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신문학상/장년부 대상] 소설_호수구름 마을 사람들(2)_권중분 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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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호수구름 마을 사람들(2)

권중분 (노원성도교회, 권사)

아름다운 부활절

주일이 되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부활절이다. 아침식사를 하고 은이와 자야는 들판을 뛰어다니다가 뒷산에 올라갔다. 뽀삐가 자라는 비밀 풀밭으로 갔지만 이미 훌쩍 자라나 억세어져 있었다. “자야, 뽀삐가 커버려서 못먹겠대이, 미안해서 어예노 어이?” 은이가 자야에게 미안해한다. “친구야 괜찮대이, 우리 내년에는 일찍 와보자.” 자야가 말한다. 아이들은 아쉬운 마음으로 산을 내려가다가 산기슭에서 통통한 찔레의 순을 발견해서 꺾어 먹으며 기뻐했다. 예배당의 종소리가 들린다. 찔레 숲 위의 참나무에 앉았던 종달새 두 마리가 종소리에 놀란 듯 포르르 날아오른다. 새들은 쌍곡선을 그리며 들판을 지나서 멀리 호수 건너편 밤나무골로 날아간다. “자야 초종친대이, 얼러 교회 가자. 주일학교 시작한다.” “응” 자야와 은이는 찔레를 양손에 가득 들고 후다닥 뛰어서 교회로 갔다.

재종이 울리기 전에 은이와 자야는 나무의 나이테 무늬가 새겨진 예배당의 마룻바닥에 나란히 앉았다. 은이와 자야는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전도사와 주일학교 교사와 아이들에게 찔레를 나누어 줬다. 곧 예배가 시작되었다.

“할렐루야 우리예수 부활승천 하셨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영광 주로 오시네.” 아이들이 부르는 기쁨의 찬양이 예배당을 가득 메우고 창밖으로 퍼져나간다. 전도사가 요한복음 20장을 본문으로 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 설교를 했다. 설교를 마친 후에 전도사가 질문을 했다. 첫째 질문은 이른 새벽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이 누구인가였다. “막달라 마리아예요.” 자야가 대답했다. 아이들은 대답을 잘했다. 칭찬을 받은 자야는 은이를 보고 웃는다. 은이도 자야를 보며 웃는다. 예배 후에 전도사는 선물 광주리를 가져와서 아이들에게 삶은 계란 한 알과 건빵과자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은 “우와, 고맙니대이.”하고 즐거워하며 감사의 인사를 한다.

집으로 간 은이는 계란을 찬장에 넣어두고 건빵봉지를 들고 평상에 앉았다. 행복한 마음으로 부활절 노래를 부르며 건빵과자를 먹었다. 그때였다, 사랑방의 문이 열리더니 진청색 양복을 입은 은이 아버지가 나왔다. 그리고 ‘우와! 세상에, 이렇게 놀라운 일이!’ 함박산 산등성이에 사시는 장 아저씨가 문지방을 넘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칼라가 넓고 소매와 바지 길이가 몸에 비해 깡총한 청색 줄무늬 양복을 입고 있었다. 옷의 길이가 짧아서 그의 앙상한 팔다리가 두드러져 보였다. 그는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동그란 유리알 안경을 쓰고, 손에는 목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가 끼고 있는 안경 때문에 함박산이 아닌 문명 세계에서 온 사람으로 보였다.

“은아 어른께 인사드려야지.” 은이가 장 아저씨를 쳐다보고 있자 은이 아버지는 주의를 담은 눈길을 딸에게 보내며 말한다. “어른 오셨니껴?” 은이는 평상에서 일어나 반가움이 가득한 얼굴로 장 아저씨를 보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자-가 우리 집 막내아이껴, 아직 철이 없니더. 그래도 심부름을 잘 가잖니껴?” 아버지의 말이 끝나자 “심부름도 잘하고 고맙니더……,” 푸르스름한 빛의 유리알 안경을 콧등에 고쳐 얹으며 장 아저씨가 말한다. 장 아저씨의 집에 자주 갔지만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왜냐하면 함박산에서 만난 그는 언제나 한센병의 흔적이 있는 얼굴을 정면으로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키가 컸고 나이는 사십대 초반으로 보였다.

은이는 장 아저씨의 출현에 놀라서 건빵을 한꺼번에 두개나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리고 장 아저씨의 동작을 하나하나 조심스레 지켜보았다. 아저씨는 노린내 나는 양들의 우리를 오랫동안 들여다보다가 은이 아버지에게 “제가 양젖을 먹어서 이래 움직일 수 있니더. 고맙니더.” 라고 말했다. “양젖은 선교사님들 덕분에 먹으이께네 그분들한테 고마워하시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지요. 저도 빈혈 때문에 자주 쓰러졌는데 이젠 좋아졌니더.” 얘기 후에 장 아저씨는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약간 절면서 신중한 걸음으로 교회마당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교회 출입문 앞에서 잠시 양복을 매만지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은이는 한참 동안 멍한 표정으로 장 아저씨가 들어간 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기 손등을 꼬집어 본다. “아야! 아픈 거 보이 진짜대이, 함박산 아재가 오신 거 맞대이.”하고 말하면서 활짝 웃었다.

자야가 와서 이따가 씨감자를 삶아서 달구지 밑에 숨어서 먹자고 꼬드겼다. “자야! 씨감자 먹으면 클(큰일)난다, 엄마한테 실컷 뚜드리 맞는대이.”, “그리고 엄마가 우리를 찾다가 안 보이면 달구지 집으로 찾아 온대이. 달구지 밑에 들어가지 말고 마당에서 얌전하게 놀라캤잖아.”라고 은이가 말했다. “나중에 감자 심고 남으면 삶아서 마루에 앉아서 같이 먹재이. 큰 오빠가 씨감자하고도 남을 꺼라 그캤다.” 은이는 서운해 하는 자야를 달래듯 말했다.

은이는 장 아저씨가 오신 것을 자야에게 말해 주었다. “히야 잘 됐대이. 인제 장 아재 행복 시작이대이.” 자야가 반갑고 놀란 얼굴을 하고 있다가 은이의 과자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은이는 “야야, 니 하마 과자 다 먹었나? 어이?” 라며 건빵 봉지를 자야에게 내민다. 건빵을 먹으며 두 아이들은 교회의 창문에 기대어 서서 장 아저씨가 예배당의 맨 앞자리에 책상다리를 하고 단정하게 앉아 있는 것을 들여다보았다.

장년 예배가 시작될 시간에 은이와 자야도 예배당에 들어가 앉았다. 장 아저씨의 모습은 거룩하고 아름다웠다. 부활절 설교가 선포되는 예배당은 성스러운 빛으로 가득했고 창밖에는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예배당의 마룻바닥과 사람들에게 비춘다. 교회 마당의 나뭇가지에 앉은 새들이 명랑하게 노래한다. ‘장 아저씨가 오시다니’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부활절이라고 은이는 생각했다.

예배가 끝난 후에 마당으로 나온 은이와 자야는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밤나무골로 모험을 떠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야! 밤나무골 가는 거 미루지 말고 올겨울에는 꼭 가재이.” 은이가 밤나무골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좋대이, 올겨울에는 꼭 가자꼬, 약속한대이.” 자야가 말했다. 아이들은 약속의 의미로 서로의 새끼손가락을 걸고 흔들었다.

산 위에서

부활절이 지난 후에 교인들과 마을 사람들은 지게에 먹을거리와 짚단과 여러 가지 도구들을 담아서 지고 함박산의 장 아저씨 댁으로 올라갔다. 은이 아버지와 전도사님은 나무 사다리를 걸치고 지붕에 올라가서 썩은 짚을 걷어내고 빗물이 새는 곳을 흙으로 바르고 지붕의 허술한 곳을 보수했다. 지붕의 상태를 꼼꼼히 살펴본 후에 새 짚단으로 지붕을 이었다. 김집사와 이집사는 낫과 호미와 괭이로 마당의 잡초를 제거했다. 마을에서 함께 온 식이 아버지와 희야네 아버지는 흙을 개어서 장 아저씨네 흙벽을 든든하게 덧대어 바르고, 봉당도 흙으로 쌓아 올렸다.

둘째 날에는 흙에 지푸라기를 섞어서 흙벽돌을 찍어내어 마당 한쪽에서 말리기 시작했다. 셋째 날에는 마당의 낡은 화덕을 정리하고, 흙으로 이겨서 새로운 화덕을 만들었다. 들쑥날쑥하게 자란 싸리나무 울타리를 다듬고 사립문을 새로 만들어 달았다. 열흘이 지난 후에 다시 함박산으로 올라갔다. 반듯하게 만들어진 흙벽돌로 본채와 연결해서 조그마한 부엌을 달아냈다. 장 아저씨의 집은 노란 볏단을 예쁘게 인 지붕과 흙벽돌로 달아낸 부엌으로 인해 제법 산뜻해졌다. 울타리도 말끔해져서 함박산과도 잘 어울렸다. 장 아저씨는 감사하다고 거듭 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장 아저씨를 짓누르던 짙은 병색과 황폐함과 고통이 그 아름다웠던 부활절에 그를 떠나 버린 일이다. 이제 장 아저씨는 주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산에서 내려와 예배당으로 왔다. 몸에 비해 깡총한 청색 양복을 입고 푸르스름한 빛깔의 안경을 코에 걸고 계곡 사이로 난 길을 성실하게 걸어왔다. 가끔 그의 손엔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산나물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그의 모습엔 그전에는 볼 수 없었던 평안과 소망이 깃들어 있었다.

계절은 흐르고

부활절이 지난 농촌의 봄은 더 분주해졌다. 소달구지가 삐거덕거리며 농로를 다니고 밭에는 농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집집마다 쟁기질을 말쑥하게 해놓은 밭이랑에 땅콩을 심고, 참깨, 감자, 고추, 고구마를 심었다.

은이네 집에서는 오월의 두 번째 토요일에 고추와 고구마를 심었다. 학교에 갔다 온 은이는 양들을 미루나무 풀밭으로 데리고 나가서 말목에 매어두고 밭으로 갔다. 우선 모종을 이랑의 구멍에 넣는 일을 했다. 은이의 부모님은 고추와 고구마 심기가 어느 정도 끝나자 호수 근처에 있는 밭에서 쟁기질을 하고 있었다. 소가 송아지를 낳아서 쉬어야 하는 바람에 은이 아버지가 몸에 쟁기를 걸고 엄마가 쟁기를 잡고 이랑과 고랑을 만들고 있었다. 호수에서 모종에 줄 물을 나르던 작은 오빠가 물 나르는 일을 마쳤을 때, 은이는 작은 오빠에게 밭둑에 있는 감나무 그늘에서 쉬라고 하고 주전자에 물을 담아 모종에 물을 부었다.

수업을 마치고 온 은이의 큰 오빠가 밭으로 와서 동생들을 칭찬하면서 눈깔사탕을 하나씩 주었다. “오빠야! 사탕이 어디서 났노? 어이? 히히.” 반갑게 사탕을 받으며 은이가 말한다. 큰 오빠는 호수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이 부탁해서 지렁이를 잡아주었더니 용돈을 주었다고, 그것으로 사 온 것이라고 한다. 그는 동생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싱긋 웃으며 이랑을 따라가며 갈무리를 한다. 밭에 파종을 하고 모종을 심고 나자 기다리던 비가 내려 모종들이 씩씩하게 자라났다.

꿉꿉하고 지루한 장마철을 겪으며 여름이 되었다. 비가 아주 많이 올 때는 함박산의 계곡물이 불어나 물살이 거칠어서 양젖 배달을 드문드문 다녔다. 은이는 여느 때 처럼 학교에 다녀오면 양들과 소들을 돌봤다. 아직 코뚜레를 하지 않은 어린 송아지는 천방지축으로 껑충거린다. 날뛰는 송아지를 돌보기 위해 목줄을 매어놓았다. 어느새 송아지도 제법 고분고분해져서 은이와 함께 산과 들판으로 나들이를 한다.

산들바람이 불고 가을이 찾아왔다. 교회 마당에는 채송화와 국화가 피었다. 코스모스가 한들거릴 무렵, 마을을 둘러싼 산과 들녘이 단풍으로 곱게 물들기 시작했다. 논에는 벼들이 점점 누렇게 익어가고 밭에는 이미 가을걷이가 시작되었다. 산 아래의 과수원에는 사과가 빨갛게 익어가고, 산에는 밤들이 영글고, 집집의 감나무에는 감들이 노랗게 익어갔다.

정읍에서 온 행복

가을빛으로 물들어가는 9월 끝자락의 오후였다. 정장을 입고 머리를 쪽진 낯선 여자, 검정색 바지에 황토색 티셔츠를 입은 어린 남자아이, 분홍색 바지와 흰 티셔츠를 입은 여자아이가 마을 입구에 나타났다. 그들은 갈림길에서 마을을 한참 둘러보더니 미루나무 군락이 펼쳐진 호숫가 길을 들어서서 은이네 집으로 걸어왔다. 여자는 큼직한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아이들은 오래 걸어서 지친 듯 마당 평상에 걸터앉았다. 아이들의 엄마인 여자도 평상에 보따리를 내려놓고 앉았다. 여자는 사십 대 초반이 되었을 것 같았고, 아이들은 초등학생으로 보였다. 아이들이 목이 마르다고 하자 여자가 우물가로 가더니 펌프로 물을 잦아서 바가지에 담아 아이들을 차례로 먹이고 자기도 마신다. 그때 은이가 양들을 몰고 집으로 왔다. 처음 보는 얼굴들에게 인사를 한다. “손님 오셨니껴? 우리 엄마는 밭에서 일하시는데 가서 모시고 오께요.” 아이들 엄마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아니랑께, 기다리고 있을게.” ‘아니랑께가 무슨 말이지? 처음 들어보는 말이대이……’라고 생각하며 은이는 양들을 우리에 몰아넣고 우물가로 가서 물을 퍼서 손님들에게 가져다 주고, 다시 우물로 가서 물을 마시고 세수를 한다.

해질 무렵, 은이 엄마가 집으로 왔고 손님들에게 인사를 한다. “어서오시소오, 시장하시지요, 저는 현이, 선이, 건이, 찬이, 은이 다섯 남매의 엄마이고 배집사라 캅니다. 호호, 우선 식사부터 해야 되겠니더.” 손님인 여자는 아이들과 정읍에서 일주일 전에 출발해서 시댁에 머물며 물어물어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그녀는 정읍댁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아이들은 남자아이는 13살이며 전진이라는 이름이고 여자이이는 11살로 선화라고 불렀다. 은이는 아이들과 방으로 들어가서 많이 읽어서 닳은 그림책을 보며 금세 친해졌다.

은이 엄마가 부엌으로 가자 여자도 따라 들어간다. 정읍댁의 이야기를 들으며 은이 엄마는 가마솥에 밥을 짓는다. “초면에 미안해서 어쩌지라, 이 마을 간당께 교회 옆집으로 가라고 했어라,”라며 정읍댁은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가마솥의 밥 위에서 익힌 계란찜을 꺼내 상에 올리면서 은이 엄마가 대답한다. “우리 집으로 잘 오셨니더, 무슨 일인지 몰라도 얼라들 데리고 전라도에서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이 했니더. 집은 누추하지만 여기 있는 동안 마음 편히 지내시소.” 정읍댁은 눈물을 글썽인다, “참말로 고맙당께요. 우리 애들 아빠 찾으러 안동에 왔는데, 이쪽 어디에서 산다고 했당께요.”

학교에 갔던 은이의 오빠들이 와서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정읍댁 식구는 전도사님이 주말에 오실 때마다 머무는 방에 들어갔다. 제일 깨끗한 방이지만 오래전에 벽과 천장에 바른 신문지가 누렇게 바랬다.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자 은이 엄마와 정읍댁은 마당 평상에 앉았다. 마당엔 모깃불 연기가 자욱하고 하늘엔 별들이 무리지어 나타나 반짝였다.

정읍댁은 사연을 말하기 시작했다. 처녀 시절에 고향인 정읍을 떠나 서울에 있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남편을 만났고, 두 사람은 사랑하게 되어 결혼을 하고 셋방에 살림을 차렸다. 아이들이 둘 태어나고 행복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런데 작은 아이가 두 살이 되던 해에 남편의 피부가 문드러져서 병원을 찾아갔더니 한센병에 걸렸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들었다고. 발병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무렵 아침에 일어나니 남편이 없어졌단다. 편지 한 장과 통장을 남기고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떠났다고. 그녀는 4살짜리 큰 아이와 두 살짜리를 데리고 일을 다니다가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바람에 서울을 떠나 고향인 정읍으로 갔단다. 고향에는 부모님과 남동생과 여동생이 5명 있는데, 그녀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서 살게 되니 부모님이나 형제들이 사랑으로 돌보아주었다고 한다.

“친정에 머물며 건강이 좋아져서 돈벌이를 했지라. 애기들과 살아야항께 열심히 했어라. 6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애기 아버지 찾아서 같이 살려고 왔어라.” 정읍댁이 말한다. “저도 숟가락하고 그릇 몇 개 가지고 세간 나왔는데, 정읍댁도 고생을 어지간히 마이 했겠니더.” 은이 엄마가 말한다. 정읍댁은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하늘로 오르는 모깃불 연기를 보며 말한다. “그래도 애기들이 있응께 힘이 난당께요. 저그 어매라고 얼마나 위하는지.” “애들 아버지는 고향이 안동인데 저기 학가산 밑에 있는 산골이지라.” 은이 엄마가 손으로 학가산 쪽을 가리킨다. “학가산이면 저긴데요. 그럼 거기에는 시댁 어른들이 사시니껴?” 정읍댁이 말한다. “예, 거기서 며칠 있으면서 애기들 아빠가 어디에서 사는지 알아보고 있었당께요. 거시기 함박산 어디에 한센병자가 살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는데 동쪽 남쪽에는 찾아봐도 없어서 여기로 왔당께요.” 은이네 집에서 보이는 함박산 지역에는 화전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몇 가구가 있었다.

그날 밤, 도시에 갔다가 돌아온 은이 아버지는 은이 어머니와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은이 아버지가 말했다. “내일 장성도님댁에 가보자꼬, 정읍댁 남편되시는 분 이름이 장성민이라캤지? 장성도님 이름은 장불출이라 카셨지만 어릴 때 이름일 수도 있고, 왠지 거기부터 가보고 싶대이.”

함박산으로

다음 날 일찍 정읍댁은 아이들을 데리고 함박산에 오를 채비를 했다. 은이와 부모님도 정읍댁 가족과 함께 집을 나섰다. 산을 오르며 몇 번을 쉬었고 바위 옹달샘에서 함께 물도 마셨다.

산을 두어 시간을 올라 장 아저씨의 집으로 갔다. 잡초가 자라는 마당으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긴다. 은이 아버지가 장 아저씨를 부른다. “장성도님! 계시니껴?” 몇 번을 부르자 방문이 열리고 장 아저씨가 인사를 한다. “권집사님! 어서오시소, 이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니더.” 그는 마당에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무척 당황한 모습이었다. 은이 아버지가 처마 밑으로 가서 아저씨에게 말한다. “저기 정읍댁이라는 사람을 아시니껴? 어제 애기들을 데리고 애들 아버지를 찾는다꼬 저희 집에 들렀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찾는 사람이 장성도님인가 해서 모시고 왔니더.” 장 아저씨는 방 쪽으로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마당을 본다. 그의 눈이 놀람과 동시에 커지는가 싶더니 눈물이 쏟아진다. “여보 전진아 선화야, 어예 여기까지 찾아왔노.” 정읍댁과 아이들은 달려가서 장 아저씨를 안고 운다. 은이 부모님과 은이는 함께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정읍댁의 보따리와 은이네가 가져온 곡식 보따리와 양젖을 봉당에 올려두고 인사를 하고 마을로 내려왔다.

겨울이 찾아왔다. 호수에 얼음이 얼었고 아이들은 썰매를 탔다. 밤이 되면 하늘에는 바람에 씻긴 별들이 밝고 아름답게 빛났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호수는 밤마다 쩌렁쩌렁 소리를 내며 더욱 꽁꽁 얼어붙었다.

크리스마스를 열흘 앞두고 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이브 축하예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교회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이 매일 모여서 성탄절 인사말과 성경암송과 성극을 연습했다. 틈틈이 은이와 자야는 오빠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크리스마스 장식용 나무를 찾아다녔다. 산을 뒤지고 다니다가 예쁜 두 그루의 소나무를 베어 교회 마당과 강대상 밑에 세웠다. 반짝이 줄과 색색의 종이꽃을 만들어서 달고 종이로 만든 종과 별 등으로 트리를 장식했다.

장 아저씨와 가족들은 함박산에서 행복과 사랑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도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준비했다. 집 앞 싸리나무 울타리에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적은 글씨를 걸고 처마에 세운 작은 소나무에 별과 종과 꽃을 달았다.

이 겨울이 장 아저씨네가 산 위에서 보내는 마지막 겨울이 될 것이다. 봄이 되면 아저씨네는 남산 기슭에 있는 방 두 개와 부엌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가기로 했다. 그 곳은 문중 산을 지키는 산지기 가족이 기거했는데 지금은 비어있었다. 은이 아버지가 병이 호전되어가는 장 아저씨와 가족들이 문중 집에서 살도록 하자고 문중에 부탁했고, 문중 회의를 거쳐서 봄부터 살게 되었다.

밤나무 골

은이와 자야가 밤나무골로 모험을 떠나기로 한 날은 새벽부터 눈이 내렸다. 마을과 들판과 호수가 눈에 덮여 온통 하얗게 빛났고 하늘은 눈송이들로 촘촘히 채워졌다. 은이는 점심을 먹고 썰매를 들고 호수로 나갔다. 자야가 호숫가에 썰매를 대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썰매에 올라 호수를 가로질러서 밤나무골로 향해 달렸다. 호수의 가장자리에 썰매를 대고 밤나무골로 올라갔다. 짐승들이 다니는 길을 들어서자 잡초들이 우거지고 낙엽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아이들은 막대기를 휘두르며 검불을 밀어내고 길을 만들며 나아갔다. 조금 더 들어가자 밤나무들이 모인 골짜기가 나타났다. 이리저리 다니며 벌레 자국이 있는 밤들을 주워 다시 밤나무 아래에 던진다. “가을에 와야 똑똑한 알밤을 만나는데 벌거지가 다 먹었네, 여기 냅두자 짐승들 먹그러.” 은이가 말한다. “그러자, 밤나무골 와봤으이 됐다.” 자야가 대답한다.

아이들은 언덕에 앉아서 호수와 마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함박산을 바라보았다. 은이가 자야에게 말했다. “자야! 봄이 오면 함박산에 양젖 배달을 다시 가야하는데 같이 가재이.” 자야가 대답했다 “히히 멀지만 같이 가께.” 은이는 기뻐한다. “그래 꼭 같이 가재이, 그런데 장 아저씨네는 날이 풀리면 함박산 기슭의 산지기가 살던 집에서 사시게 된다카더라. 집도 더 좋고 거리도 조금 가까워진대이. 히히.” 은이가 웃자 자야도 웃는다. “잘 됐대이, 하하하.” 아이들의 밝은 웃음소리가 멀리 퍼져나간다. 호수 숨구멍에서 놀던 오리들이 날아올라 호수를 크게 빙 돌아 산 너머로 사라진다. 은이는 주머니에 넣어온 말린 감 껍질을 꺼내서 자야와 나눠 먹는다. 잠시 후 아이들은 썰매에 올랐다. 썰매가 얼음위에 하얗고 긴 선을 그린다. 산 너머로 갔던 오리들이 다시 호수로 날아와 숨구멍으로 날아가 앉는다.

찬란한 빛

태양이 호수의 얼어붙은 표면에 반사되어 호수는 마치 크고 빛나는 보석들을 모아놓은 듯 아름답게 빛난다. 멀리 호수의 아래쪽에서는 얼음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들은 얼음 구멍에 드리운 낚시의 종대를 주시하느라 고개를 수그리고 접이식 의자에 앉아있다. 가끔 고기가 잡히는지 즐거운 탄성이 들려온다.

마을 아이들은 겨울바람을 쏘여 벌겋게 된 얼굴로 마을 앞의 호수에서 얼음지치기를 하고 있다. 수수한 농가들의 굴뚝에서는 소죽을 끓이고 군불을 지피는 하얀 연기가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겨울바람은 산골짝의 나무들을 흔들며 이리저리 달려간다. 밝은 태양이 마을과 아이들과 함박산과 장 아저씨의 낡은 오두막을 따뜻하게 비추고 있다. 은이와 자야는 호수를 지나 마을에 다다랐다. 차갑고 맑은 바람에 아이들은 상쾌함을 느낀다. 하늘에서는 밝은 태양이 아이들의 미래를 축복하는 듯 찬란한 빛을 뿌리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