고, 졸업하고, 박사 과정 준비하며, 큰 딸아이 둘째 아들아이 잘 자라고 있고,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만나의 삶과 은혜의 삶으로 하루하루 지내고 있다. 신학생들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사모의 삶이 어떠한지 잘 알기에 나에게 사모의 자리 위치는 더욱 두려운 자리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온 몸으로 거부하고 싶었으나, 이 자리까지 내 인생이 흘러오게 되었다. 이 또한 주님의 큰 그림 안에서 보면 이끄심일 테고 아직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향하신 계획하심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그 계획하심이 우리를 통해서 큰일을 행하시고 북한선교에 마음을 주셔서 쓰실 것이라는 막연함, 허황된 기대가 아니다. 큰일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릇도 되지 않는다. 부족하고 아직도 공부해야 할 것이 많기에 그렇다. 물론 써주신다면야 감사하지만 써 주신다고 해도 이 또한 기도를 많이 해보고 결정해야 하는 부담스러운 일로 다가온다. 사실 ‘세계선교를 위해 이왕 쓰는 것 크게 쓰시옵소서,’ 이런 기도는 안한 지 오래다.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내 나이 마흔, 내 눈앞에 보이는 내 식구들, 부모님, 직장동료들 그리고 내가 섬기고 있는 우리교회 식구들, 내 삶의 바운더리 안에서 내 이웃을 잘 섬기는 일을 감당하기에도 하루하루가 버겁다. 두 아이 양육하는 것도, 직장생활을 하는 것도, 하루가 일주일이 바삐 지나간다. 그러면서 평범한 일상 속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사건사고 없이 어제와 오늘이 비슷한 삶 같아 보이더라도 이 삶 속에서 주님의 보호하심과 무탈함의 은혜와 감사가 넘쳐나는 것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아직도 나는 내 남편이 목사가 되는 것이 낯설고, 애써 ‘직위만 목사인 것이야, 나도 사모지만 사모 아니야’ 라고 내 자신과 타협 아닌 타협을 하고 있다.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은 요즘인데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딸아이가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기에 밤길이어서 더 주의 깊게 가사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나는 그 노래가 아이가 지어낸 노랫말인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내 상황에 딱! 맞는 주님의 목소리? 응답?처럼 다가왔다.

“밤에 피어도 꽃이고, 낮에 피어도 꽃이고, 아무 데나 피어도 꽃이고, 몰래 피어도 꽃이고, 길가에 피어도 꽃이고, 이름 없이 피어도 꽃이고, 모두가 꽃이야‘

딸아이가 흥얼흥얼대는 데, 우리 상황에 맞는 노래이며 주님의 위로처럼 들려왔다. 그러면서 운전하고 있는 남편의 뺨을 쓰담쓰담해 주었다.

사실 남편은 전혀 기독교적인 배경이 아닌 곳에서 자라왔던 사람이, 남한에서의 대학생활, 직장생활, 그 어려운 신학공부를 마흔이 넘어서 하고 있는데 안쓰럽기도 하고 지금 우리가 한 선택이 잘 한 것인지 흔들릴 때도 있다. 계속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더라면, 두 아이들에게 부족한 것 없이 더 해 줄 수 있었을 것 같고, 나도 경제적으로 좀 누리며 살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아쉬움과 후회가 드는 것이 사실이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신학을 해서, 간혹 주위에 조롱 아닌 조롱거리도 되고, 쉽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는 것도 자존심 상하고, 내가 왜 진짜 고생을 사서 하나 싶다가도 사실 답은 잘 안다. 머리로는 안다. 익히 충분히 안다. 다만 흔들리고 현실 앞에서 두려울 뿐이다.

그런데 이제는 전과 같이 많이 두렵지는 않다. 10을 기준으로 전에는 9까지 두려웠다면 그간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보호하심을 알기에 8, 7, 6으로 낮아지는 것이지, 완전히 두렵지 않다고는 할 수 없다. 이것이 신앙생활이고 믿음이 자라가는 것일 테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분의 크기를 경험하면 할수록 조금 더 담대해 질 수 있겠지라고 생각해 본다.

인간인지라, 물질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현실 앞에서 힘겨울 때도 있다. 흔들리는 바닷물 요동치는 내 마음 앞은 홍해 뒤는 군대라는 가사의 찬양을 들으면 어찌나 위로가 되던지. 하나님 하시는 일을 보라. 그렇지, 사모의 길 뿐 아니라 신앙인이라면, 십자가를 따르는 자들이라면 세상과 부딪치지 않을 수 없고 가치관이 전혀 다르기에 우리는 세상에 속했지만 세상과는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리라.

사모의 자리는 여전히 부담스럽다. 참 어려운 자리인 것 같다. 그런데 이 이면에 내가 왜 그토록 사모가 되는 것이 싫었을까 생각해 보니 어렵고 힘든 길이고 가기 싫은 길이고 손해 보고 남들 섬기고, 내가 죽기 싫은 나의 죄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누구나 편하고, 누리고, 잘나고 싶고 남들이 나를 부러워했으면 하는 마음인ㄴ데 그에 반대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토록 거부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도 부자이고 싶고, 부자이면서 베푸는 삶을 살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는데,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하는 말씀처럼 사람의 죄성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악하고 죄라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 내가 제어하기 쉬운 게 아닐 터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음시고 부활하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기에 이 땅 가운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 일 테고.

난감하다. 이제는 진짜 사모가 되어야 한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주위에서 내가 사모하면 잘 할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 잘 해야 한다. 이왕 하는 것 어느 자리나 마찬가지이다. 주어지는 직책에서 최선을 다해서 잘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해야 한다. 사람이 보든 안 보든, 그 일이 티가 나든 안 나든, 나와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부끄럼 없이 충성되게 해야 할 것이다. 묵묵히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수상소감> 무얼 하든지 성실히

아침에 수상 문자를 받고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참 좋았습니다. 아이들 재우고 밤늦게 부담 없이 쓴 글이었는데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글 솜씨를 뽐내보는 것이었는데 하는 안타까움마저 드네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변에 자장면으로 한 턱을 내야 하게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지친 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격려가 되고 가족에게는 삶의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쑥스럽게도 주위에서도 이런 재주가 있었냐고 하시네요, 나서는 것 별로 안 좋아하는데 상을 받다니 한편 부끄럽기도 합니다. 부족한 글에 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가족들과 문정식 담임목사님과 사모님, 성도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사모의 역할을 포함하여 앞으로 제가 어디에서 무얼 하든지 주 안에서 성실히 잘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