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단
그리스도의 완전한 만족과 언약의 요구
<이차식 목사 | 율곡숲교회>
칼빈에 의하면 믿음으로 얻는 의는 그리스도의 의로서
우리에게 있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있지만 전가에 의해 우리의 것이 된다
믿음은 모든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확실한 지식과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 사함과 영원한 의와 구원을 주신다는 견고한 확신이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만족과 율법을 지킴은 서로 대립되지 않으며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하여야 한다
본 글에서는 그리스도인의 구원에 대해 서술한 후에 언약백성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 이유는 오늘날 언약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언약에 대해서 강조하면 마치 로마 가톨릭처럼 선행구원을 우려하거나 알미니안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과연 그런 것인가?
1 인침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며, 의가 목적어이다.
할례 혹은 세례는 칭의와 성화의 약속에 대한 인이다. 칭의는 믿음으로 된다. 성화는 희생이 따른다. 이는 성경의 다음 구절을 근거한다.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롬 4:11). 이 구절을 해석할 때 토마스 R. 슈라이너(Thomas R. Schreiner)는 (1983년부터 아주사퍼시픽 대학교에서 가르치면서 켄터키주 루이빌에 있는 클리프톤 침례교회에서 설교 목사로 봉사하고 있다) 믿음이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믿음에 초점이 있다. 이를테면 믿음에서 출발하여 의롭게 되고 할례를 받는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칭의는 사람으로부터 출발한다. 로마서 4장 11절의 인침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관한 것을 인을 쳤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할례를 앞선다. 하지만 이 방식이 다른 족장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이삭과 야곱은 믿음이 있기 전에 할례를 받았다. 태어난 지 불과 8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
토마스 R. 슈라이너가 근거로 내세운 로마서 4장 11절에서 인침은 믿음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의가 초점이다. 로마서 4장 11절은 의가 목적어이다. 사람을 의롭게 함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사람이 믿음으로 시작을 해서 하나님께서 비준을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 의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주의 날 제23주 제60문: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게 됩니까? 답: 비록 내 양심이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크게 범했고 그 계명 중 어느 하나도 지키지 못했으며 아직도 모든 악에 기울어져 있다고 고소할지라도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 자신의 어떠한 공로도 없이 오직 은혜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대속과 의와 거룩을 나에게 돌리십니다.” 여기에 요지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여김을 얻는 것은 우리의 공로와 상관이 없다. 오직 은혜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죄인에게로 전가되어지는 것이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롬 3:28). 엄밀히 말하면 믿음 그 자체가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뜻이 아니다. 믿음은 단지 우리의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붙잡는 방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벨직신앙고백서 제22항).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 분의 모든 공로들과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행하신 모든 거룩한 행위들을 우리에게 전가하신다”(벨직신앙고백서 제22항).
2 오시안더와 알미니안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의 전가를 부인하였다.
고재수 교수는 자신의 책(Nicolaas H. Gootjes, Teaching and Preaching the Word: Studies in Dogmatics and Homiletics)에서 개혁교회 고백서들에 대한 역사적 정황들을 잘 설명해 준다. 우르시누스나 1560년대 신앙고백인 “39개조” 그리고 “제2스위스 신앙고백”에는 능동적 순종에 대한 것이 없었지만 1566년 안트베르프(antwep) 총회가 벨직신앙고백서 제22항에 작지만 중요한 단어를 삽입하였다. 이를테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공로들 그리고 그가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모든 거룩한 행위들이 우리의 의다” 에서 ‘그리고’(and)를 삽입하였다. 그 이유는 이 둘을 따로 구분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과 능동적 순종을 구분하기 위함이었다.
거기에다가 “우리를 대신하여”라는 표현도 귀도 더 브레가 한 말이 아니다. 1619년도에 돌트회의에서 덧붙인 내용이다. 당시 알미니안들은 능동적 순종을 부인하였다. 그래서 네델란드 신앙고백서 제22항에 능동적 순종에 대한 성경의 내용을 넣었다. 개혁교회 고백서나 돌트신조에서 능동적 수동적 순종에 대한 단어 자체를 찾을 수는 없다. 능동적 수동적 순종이란 말도 귀도 더 브레가 한 말이 아니다. 또한 고백서도 그 주제를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과 개혁교회의 신조들 안에는 그 내용면에 있어서 부인할 수 없는 흔적이 많다(돌트신조 제1조 오류에 대한 반대 3항). 여기서 유의할 바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수동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능동 수동이라는 것은 그 어휘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며 단지 그렇게 분류하여 칭할 뿐이다. 이는 고유 명사이다. 개혁교회들은 능동적 수동적 순종을 모두 인정하나, 이와 같이 능동적 순종을 강조하게 된 배경에는 오시안더의 그릇된 주장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순종에 대하여 말할 때는 능동적 수동적 순종이라는 어휘보다는 완전한 순종이라고 함이 좋을 듯하다.
오시안더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으심에 의해서 받는 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신적 본질과 속성이 우리 안에 주입이 됨으로서 우리는 본질적으로 의롭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본질적으로 연합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게 될 뿐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의는 완전한 의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의를 죄인이 은혜만으로 얻는 것이 아니며 값없이 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시안더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인 제사장으로서 죄를 속하고 화목제물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푸신 것이 아니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영원히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므로 그의 신성에 의하여 우리의 의가 되셨다고 한다. 그래서 개혁교회와 루터교회는 오시안더와 알미니안의 그릇된 주장에 대처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3 우리의 의는 그리스도의 인성으로 고난을 받아 믿음으로 전가된 의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우리의 의는 그리스도께서 인성으로 고난을 받아 전가된 의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신성이 우리의 의라면 성부하나님과 성령하나님도 우리의 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신성의 본질이 우리에게 주입이 됨으로 우리가 의롭게 된다면 그리스도께서 일평생 순종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고난을 받으실 이유가 없게 된다. 오시안더는 “신자에게는 더 이상 죄가 존재하지 않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칼빈에 의하면 믿음으로 얻는 의는 그리스도의 의로서 우리에게 있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있지만 전가에 의해 우리의 것이 된다. 믿음으로 전가된 의를 우리에게서 제외하면 실제로 우리는 의롭지 않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뒤에도 행위가 계속하여 죄에 오염되어 있다.
4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였다.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주의 날 제5주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12문: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따라 현세에서 그리고 영원히 형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면 어떻게 이 형벌을 면하고 다시 은총을 입을 수 있겠습니까? 이 내용에 따르면 우리의 구원은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어떻게 형벌을 면할 것인가. 둘째, 어떻게 다시 은총을 입을 수 있는가이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서려면 모든 죄가 사해져야 한다. 그러나 죄 사함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것만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다시 의로워져야 한다. 이를테면 하나님께서 죄를 사해 주시고 하나님께 다시 호의 가운데 받아들여지려면 의로워져야 한다. 그러므로 죄 값이(속량) 필요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데(아들의 명분) 다른 의가 필요하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는 이 죄 값을 절대로 치를 수 없으며 우리는 날마다 죄 값을 증가시킬 뿐이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주일 제13문).
제12문에서 “다시 은총을 입을 수 있는가” 라는 말은 다시 하나님 앞으로 설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는 마치 아담과 하와가 추방된 후에 하나님의 호의로 받아들여진 것과 같다. 갈라디아서 4장 4,5절에 의하면 “때가 차 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한다. 율법아래 나게 하셨다는 말씀은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시고 그 저주를 감당하기 위해서 유대인으로서 율법의 의무를 지고 낳으셨다는 의미다. 그 목적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기 위해서다.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없이 하시고 죄인이 의를 얻었는가라고 할 때 다른 어떤 방식이 아니라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피로부터 친히 참 인성을 취하셨다(요 1:14; 갈 4:4; 히 2:14; 주의 날 제14주일). 신성이 아닌 그 인성이 자신의 일생을 통한 순종으로(롬 5:19) 우리를 위해 의를 성취하신 것이다. 속량과 아들의 명분은 주의 날 제13주일 제33문에 ‘입양된’ 그리고 제34문의 ‘속량’이라는 단어로 서술되었다.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독생자만이 본성상 영원한 아들이시다. 우리는 본성상 진노의 자녀이었는데 그리스도 때문에 은혜로 하나님께 다시 받아들여졌다. 이를테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의 중다한 모든 죄들은 깨끗이 사함을 얻었으며 다시 하나님께로 받아들여진(입양된) 그 분의 자녀들이 되었다(엡 1:5, 6; 갈 4:6).
5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는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
완벽한 의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주의 날 제23주일과 벨직 신앙고백서 제22항, 23항에서 요약한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게 됩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비록 내 양심이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크게 범했고 그 계명 중 어느 하나도 결코 지키지 못했으며 여전히 모든 악에 기울여 있다고 고소할 지라도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 자신의 어떠한 공로도 없이, 오직 은혜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만족과 의와 거룩을 나에게 돌리십니다. 그 분은 마치 내가 어떤 죄도 지은 일이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이루신 모든 순종을 나 자신이 이룬 것처럼 이것들을 나에게 주십니다. 내가 만일 이 선물을 믿는 마음으로 받는다면 그리 하십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3주일 제60문).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완전한 의다. 우리의 양심은 끊임없이 고소한다. 또한 여전히 악으로 치우쳐 있다. 그러나 내 자신의 어떤 공로도 없이 이러한 것들을 그 분이 내게 주신다. 마치 내가 어떤 죄도 지은 적이 없는 것처럼 마치(as if가 중요하다) 내가 모든 순종을 성취하여 완수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내게 완전한 만족과 의와 거룩을 부여해 주신다. 내가 이 선물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말이다. 이와 같이 주의 날 제23주일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여겨지는 방식에 대하여 설명한다. 여기에서 믿음은 도구다. 참 믿음에 대하여 벨직 신앙고백서 제22항은 이렇게 요약한다. “참 믿음은 예수그리스도와 그 분의 모든 공로를 받아들이고 그 분을 우리의 소유로 삼으며 그 분외에 다른 것을 찾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든지, 아니면 그것이 그분 안에 모두 있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이 완전한 구원을 소유하게 되든지, 둘 중의 하나가 반드시 일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충분하지 못하고 그분 외에 다른 무엇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신성모독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단지 절반만 구주가 되신다는 결론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 그 자체가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은 단지 우리의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붙잡는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믿음을 정의한다면 주님이 계시하신 모든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확실한 지식과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은혜로 죄 사함과 영원한 의와 구원을 주신다는 견고한 확신이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7주일).
6 언약의 의무를 강조하면 그리스도의 완전한 만족을 훼손하는가?
성경은 신자라도 의롭지만 죄의 본성이 남아있다고 말씀한다. 사실은 의인이 아닌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의로 여겨졌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죄를 짓는다. 이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고린도전서 10장을 실례로 들면 도움이 될 것이다. 고린도전서 10장은 우리에게 순종의 의무에 대해서 교훈한다. 구약의 광야교회가 어떻게 멸망을 당하게 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11절에 의하면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 하였느니라”라고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10장에서는 세례를 다루며 11장은 성찬과 연결된다. 고린도전서 10장 2절은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모두 다 함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세례는 신약에만 속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모세는 구약의 사람이다. 그런데 영감 받은 바울사도는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다’라는 어휘 속에는 물론 유아들도 포함된다. 세례의 대상은 언약백성들 모두이다. 세례의 대상을 창세 전 영원으로의 택자라고 하면 곤란하다. 또한 골로새서 2장 11절은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라는 말씀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처럼 골로새서는 신약시대의 성도들이다. 할례는 구약에 속한 어휘이다. 그리스도는 신약에 속한다. 그런데 골로새서의 성도들을 향하여 사도는 구약의 할례를 받았다고 한다. 세례와 할례가 서로 병행으로 사용되었다.
구름과 바다는 수분으로 구성되었다. 구약의 언약백성들이 모세에게로(into) 세례를 받았다. 우리는 이 문맥에서 여러 가지로 궁금해 할 수 있다. 여기서 유추해 볼 수 있는 것들은 세례가 무엇이며 세례의 당사자는 누구인가이다. 그리스도와 택자가 언약의 당사자인가? 그렇다면 그들이 왜 멸망을 받았는가? 언약의 구성요소는 약속만 있는가? 요구되는 언약의 의무는 없는가? 세례를 받은 언약백성이 멸망을 받은 이유는 뭔가? 언약이 파기될 수 있는가? 그 의미는 무엇을 뜻하는가? 등이다. 이러한 것들은 이미 정리가 되었지만 오랫동안 주요한 이슈가 되어왔다.
개혁교회는 주석을 따라 석의를 하지 않는다. 우선 고백서를 가지고 석의를 한다. 왜 유아가 세례를 받는가라고 할 때, 벨직 신앙고백서와 개혁교회의 유아세례예식서 그리고 성인세례예식서를 기반으로 한다. 벨직 신앙고백서 제34항에서 설명을 한다. “그것은 우리가 바로의 학정, 말하자면 마귀의 학정을 벗어나기 위해 통과하여 영적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만하는 우리의 홍해입니다.” 세례 전 기도에서 “주님께서는 강퍅한 바로와 그의 백성을 홍해에 빠뜨리셨으나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바다 가운데에 내신 마른 땅 위로 인도해 내심으로 세례를 표시하였사옵니다”라고 한다. 벨직 신앙고백서 제34항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보배로운 피는 홍해이다. 이는 고린도전서 10장 2절을 근거한다(롬 6:3; 벧전 1:2; 2:24). 모세의 세례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언약백성들에게 바로의 군대가(마귀) 닥쳐 올 때 홍해(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지나가는 길밖에 없었다. 벨직 신앙고백서 제34항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7주일(제74문)을 보면 세례를 다루면서 “세례는 언약의 표로 인침을 받아야 한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상징이었다”라고 한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도 홍해 가운데 세례를 받았다고 한 후에 순종의 의무를 강조한다. 그들에게 당한 일들은 구약의 조상들처럼 신약의 언약백성들이 멸망하지 않기 위한 거울이라고 한다. 언약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례를 통하여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살아갈 언약의 의무를 짊어진 것이다. 신자에게 율법을 지킬 의무를 강조하면 우리의 행위가 마치 구원의 근거가 되는 것처럼 예민해 하는 분들이 있다. 언약의 의무를 강조하면 오직 그리스도, 오직 성경, 오직 은혜의 가르침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로마 가톨릭처럼 인간의 선행이 끼어들어서 구원에 기여시키는 것으로 심히 우려하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한 감사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주님의 가슴에서 나온 율법을 사랑한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만족과 율법을 지킴은 서로 대립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하여야 한다. 신약의 산상수훈에 주님의 10계명에 대한 설교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부인함이겠는가. 사도 바울이 언제나 전반부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설명한 후 후반부는 언약적 삶을 요구하는 것은 선행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인상을 주고자 함이겠는가.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경고하신 주님의 말씀은 성경 전체의 구원의 교리와 충돌되는 말씀이겠는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우리는 어떠한 인간의 공로나 선행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으면 반 율법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 나라에 합당한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아니할 수 없다.
<이 글은 Knowing the Times 13호에 실린 내용이다 _ 필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