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에세이| 주님의 얼굴 보라 _ 신규철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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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에세이

 

주님의 얼굴 보라

 

<신규철 장로 | 시인, 송월교회>

 

찬 송

 

찬송은 어디에서 오는가?
뻐꾸기 소리 들리는 숲속
숲속에서도 마당이 있는 작은 교회당
하루 종일
논밭에서 일하고
조용한 불빛 아래 드리는 수요기도회
그 곳에 모여 앉아 간곡히
목청 높여 기도하는 사람들

거기에서 온다

찬송은 어디에서 오는가?
큰 길에서도 골목길
골목길을 가다가 발을 멈춘 곳
낮은 창문에 희미하게 걸린 등불
소곤소곤 정겨운 목소리
집 나간 자식들
하나하나 이름 불러가며
밤늦도록 잠 못 이루는 어머니

거기에서 온다

 

수 년 전에 심방대원이 되어서, 목사님과 함께 혼자 사시는 어느 할머니 권사님 댁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 권사님은 형편상 재개발 명령이 떨어져서 살던 사람들이 모두 이주하고, 수도와 전기까지 끊긴 폐가에서 혼자 살고 계셨다. 대낮인데도 어둠 컴컴한 방, 촛불을 켜고 심방예배를 드려야 하는 작은 방이었지만 작은 책상 위에 있던 액자 속의 “괴로우면 기도하고 즐거우면 찬송하라(약5:13)”는 글귀를 보고 심방대원이었던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은 적이 있었다.

나는 시골교회 출신이다. 어려서 내가 다니던 교회는 산 밑에 흙벽돌로 지은 작은 교회였다. 농번기에는 교인 수가 줄어들고 수요일 저녁이면 정말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던 교회였다. 그렇지만 부활절, 여름성경학교,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 교회 행사는 빠짐없이 지켰고, 기도소리 찬양소리 모두 해맑았으며, 목사님은 겨울에도 땀을 흘리며 열심히 설교하셨다.

생전에 나의 어머니가 즐겨 부르시던 찬송은 370장이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어머니가 그리운 날이면 나는 지금도 가끔 이 찬송을 부른다. 이 찬송을 부르노라면 찬송 속에서 나는 어머니의 숨결을 느낀다. 어머니의 무덤은 강원도 평장리 산 속에 있지만 어머니의 영혼은 천국에 계시다고 믿고 있고, 어머니가 계신 천국이기에 나도 언젠가 그곳에 가고 싶다.

“내가 천성 바라보고 가까이 왔으니. 아버지의 영광 집에 나 쉬고 싶도다. 나는 부족하여도 영접하실 터이니. 영광 나라 계신 임금 우리 구주 예수라.” 내가 좋아하는 493장 찬송이다. 내가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가슴을 울리는 구절은 바로 ‘나는 부족하여도 영접하실 터이니’하는 셋째 구절이다. 이 소절을 부를 때마다 나는 회개의 눈물을 흘린다.

나는 아내와 함께 지금도 교회에서 찬양대원으로 봉사하며 많은 은혜를 받고 있다. 우리들이 노래를 잘 해서 찬양대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찬양’의 히브리어 ‘테힐라’는 ‘하나님을 축하하다. 자랑하다’의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축하할 수 있는 찬양대원은 그런 의미에서 큰 특권이요,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찬양하는 순간만이라도 남을 미워하거나 헛된 잡념에 빠지지 않고 평화와 기쁨을 유지할 수 있으니 분명 내 정신 건강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부르는 찬양을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엡 5: 19)”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요즘 찬양할 때, 흥겨워서 손뼉치고 열정적인 몸짓을 하는 것은 어딘가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은 목소리로 또는 허밍으로 눈을 감고 찬양할 수도 있다. 또한 가끔은 시를 낭송하듯 흥얼거리며 말씀을 낭송할 수도 있다. 요란하게 큰 소리로 외칠 때보다도 조용하고 잔잔한 음성으로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하고 찬양할 때, 나는 오히려 더 많은 감동이 있고 성령 충만함을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