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교회사 이야기 (6)] 취리히 종교개혁-개혁의 속도를 조절하다_안상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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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히 종교개혁-개혁의 속도를 조절하다

안상혁 교수(합신, 역사신학)

진리에 해박한 츠빙글리가 목회자의 심장으로 동역자들과 개혁의 속도를 조절했을 때 큰 변화가 일어나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높은 치사율을 유발하는 법규위반은 바로 과속이라고 합니다. 보행자와의 충돌 사고의 경우 충돌속도가 30킬로미터 이하일 경우 보행자의 생존가능성은 90퍼센트이지만 45킬로미터 이상부터는 생존 확률이 절반으로 뚝 떨어진다고 합니다. 자동차는 문명의 이기(利器)를 대표하는 고마운 사물이지만 과속하는 자동차는 오히려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살인병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과속의 위험성이 진리의 세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시기에는 개혁의 속도 조절 문제를 두고 적지 않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독일에서는 루터와 칼 슈타트 사이에,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와 재세례파 사이에서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흔히 급진주의자로 불리는 이들은 강제력을 동원해서라도 개혁을 급속하게 추진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회 안에 있던 각종 성화나 조각상의 경우, 이것들이 성경의 진리에 위배되는 것으로 드러난 이상 회중의 의사에 반해서라도 이것들을 즉각적으로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루터나 츠빙글리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습니다. 먼저 필요한 것은 신자들로 하여금 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이들은 생각했습니다.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고나면 회중 스스로 비성경적인 사물이나 관행을 철폐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 할지라도 이것이 교회 개혁의 바른 길라고 이들은 믿었습니다.

츠빙글리가 취리히의 종교개혁을 위해 공개토론의 방식을 고집한 이유도 이러한 확신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 진리는 너무나 명료해서 말씀을 제대로 선포하는 설교를 들으면 누구나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1523년 1월에 개최된 제1차 공개토론은 이러한 츠빙글리의 기대에 잘 부응했습니다. 그는 약 육백여명의 대중 앞에서 종교개혁의 원리를 성경적으로 훌륭하게 입증했습니다. 반면 교회의 전통적 권위에만 의존했던 반대파는 대중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했습니다. 이 날 시의회는 츠빙글리의 설교권을 보장해 주었음은 물론 앞으로 도시의 다른 설교자들도 반드시 성경에 기초한 진리만을 설교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듬해 가을, 제2차 공개토론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이 날의 주제는 성화와 조각상을 제거하는 것과 미사의 본질을 규정하는 문제였습니다. 약 구백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뜻밖에도 결과는 실망스러웠습니다.

오랜 관행으로 굳어진 것을 일순간에 바꾸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츠빙글리와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은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앞으로 모든 설교자가 일정기간 특별히 이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할 것을 의무화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자발적인 변화를 위해 성경말씀을 가지고 회중을 설득하는 시간을 좀 더 갖자는 의도였습니다. 급진주의자들은 츠빙글리의 이러한 태도를 비난했습니다. 비진리와 타협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츠빙글리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이 입증되었습니다. 설교자들의 가르침과 설득, 그리고 인내가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 곳곳에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교인들은 교회 안의 각종 성화와 조상들을 제거했습니다. 내벽에 그려진 성화의 경우는 하얀색으로 덮어 지웠습니다.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이렇게 한 것입니다.

마침내 1524년, 시의회는 미사와 성상숭배의 폐지를 공식화했습니다. 별다른 저항이 없었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미신적으로 행해지던 촛불미사, 성인 및 유물숭배와 성지순례 등은 자연스럽게 사라졌습니다. 중세식의 수도원은 해체되었고 그 재산은 구제와 교육 사업에 건설적으로 활용 되었습니다. 명실공히 취리히는 스위스의 종교개혁 도시로 거듭났습니다.

물론 취리히 시민이 츠빙글리에 의해 설득된 것은 단지 그의 말에 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진리 말씀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정확하게 가르치는 성경의 교사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가 취리히에 처음 도착했던 해에(1519년), 취리히를 강타했던 흑사병을 계기로 츠빙글리는 사랑이 많은 헌신적인 목회자로서도 이미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취리히 인구는 흑사병을 계기로 사망하거나 이주한 사람들로 인해 약 25%의 인구가 감소했습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떠나지 않고 끝까지 남아 교인들을 돌보았습니다. 9월에는 그 역시 흑사병에 감염되어 죽음의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이 회복되어 목회자의 직무를 계속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츠빙글리가 작사한 역병가(Pestlied)는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진리 말씀에 해박하고 따뜻한 목회자의 심장을 가진 츠빙글리가 같은 마음을 품은 동역자들과 함께 개혁의 속도를 적당히 조절했을 때 큰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요컨대 사람을 살리는 복음 진리는 효율성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많은 이들을 살리는 진리 본연의 기능을 더욱 빛나게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