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칼럼] 향유 옥합 사건과 사실 칭의와 선언적 칭의(눅 7:36-50)_박동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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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 옥합 사건과 사실 칭의와 선언적 칭의(눅 7:36-50)

박동근 목사(안양 한길교회)

성화적 감사의 열매는 믿음의 진정성을 확증했고,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기에 그녀의 칭의가 확실한 것임을 확인한 것

성경에는 눅 7:36~50절의 향유 옥합 사건과 유사한 사건이 또 기록되어 있다. 이와 유사한 사건은 마태복음 26:6-13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두 사건이 동일한 사건이 아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사건은 베다니에서 있었던 사건으로 마리아라는 여인이 등장하고, 누가에 기록된 사건은 갈릴리에서 있었던 사건으로 죄를 깊이 짓고 방황하다가 죄 사함을 받은 한 여인이 등장한다.

사건이 일어난 곳은 한 바리새인의 집이었다. 그가 예수님께 식사 초대를 했다. 40절에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데, 시몬이었다. 예수님께서 응하셔서 연석에 앉아 계실 때, 한 여인이 향유 옥합을 가지고 들어왔다. 당시 문화적 풍속으로 초대받지 않은 자도 이런 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고 한다. 37절에서 누가는 그가 그 동네에서 죄를 지은 여인이라고 한다. 어떤 구체적인 추한 죄를 지었고, 동네 사람들이 그녀를 공공연하게 죄인으로 인식할 만큼 큰 인생의 오점이 있었던 듯하다. 한국 정서로 보면 참 죄 많고 무엇인가 기구한 여인처럼 보인다. 옥합에 담긴 향유는 나드 식물에서 나는 것으로 매우 고가였다. 그런데 그 행동을 통해 이 여인이 매우 간절하고 진정성 있는 신앙의 내적 동기로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사실을 추측한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털로 닦고,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다. 그 눈물은 죄 짓고 방황하고 또 수치와 상처를 받으며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 죄 사함을 받고, 위로를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흘린 눈물이었다. 이런 행동을 예수님의 발에 행한 행위는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고 사모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고, 한편 자신을 지극히 낮추는 태도가 담겼다.

이 여인의 마음은 주님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며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를 지극한 정성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다. 머리를 풀어 예수님의 발을 닦은 행위는 당시 풍속으로 보면 여인에게는 수치가 될 수도 있었다. 공석에서 머리를 풀어 내리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수치로 여겼다. 여인들에게 머리털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타인의 시선이나 풍속이나 비난 같은 것도 다 내던지고, 하나님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며 주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실천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해 있다. 예수님의 발에 입맞춤한 것도 이런 경외함과 사모함의 표시였다. 실로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하는 마음이 조화되고 하나 된 구원 받은 자의 마음 상태와 자세이며 그 마음이 말과 행동으로 발현된 총체라 정의할 만하다.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은 후 몹시 비싼 향유 옥합으로 향유를 뿌리는 행위에 담긴 동기와 마음의 상태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그리스도께 최선의 것으로, 최고의 것으로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싶었다. 무엇일까? 그것은 구원 받은 자의 심령에서 발생하는 영적 바람이다. 생명이 임한 자에게 나타나는 주님을 지향해 나타는 갈급함이다.‘깊고 크고 많은 죄를 용서 받은 것에 대한 감사’였다. 주님의 발을 적신 눈물은 죄 사함에 대한 감격과 감사의 눈물이었다. 이 눈물은 죄 사함을 받은 자에게서 나오는 감사이며, 지난날의 과오를 돌아볼 때마다 받은 은총에 감격하게 되고, 또 새롭게 주어진 현재와 미래를 주님의 뜻대로 살겠노라고 다짐하는 성화적 회개의 다짐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구원을 확신케 된, 용서를 확신케 된 사람들의 감사의 표현이다. 자신의 죄를 사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지워진 고난의 무게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엎드려 감사하는 심령의 상태가 이 여인의 상태이다. 진정 그리스도의 용서를 받은 사람들은 감사가 넘치되, 그러한 용서의 행위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권능을 발견하여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

이처럼 죄 사함을 확신하여 진정한 감사로 응답하는 이 여인에게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죄 사함을 선포하신다.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48절). 이 여인은 사실 이미 죄 사함을 받은 여인이었다. 시점으로 보면 이 사건 이전에, 과거에 그리스도를 믿고 용서, 곧 칭의를 받은 여인이었다. 칭의는 단번에 완전히 받는다.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는 칭의는 과정이 아니라 단 번에 주어진다. 칭의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충족한 의(義)와 공로의 전가에 있기에 결코 흔들림이나 취소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이미 용서 받은 여인에게 또 죄 사함을 선포하신 것일까? 이 여인의 헌신의 행위는 죄 사함을 받은 여인의 감사의 표현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반복적으로 칭의하신 것이 아니라, 이 여인의 보인 감사와 헌신의 마음과 행위가 믿음에서 온 진정한 것임을 보셨다. 즉, 죄 사함을 받는 믿음이 이미 있었기에 그녀는 그 믿음을 통해 성화, 곧 감사와 헌신을 나타냈다. 성화적 감사의 열매는 그녀의 믿음의 진정성을 확증해 주었고, 그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기에, 그 믿음으로 인해 그녀의 칭의가 확실한 것임을 확인한 셈이다.

이처럼 성도의 성화의 열매는 믿음의 증거이고, 믿음은 칭의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칭의는 단번에 이미 완전히 받았으나 성화의 열매를 맺고 감사의 열매를 맺을 때 마다 하나님께서는 그 칭의의 진정성을 선포해 주신다. 이미 칭의 받은 자의 칭의의 진정성을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개혁신학자들은 이런 이유로 단번에 완전히 칭의 받은 사실 자체를 “사실 칭의”라고 불렀고, 성화의 열매를 통해 확증된 믿음을 인해 다시 한 번 이미 받은 칭의의 진정성을 선포해 주시는 하나님의 선언을 “선언적 칭의”라고 했다. 우리는 죄 사함의 확신 속에서 감사하며, 성화의 선한 열매와 회개를 날마다 나타내므로, 하나님께 이런 말씀을 매번 들을 필요가 있다. “나의 자녀야! 너에게 오늘도 선한 열매가, 회개의 열매가 맺힌 것을 보니! 네 믿음이 진정한 것이로구나! 네게 믿음이 있으니 너는 진정 나에게 죄 사함, 칭의를 받은 나의 자녀임이 확실하단다! 사랑한다. 나의 자녀야! 늘 열매를 맺거라! 그래서 네 믿음의 진정성을 날마나 나타내거라! 내가 늘 너와 함께 하여 은혜를 베풀 것 이란다! 그러면 너의 마음에 죄 사함의 사실이 더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