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코로나 시대, 기독교인의 눈으로 본 문화 저변 읽기 (3)_이은숙 시인

0
127

온라인 접속과 재현의 문화, 그 쓸쓸한 풍경들

이은숙 시인 (본보 문화부 객원기자)

창조 목적에 따라 구별된 자기 가치를 찾는 길은 말씀과 그것을 믿는 믿음뿐

사람들은 이제 온라인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이벤트와 외식문화마저 온라인상의 주문•배달로 전환되는 상황 속에서 이전에는 오프라인으로 진행 되던 전시, 연주회, 수업, 면접 등 지식, 정보, 산업 분야 전반에 걸쳐 온라인 지배적인 삶으로의 지각 변동이 시작된 것이다.

끝도 없이 성장하던 항공 산업은 유동인구가 급격히 줄어 공항이 폐쇄되기도 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다양한 문화산업들, 문을 열지 못했던 음식점과 각종 가게, 학원 등에서는 패업과 휴업이 속출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당장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신음이 곳곳에서 들리고 가장 먼저 지출을 줄일 1순위가 단연 문화생활이 되었다. 거리두기 단계가 높아지면 가장 먼저 국공립 박물관과 미술관, 공연극장부터 휴관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한편 많은 일들이 온라인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새로운 산업으로의 개편이 사회 전체로 확산되었다. 커피와 요리에 이어 각종 문화까지 ‘테이크아웃’이 가능해졌다. 인간에게 ‘무엇이 가능해졌다.’라는 말이 반드시 ‘인간에게 더 좋은 것’이라는 말은 아니겠지만 기존에 ‘전문분야’라 불리던 일들이 전 세계적 팬덤에 의한 ‘비상적인(extraordinary) 에피소드’들에 의해 전복된 상황이 나타났고 우리는 이것을 ‘코로나 혁명’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목소리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공연과 전시를 위한 아이디어가 새로운 무대 위에서 실현된다. AR(증감현실)을 이용한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은 이미 홍보 차원을 넘어 메인이벤트로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이미 코로나 사태로 멀어진 문화적 환경과의 거리는 다시 좁혀지기가 요원한 상황이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무슨 문화생활이냐”는 반응이 지배적인 것은 비단 저소득층의 하소연뿐인 것은 아니다.

열악했던 2차 세계대전과 6•25 전쟁 중에도 시를 노래하고 미술 전시가 이루어졌고,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군인과 피난민 모두 위로를 얻었다. 하지만 이제 언택트 문화의 맹위(猛威)는 모든 이들의 문화 취향을 얼얼하게 만든 것 같다. 따라서 우리는 오히려 “실용적인 일들을 창출하는 동력이 예술에 있음”을 지적한 바 있는 <예술수업>의 저자 오종우 교수의 말을 이러한 시기에 더욱 되새겨야 한다. 우리는 절박한 순간이더라도 끝까지 예술문화를 버려선 안 되는 숙명적 존재들로 창조되었다.

“아아, 이제 인간은 자신들이 만든 도구의 도구가 되어 버렸다”고 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 Thoreau, 1817~1862, 미국의 문학가)의 말은 외부 조건에 쉽게 반응하고 순응하는 존재인 인간, 그 외부 조건이 다름 아닌 인간 스스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모순적 현실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통찰을 드러낸다. 우리는 이제 매일매일 접속된(accessed) 환경에 예속되어가고 있다. 그 네트워크화 된 세계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나-주체성’을 잃어간다. 이로 인해 우리는 임의성(voluntariness)과 필연성(necessity) 사이의 완급조절에 거의 실패한 채 접속된 세계 속에서 ‘보여주는 음식’을 먹고 ‘보여주는 지식’만을 습득하며 상업주의와 물질주의가 삶의 최우선 목표라고 암시하는 것들에 무방비로 노출되어있다.

알고리즘(algorism)으로 재현된 그 세계는 심지어 세계를 보는 안목과 윤리적 기준조차 우리에게 강요한다. 보는 것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은 대화하는 방법을 잃어가고 있으며 오래 듣는 것을 참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점차 읽는 것도 불편해 하고 있다. 짧은 설교가 현시대에 적합한 유능한 설교자의 특색이 되어가고, 독서앱(app)들이 진지한 독서를 대체하고 있는 현실은 온라인 세계 구성원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미로와 같은 접속 문화 안에서 결국 다른 이들을 만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속에서 ‘나’마저도 잃어 출구를 찾지 못하고 무의미한 삶만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접속, 그 획일화의 미로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전 세계적으로 파급되어가는 팬데믹(pandemic) 문화 속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참된 개성과 다양성을 잃지 않고 본래 창조하신 목적에 따라 선하고 구별 된 ‘나’의 가치를 찾아가는 길은 주님의 말씀과 그것을 믿는 믿음뿐이다. 왜냐하면 참다운 인간성의 실현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 속에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모든 인간을 창조하셨으나 그 형상이 인간을 획일화하지 않는 것은 그 형상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형상이고 그것은 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과 동시에 개별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형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믿음 안에서 성령의 역사로 인해 환경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순전한 자아를 길러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앙하는 문화 예술인들이 구별된 ‘나’가 되어 세례 받은 이성으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녹여내는 것만이 참다운 예술이며 그렇게 구현된 예술은 우리의 고된 실생활 속에서 진정한 필요를 창출할 새로운 동력이 될 것이라 믿는다.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2:17). 일그러져가는 신(新)문화의 미로에서 헤매 듯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은혜로 주신 주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소망이 되고 길이 되며 그 소망이 우리 모두의 얼굴에 나타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