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칼럼|
‘이단’(Heresies)에 대한 ‘관원’의 역할
<장대선 목사 | 도서출판 고백과문답 대표 | 장로교회정치연구소장>
이단에 대해 세속정치가 전적으로 분리돼
관여하지 않는 것은 현실에서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개혁된 교회들은 교회의 목회자들과 관원들이 협력해
이단에 적극 대처하고 그것을 제거했었다
현대 대한민국의 아주 중대한 결함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서 역사 혹은 전통에 대한 의식이 상당히 희박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가까운 일본만 하더라도 수대에 걸쳐서 가업을 이어온다거나 전통과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정체성의 확보는 모든 정당성을 확보하는 가장 기초이자 근간이 되는 것이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일본에 의해 역사와 전통을 말살당하는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를 겪은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에서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는 역사와 문화의 사상적인 저변이 지금까지도 취약한 실정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처럼 역설적인 역사와 문화를 배경으로 자리한 한국의 기독교 신앙 또한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인식의 결여를 보여주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개신교 선교의 역사가 이미 백 년을 넘어선 시점이지만, 정작 그 기원과 전통에 대한 인식은 개신교 신앙에서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러나 헤롤드 브라운(Harold O. J. Brown)은 이단에 관한 그의 책 『Heresies: the image of Christ in the mirror of heresy and orthodoxy from the apostles to the present』에서 “기독교는 수세기 동안 영속된 옛 관습이라는 측면에서 전통적 종교라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기독교에서 전통의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특히 그는 이르기를 “기독교인들이 수세대동안 전해준 첫 번째 것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성경이다. 두 번째는 간결하고 신비로운 성경구절들의 의미를 전통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법”이라고 말하면서, “지금 우리가 정통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전통적 이해를 말한다.”고 설명한다. 바로 이러한 헤롤드 브라운의 설명에서 보자면 한국의 기독교는 가장 중요한 성경은 비교적 잘 전해 받았으면서도, 다음으로 중요한 “성경구절들의 의미를 전통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법”은 아직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 할 것이다.
사실 성경구절들의 의미를 전통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이단을 정의하고 분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자 근거를 제공한다. 그처럼 제공되어 형성된 정통의 교리에서 벗어나는 주장들이 바로 ‘이단’(Heresies)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단의 문제는 이미 넓어질 대로 넓어져 있으며, 거의 무한하게 다원화 된 현대적 사고와 가치관 가운데서는 마치 ‘양심수’(prisoners of conscience)의 경우처럼 법으로 제한할 수 없는 자유로운 양심의 문제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실정이다. 마치 자신의 윤리적·사상적·정치적 신념을 자유로이 펼칠 수 있어야 함과 같이, 종교 혹은 신앙의 문제 또한 개인이 얼마든지 자유롭게 취할 수 있는 입장이나 견해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옛 라틴의 격언인 “Corruptio optimi pessima est”, 즉 가장 선한 것이 타락하면 가장 추악한 것이 된다고 하는 말처럼, 정통의 교리에서 살짝 이탈하여 벗어나게 된 이단의 문제는 종교적으로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극악한 피해를 입히는 심각한 것이다.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추구한다거나 시한부 종말론에 바탕을 둔 집단적인 격리생활, 심지어 광신적 집단자살이나 원시 공산제(primitive communal)의 추구 등의 끔찍하고도 실질적인 피해를 야기해 온 것이 바로 이단들의 공통적인 양상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단들은 이미 신약성경 안에서부터 언급되어 정죄되고 있는데, 벧후 2:1절에서 사도는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고 하면서 또한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고 했다. 이미 사도들의 시대부터도 이단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정죄하여,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딛 3:10)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인 주후 325년 니케아 회의(The Council of Nicaea)로부터, 심지어 나폴레옹의 치세에 이르기까지 이단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뿐 아니라 국가와 사회에 있어서까지도 아주 중요한 사안이었다.
바로 이 같은 중요성에 바탕을 두고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서부터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심지어는 종교개혁의 시대를 거쳐서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종교회의들은 순수하게 교회와 신학자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위정자(군주)와 관원들이 주관하는 가운데서 이뤄졌다. 중세 시대의 로마가톨릭교회에서는 종교적인 권한(jurisdiction)뿐 아니라 사법적인 권한까지 종교재판을 통해 사용했지만, 그러한 부패가 진행되기 전, 그리고 그러한 부패가 개혁된 이후의 교회는 군주 혹은 관원들과 긴밀한 협력 가운데서 이단의 문제를 판단하고 정죄하며, 심지어 사법적인 처결까지 단행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30년 전쟁(1618∼1648)을 대표로 하는 종교개혁 시대 이후의 수많은 전쟁의 피비린내 나는 기억은, 신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강박적으로 고집하게 했다. 그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총회 이후로 세속군주와 교회와의 긴밀한 협력은 거의 완전히 소실되기에 이르렀고, 심지어 웨스트민스터 총회 자체에서도 이미 세속정치의 야욕과 그로 말미암은 분열 및 쇠퇴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 이후로 봉건적 왕조체제가 붕괴된 이후부터 시작된 ‘정교분리’(the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의 원칙은, 신대륙 아메리카에 전래된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특히나 연방의 연합을 위해 가장 기본적이며 거스를 수 없는 대원칙으로 고착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세속정치와 종교 사이를 완전하게 분리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현대적인 정교분리의 모범적인 예로 꼽히는 미국의 수정헌법 제1조(여기서는 연방정부든 주정부든 공식적인 종교를 가질 수가 없으며 모든 국민들은 그가 택한 신앙을 자유로이 믿을 수 있음을 규정하고 있는데, 한국의 제헌헌법 또한 이러한 맥락을 견지했다.)의 의도도, 사실은 앞서 영국의 국교회에서 보여준 폐단을 차단하려는 것이었을 뿐, 정치와 종교를 완전하게 분리하려는 의도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국교를 근거로 개혁된 교회와 신앙에 대한 종교적 차별을 금지하도록 하는 세속정치의 권한을 헌법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바로 수정헌법의 바탕인 것이다.
예컨대 최근 몰아치고 있는 코로나 사태가 한국에서는 ‘신천지’라고 하는 이단들과 깊이 엮여 있으며, 이들에 대한 사법적 처리의 필요성이 널리 인식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종교의 문제에 대해 세속정치가 전적으로 분리되어 관여하지 않는 것은 현실에서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역으로 신천지 이단은 이미 오래도록 정치권과 여러 사회적 권위구조에 줄을 대고 있었으며, 또한 사회적으로 심각한 피해(이번 코로나 사태 뿐 아니라 가정파괴와 같은 물의와 폐해를 이미 일으켜 오고 있었다)를 입히는 그들에 대한 사법적 처벌이 마땅히 요구되고 있는 형국으로, 종교와 세속정치의 적절한 관계의 설정이 이미 현실적인 필요로 대두되어 있는 것이다.
만일에 세속정치가 종교의 문제에 전혀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으로만 정교분리 원칙을 이해한다면, 기독교의 이단인 신천지의 문제에 사법적인 개입이 이뤄지는 것은 정교분리의 원칙에 역행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가 정당화된다면, 사실상 신천지와 같이 사회적으로 심각한 피해와 물의를 일으키는 이단 집단을 통제하거나 제한할 수 있는 현실적인 수단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실정법상 규정하는 심각한 범죄를 자행하지 않는 이상, 그들의 문제에 공권력은 전혀 관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사실 그 동안 기독교 이단인 신천지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기성교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단에 대처하거나 그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기껏해야 ‘신천지 이단의 출입을 금합니다.’라고 하는 경고문을 출입문에 붙여두는 정도의 대처만이 거의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방안이었을 뿐, 사실상 이단들의 폐해와 해악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개혁교회의 치리서(1559)나 스코틀랜드 제2치리서(1578),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서 공히 파악되는 세속정치와 교회의 관계는,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오히려 관원들의 종교에 관한 분명한 역할과 기능이 부여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 제23장은 “국가의 관원”에 관해 3항에서 규정하기를, “관원은 말씀과 성례의 집행도, 천국 열쇠의 권세도 자기 것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관원은 교회의 일치와 평화가 유지되도록 하며, 하나님의 진리가 순결하고 온전한 상태로 간직되도록 하고, 모든 신성모독이나 이단들의 활동을 금지하며, 예배와 권징에 있어서 발생하는 모든 부패와 악습을 예방하고 개혁하도록, 또한 모든 하나님의 규례들이 정당하게 확립되고 시행되며 준수될 수 있도록 적절한 방안을 강구할 권한을 가지며, 그렇게 하는 것이 관원으로서의 책무”라고 규정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 제2치리서도 10장에서 “교회의 기독교 관원들의 직무”에 관해 규정하기를, “비록 세상 왕과 군주라 할지라도 그들이 경건한 자들이라면, 때로는 그들의 권력으로, 경건한 유다의 몇몇 왕들과 신약시대의 여러 경건한 황제들이 본을 보인 것과 같이, 타락하고 무너진 교회의 모든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목회자들을 배치하고 무너진 교회의 모든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목회자들을 배치하고 주님의 참된 예배를 복원하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고 했다. 로마가톨릭교회가 이단에 관련한 관원들의 역할까지도 교회가 거머쥐도록 변질되었던 것과는 다르게, 16세기 종교개혁 시대 이후로 개혁신학이 융성했었던 17세기에 이르기까지, 개혁된 교회들은 교회의 목회자들과 국가의 관원들이 함께 협력하여 이단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제거하도록 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역사적 문맥이 단절된 현대사회에서의 이단의 문제 또한, 교회뿐 아니라 국가의 관원들이 담당할 역할과 영역을 교회 스스로 규정해야 하는 것이 당면한 과제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신천지의 경우와 같이 사회적인 물의까지 일으키는 이단들의 확장을 차단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안을 기성교회들 스스로 전혀 강구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 상황은, 바로 그러한 문제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