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단
축도에서 목사는 왜 손을 들어 올릴까?
<노승수 목사 | 가족성장연구소>
목사의 들린 손을 보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적 대적으로부터의 승리를 기대한다
우리가 매주일 만나는 예배의 마지막 순서는 축도다. 축도에서 항상 목사는 손을 들어서 축도를 행한다. 이 시간 대부분의 성도들은 눈을 감은 채로 기도를 드린다. 기도라면 굳이 손을 들 필요가 있을까? 축도는 성례전적 행위다. 성례전은 보이는 말씀이고 보이기 위함이니 당연히 축도 시에는 눈을 뜨고 목사의 들린 손을 바라보는 게 맞다. 물론 이것이 한국교회에는 낯설다는 것을 안다. 같은 이유로 사도신경 역시 기도가 아니라 신앙 고백이며 눈을 뜨고 하는 것이 맞다. 물론 축도 후 폐회를 알리는 송영의 찬송을 드리는 동안에 그 말씀을 진정한 믿음으로 받는 기도의 시간을 갖는 것이 더 좋다.
축도에서 왜 눈을 뜨고 목사의 손을 바라보아야 할까? 축도는 성례전적 행위이지 기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축도의 영어 표현은 “pronounce a benediction”이다. Benediction의 라틴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좋은 것을 말함”이라는 뜻이며 pronounce는 공적 선언 혹은 입장 표명 등을 담은 동사로 판사가 법정에서 판결을 내린다고 할 때 쓰이는 단어다. 즉, 복에 대한 공적 선언 혹은 입장 표명이라는 의미다. 기도를 의미하는 “도”자를 쓰니 기도라 생각하기 쉽지만 토마스 레쉬만(Thomas Leishman)은 “강복은 기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대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기도가 아니라면 그것은 어떤 약속에 의하여 전달하는 것인데, 그것은 목회의 전달 행위일 수밖에 없고, 조건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다”(‘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 WPA, 102-103쪽)라고 말한다. 즉, 축도는 하나님을 대리해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에게 복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성례전적 행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설교가 그렇듯이 자격 있는 직분자만 하는 게 맞다. 교회사적 전통에서도 동방 교회에서 사제는 한 손을 들었고 주교는 두 손을 들었는데 이것은 안수례와도 같았다. 특히 그날 선포된 말씀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할 것이라는 선포다. G. 판도른(G. VanDooren)도 축도를 이렇게 설명했다. “마칠 때 하는 축도는 다음 주일까지 우리의 전 삶을 ‘감싼다’. 이 축도는 하나님의 복과 평화와 은혜와 함께하심이 모든 날들 동안에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과 약속이다. 이 축도는 거룩한 기원도, 예배가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종소리도 아니다”라고 말한다(‘언약적 관점에서 본 예배의 아름다움’ 안재경 역, SFC, 68~69쪽).
그러므로 축도를 할 때, 지나치게 문자에 얽매여서 고린도후서나 민수기 본문을 그대로 사용하기보다 그날에 주어진 설교의 말씀을 삼위하나님을 대리해서 그 날의 메시지의 핵심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선포할 필요가 있다. 축도는 그날 선포된 말씀을 그 백성들에게 위탁하며 하나님을 대리해서 공적으로 선포하는 행위다. 신자는 예배의 마지막에 이렇게 선포된 약속이 한 주간 나와 함께하심을 믿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축도는 축원문의 형식, 곧 “~하옵니다”보다는 선포 형식, 곧 “~지어다”로 이뤄지는 게 더 바람직하다.
이런 관점에서 축도는 당연히 그날 말씀을 선포한 목사가 직접하는 게 맞다. 준비한 메시지의 본질을 가장 잘 대변하는 하나님의 대리인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강도권과 축도권을 분리하고 있는 한국 장로교회의 법은 일종의 파행이다. 강도할 권리가 있다면 당연히 축도할 권리도 있어야 하는 것이 맞겠다. 강도사에게 축도할 권리를 주든지 아니면 전 세계에서 한국에만 있는 강도사 제도를 없애든지 하는 게 맞겠다. 한국적 상황을 고려하면 장로교회에서 목사 회원의 평등의 원리에 맞게 강도권을 주었다면 축도 역시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장로교회 원리상 맞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가정에서 아버지나 어머니가 자녀를 축복하여 기도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축복하여 기도하는 것은 기도지 ‘축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축도’와 가정에서의 ‘축복 기도’는 전혀 다른 범주의 것이다. 설교와 성례전, 그리고 축도는 하나님을 대리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자격 있는 직원의 대리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목사가 손을 드는 것에 관한 성경 상의 근거라고 한다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모세가 아말렉과의 전투 중에 손을 든 사건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의 의미를 출애굽기 17장 16절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그런데 이 개역개정역은 약간 의역한 것이다. 히브리어 본문이 좀 까다롭고 의미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완전 직역 형태인 YLT로 보면 이렇게 번역해 두었다. “and saith, ‘Because a hand is on the throne of Jah, war is to Jehovah with Amalek from generation-generation.’(Exod. 17:16 YLT)” 사실 16절의 전반부는 의미가 불분명하지만 이렇게 번역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손 하나가 야훼의 보좌 위로 들리리니 야훼와 아말렉 사이에 대대에 전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잘 알려진 대로 부림절의 기원이 되는 에스더 사건의 대적이었던 하만이 바로 모세가 손을 들고 있는 동안 전투했던 아말렉 족속이다. 왜 하나님은 이 전쟁이 대대로 있을 것이라고 하셨으며, 단지 전쟁을 하면 될 텐데 모세의 손을 들게 하셨는가? 이것은 구원 계시적 사건이라고 밖에 이해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단지 아말렉 민족이라는 특정 대적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대적하는 세상의 모든 대적을 대상으로 하여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높이 들린 모세의 손이 장차 있을 영적 전쟁에서의 승리를 약속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목사의 들린 손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세상에서의 영적 대적으로부터의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전투에 직접 나섰던 장수가 여호수아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의 이름은 ‘예수’를 의미하기도 한다. 여호수아의 아말렉과의 전투는 하나님 보좌 위로 들린 손이 그 승리를 결정했다.
이 본문을 오늘날 적용한다면 그리스도의 대리인을 통해 선포된 말씀을 들은 성도들은 그 대리인이 올린 손을 바라보며 이 승리를 확신하는 믿음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다. 신자는 축도에서 목사의 들린 손을 보면서 세상 가운데서 영적 전투를 하면서 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약속받은 것이다.
<TGC코리아에서 전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