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그리스도의 순종과 의의 전가 _김병훈 교수

0
1034

그리스도의 순종과 의의 전가

김병훈 교수(합신 조직신학)

 

본 글은 2021년 5월에 발간 예정인 「신학정론」(39권 1호)에 게재되는 논문, 필자의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과 피스카토르(Johannes Piscator, 1546-1625) – 논점 정리”의 내용을 요약, 발췌한 것이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논문을 참조 바란다. – 필자 주

 

최근에 칭의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순종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개혁신학의 표준신앙에, 특별히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일치하는지, 더 나아가 성경의 교훈에 어긋나지 않는지에 대한 논의가 여러 모양으로 확장되고 있다.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만이 의롭다 함의 근거로 보는 주장을 개진한 대표적인 학자는 피스카토르(Johannes Piscator, 1546-1625)이다. 그는 베자(Theodore Beza, 1519-1605)가 로마서 8장 2절을 주해하는 가운데 전개한 주장, 곧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와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를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모든 순종을 의롭다 함의 근거로 보는 주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공적인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피스카토르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학자들 가운데, 피스카토르를 지지하는 이들로는 하이델베르크의 파레우스(David Pareus, 1548-1622), 헤르보른(Herborne)의 텍스토르(Bernhard Textor, 1560?-1602), 알텐호비우스(Johannes Altenhovius, †1616) 등이 눈에 띤다. 반면에 하이델베르크의 토사누스(Daniel Tossanus, 1541–1602), 바젤의 그리네우스(Johann Jakob Grynaeus, 1540-1617), 폴라누스(Amandus Polanus, 1561-1610), 루치우스(Ludovicus Lucius, 1577-1642), 볼레비우스(Johannes Wollebius, 1586-1629) 등은 베자와 같은 견해를 주장하였으며, 이후에 전개되는 개혁교회 안에서의 신학적 주류 견해는 피스카토르의 주장에서 거리를 두어 왔다.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총대들이 ‘의롭다 함’의 교리를 다룰 때, 이와 관련하여 활발한 토론이 있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를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모든 순종’(the whole obedience)를 지지하는 사람들 가운데 호일(Joshua Hoyle), 워커(George Walker), 팔머(Herbert Palmer), 굿윈(Thomas Goodwin), 시맨(Lazarus Seaman), 그리고 가우지(William Gouge) 등이 있으며, 반면에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만을 주장하는 사람은 발언자 47명 가운데 8명으로, 이 가운데 가테이커(Thomas Gataker), 바인즈(Richard Vines), 템플(Thomas Temple), 그리고 우드콕(Francis Woodcock)이 있다. 총회는 최종적으로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만을 주장하는 견해에 대하여 분명한 거리를 두면서,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 개념을 반영하는 핵심 용어인 ‘모든 순종’(the whole obedience)는 그것이 기술적인 학문용어라는 점과 또 반율법주의(antinominan)를 함의한다는 수동적 순종의 지지자들의 항변을 고려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반영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순종과 의의 전가에 관하여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논쟁을 이해하기 위하여,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를 부정하고, 오직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만이 죄인을 의롭다 하는 근거라는 주장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간략하게나마 정리하여 향후 계속될 수 있는 토론의 이해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의 순종을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는 두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개혁신학의 주류는 통상적으로 그리스도의 순종을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설한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obedientia passiva)이며 다른 하나는 능동적 순종(obedientia activa)이다.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이 당할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일의 측면을 말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대속을 하시는 죄인을 위하여 받으시는 수동적 순종은 ‘기꺼이 자발적으로 받으신 능동적 고난’(passio activa)인 점을 이해한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란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율법 아래 오셔서 율법의 의를 행하신 일의 측면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성에 따라 성자 하나님으로서 율법의 입법자이며 심판자이시기 때문에 율법 아래 종속되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께서는 능동적 순종을 행하신 일은 구속 사역의 필요에 따라 ‘당하셔야’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수동적 성격을 반영한다. 이런 의미에서 ‘능동적 순종’은 수동적 행위(actio passiva)라는 특성을 갖는다.

그러나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만을 주장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하는 시도에 경계심을 보인다. 이들의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결코 죄인에게 전가되는 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능동적 순종을 언급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며, 그것이 결코 의의 전가와 연결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처음부터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구별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은 서로 분리되는 사역인가?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를 주장하는 견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구별하지만, 그리스도의 순종이 서로 분리되는 두 개의 사역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두 측면을 분리하여 능동적 순종은 영생을, 수동적 순종은 죄 사함의 은택을 주는 것으로 나누어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한 편으로는 죗값을 치루는 측면을, 다른 한편으로는 영생의 권리를 얻는 공로의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는 수동적 순종은 하나님의 명령을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라는 의미에서 능동적 순종이기도 하며 또한 죄인을 향한 사랑의 행위로서 율법을 성취한 것이라는 점에서 영생을 얻는 공로적 성격을 갖는다. 즉 단지 죗값을 치루는 형벌을 받으시는 수동적 순종의 측면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랑의 율법을 완성하는 능동적 순종의 측면을 또한 지니고 있기도 하다. 요컨대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의는 수동적 순종과 능동적 순종이 서로 결합된 그리스도의 ‘모든 순종’(the whole obedience)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만을 주장하는 견해는 이러한 설명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이들의 생각에는 능동적 순종은 죄인을 의롭게 하는 의의 근거가 아니기 때문에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와 분리되지 않는 단일한 사역이라는 주장 자체를 거부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속죄를 위한 희생제물로서 율법에 어긋남이 없으셔야 하는가?

이 질문과 관련하여 죄인의 칭의를 위하여 전가되는 의가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만이 아니라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를 또한 포함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나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만을 주장하는 자들이나 모두 속죄를 위한 희생제물로서 그리스도는 무흠한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순전히 이론적으로 말할 때 – 왜냐하면 실제로 있지 않은 일이며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 만일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어긋난 일을 행하셨다면 죄를 범한 것이 되며, 대리 속죄를 위한 희생제물의 자격을 갖추지 못하였을 것이므로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 자체가 인정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의를 이루시는 일은 자신의 영생을 위한 일이기도 한 것인가?

의의 전가와 관련하여 능동적 순종을 지지하는 거의 모든 견해는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가지고 계시므로 한 개인 인간으로서는 자신의 영생을 위하여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지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위격적 연합에 의하여 취하신 제 2위격 성자 하나님이시므로 이미 스스로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신-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고 계시지만 피조물인 사람이 영생을 위하여 율법을 지켜야 하듯이 자신의 영생을 위하여 율법을 지켜야 하는 분이 결코 아니다. 율법의 의무는 인성이 아니라 인격에 지워지는데, 신-인이신 그리스도의 위격은 이미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율법의 의무에서 자유로우시며, 따라서 자신의 영생을 위하여 율법을 지키실 이유가 없다. 그런데 오히려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만을 주장하는 대표적 주창자인 피스카토르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하여 영생과 하늘의 지복을 위한 공로를 세웠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최근에 필자의 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8장 5항>”(「기독교개혁신보」, 2016.4.12. http://repress.kr/3719/)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생을 위하여 율법의 의를 지키셔야한다고 쓰고 있다는 주장이 들려오고 있다. 하지만 글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일은 위격적 연합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율법의 의의 보상을 통해 자신의 영생을 얻고자 하실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의 보증인으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에게 속한 죄인을 위하여 율법의 의를 이루심으로서 영생의 권리를 획득하신다고 쓰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일이 있다면 “희생제물로서의 자격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한 영생의 권리도 상실하게 되고” 만다는 글은 순전히 이론적인 말일 뿐이며, 실제로 그런 일은 있지도 않은 일이며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한 순종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의의 전가와 관련하여 능동적 순종을 찬성하는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한 순종은 “행하면 살리라”는 율법 규정에 따라 율법을 우리를 대신하여 성취하시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이며, 이 결과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기 위하여 율법 규정을 따라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에서 자유롭게 한다.

그러나 수동적 순종만을 주장하는 견해에 따르면, 타락한 이후로 인간은 자신의 부패성으로 인하여 율법을 성취하여 생명에 이를 수가 없게 되었으며, 율법의 순종을 통해 생명을 얻는 방식도 더 이상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도 죄인을 구원하고자 할 때 율법의 순종을 통해서 생명을 얻는 방식을 따라 행하실 수가 없다고 판단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순종하여 죄인을 의롭게 한다는 주장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하여 피를 흘려 구속하신다는 진술과 충돌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율법의 순종으로 인하여 의롭게 된 죄인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한 속죄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대해 순종하신 것은 희생제물의 자격을 위한 것이며 결과적으로 죄인의 죗값을 대신 치러주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의한 공로가 의롭다 함을 위하여 죄인에게 전가되는 의에 포함이 되는가?

이 질문은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를 찬성하는 자들이 주장하는 바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들은 죄인의 죄 사함과 영생을 위하여 죄인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의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시는 수동적 순종의 공로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보증인으로서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성취하신 능동적 순종의 공로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은 ‘모든 순종’(the whole obedience)에 의한 의의 전가를 말한다.

반면에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만을 주장하는 자들은 율법을 성취하여 이루는 능동적 순종에 의한 공로는 의의 전가를 위한 것이 아니며, 필요하지도 않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판단에 죄인을 의롭다 하기 위하여 필요한 그리스도의 의란 죄 사함을 위한 수동적 순종의 의일 뿐이다. 그리고 영생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의한 공로를 근거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죄인을 의롭게 하는 죄인에게 전가되는 의란 무엇인가?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를 주장하는 자는 전가의 의를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한다. 하나는 죄 사함이다. 곧 그리스도께서 그의 수동적 순종을 통해 죗값을 치르시어 죄책이 없다는(insontes) 선언을 얻게 되는 의미에서의 의이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성취하신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로써 의롭다는(iusti) 선언을 얻게 되는 의미에서의 의이다. 전자는 범법으로 인한 죄책을 면케 하는 소극적 측면인 반면에, 후자는 의로운 행위를 통해 주어지는 적극적인 측면이다.

그러나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만을 인정하는 자의 견해에 따르면 죄 사함이 전가되는 의이며, 죄 사함이외에 전가되는 다른 의는 없다. 죄인은 오직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 곧 죽음에 의하여 획득된 의로 인하여서만 의롭게 여겨진다. 정죄는 범한 죄 때문에 받는 것이므로, 죗값이 갚아지면 의로운 자가 된다는 주장이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가 전가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의미를 잃는가?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만을 주장하는 견해는 만일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전가된다면 우리는 이미 의로운 자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이유가 없게 된다고 말한다. 곧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으로 인한 죄 사함의 필요성과 충돌한다는 주장이다.

영생은 무엇에 근거하여 얻는가?

의의 전가와 관련하여 능동적 순종을 찬성하는 견해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과 능동적 순종이 하나의 비분리적인 순종, 곧 ‘모든 순종’(the whole obedience)이라는 이해 안에서 죄 사함과 영생의 권리에 대해 말한다. 곧 수동적 순종과 능동적 순종을 분리하지 않은 채, 고난을 통하여 죄 사함을 이루고 율법의 의의 온전히 성취를 통하여 영생을 얻게 되는 원리를 말한다.

그러나 수동적 순종만을 주장하는 견해에 따르면, 영생은 그리스도이든 우리이든 누구에 의해서도 율법의 성취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영생을 얻는 길은 율법의 성취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에 의하여 죄 사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을 받는다. 그리고 영생은 바로 입양된 자녀로 받는 기업이지, 율법의 성취로 인한 공로가 아니다.

성경은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에 대해 침묵하는가?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를 반대하면서 오직 수동적 순종에 의한 전가만을 주장하는 이들은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를 지지하는 성경 구절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항상 옳지는 않다. 예를 들어 로마서 5:18-19, 빌립보서 3:9의 말씀이 능동적 순종의 전가교리를 지지한다는 주석이 가능하다. 또한 로마서 3:31과 같은 구절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6절에서 일을 행하지 않고도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능동적 순종을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을 말하는 것은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 그리스도의 순종의 분리되지 않는 두 측면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해석을 열어준다. 스가랴 3:4에서 더러운 옷을 벗긴 다음에 벗은 몸으로 두지 않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는 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순종의 두 측면을 시사한다.(참조, 고후 5:21) 또한 로마서 8:3-4의 구절에서 “율법의 요구”는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를 잘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다. 한 구절만 더 들어본다면 로마서 10:4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의를 완전히 지키심으로 율법의 의를 추구하는 모든 시도를 폐하였음을 말하는 바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의 해석과 조화를 이룬다.

수동적 순종으로 인한 의의 전가만을 주장하는 분들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교훈하는 성경구절이 수동적 순종만으로 인한 의의 전가를 지지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으며,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를 포함하는 ‘모든 순종’(the whole obedience)를 가리키는 경우도 많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10:19의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피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뜻하지만, 이 고난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17세기 개혁신학의 많은 신학자들이 말하듯이 ‘그리스도의 피’는 제유법적인 표현으로 의의 전가를 이루는 데에 능동적 순종에 의해 전가되는 의를 배제하지 않는다. 먼저 죄 사함을 받아 형벌을 면한 뒤에라야 영생의 의가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의롭다함을 받는 일에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앞서 언급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나오는 율법에 대한 말씀이나 율법의 순종을 기초로 주어지는 약속과 연관하여 언급되는 생명에 대한 많은 구절들은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를 배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일치한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맺는 말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1643년 9월 5-19일에 그리스도의 순종과 의의 전가와 관련한 토의를 가졌다. 그리고 47명의 총대들에 의하여 274번에 이르는 발언들이 있었고, 이중 8명의 총대들만이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만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총회는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를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모든 순종’(the whole obedience)을 지지하는 반면에,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만을 주장하는 견해에 대하여, 결코 이단으로 몰아가지 않았지만, 분명하게 거리를 두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흐름에서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를 성경적이며 신학적으로 옳은 가르침으로 여기는 상황에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만을 주장하는 일부의 목소리는 신학사적인 검토를 세밀히 살피게 하는 유익을 주고 있다. 최근의 논의가 그리스도 안의 형제애로서 성경의 진리와 신학의 유산을 주의 깊게 살피는 좋은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